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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바라본 목탑지> 


아래는 2018년 4월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고즈넉한 농촌 평야마을 한가운데 위치하는 제석사지(帝釋寺址)라는 백제시대 절터 현지 유적 안내판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글과 영문 안내판은 거의 손대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아울러 뒤에는 제석사지와 관련한 현대 역사를 추적할 만한 관련 언론 보도를 시대순으로 나열한다. 제석사지 흐름을 간취하는 데 도움이 없지는 않으리라.  


익산 제석사지

益山帝釋寺址

Jeseoksa Temple Site in lksan

사적 제 405호

Historic Site No. 405


이 터는 백제 시대의 사찰인 제석사가 있던 곳이다. 제석사지는 무왕대의 익산 천도설을 밝혀 줄 수 있는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절터이다. 판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따르면, 제석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불타버렸으나,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넣었던 칠함(漆函)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짓고 안치하였다 한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터·금당터·강당터·회랑(回廊) 등이 확인되었으며,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이곳은 몇 개 남지 않은 백제 절터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This is the site where Jeseoksa Temple stood during the Baekje Kingdom (18 B,C.~ 660).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Jeseoksa was found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 (600 641) but was destroyed by fire started by lightning in 639. Relics of Buddha and a Vajra Sutra casket kept inside the pagoda remained, and they were enshrined when the temple was rebuilt.


Excavation of this site found sites for a wooden pagoda, a main temple hall, a lecture hall, and narrow corridors. Also discovered was a roof tile with an inscription bearing the temple name, Jeseoksa, This is one of only few temple sites from Baekje, making this site extremely important for research. 


<제석사지 건물 배치 양상>


목탑터 / 木塔址 / Wooden Pagoda Site 


목탑터는 중문터에서 약 18.5m 떨어져 있고, 중문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37m이다. 목탑터의 중심에는 길이 182cm, 너비 175cm, 두께 76cm인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채로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길이 60cm, 너비 26cm, 깊이 16cm인 사리공이 뚫려 있다. 목탑은 하층 기단깨비의 길이가 21.2m인 이중 기단구조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안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1.2m인 불단佛壇으로 추정되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목탑의 기초基礎는 약 3m 높이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촉颾해 만들어져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 통로가 네모서리에서 확인된다. 


The wooden pagoda site is located 18.5m away from the edge of the middle gate site and 3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agoda site has a capital pillar stone at the center, split into two pieces measuring 182cm long, 175cm wide, 76cm deep. 


Moreover, there is a sarira chamber carved at the center of the pillar stone. The wooden pagoda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on double-layered square platforms, with the outer layer being approximately 21.2m long. The inner layer is approximately 11.2m long and was likely used as a Buddhist altar. 


Located approximately 3m above the lowest platform, the base of the wooden pagoda is intricately designed and constructed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Each side of the four platforms has stairs in the middle, and work paths used to reinforce the underground foundations have been found at the four corners. 


<목탑터 기단>


<목탑터 심초석, 남에서 북으로>


금당터 / 金堂址 / Prayer Hall Site


금당터는 목탑터에서 약 17m 떨어져 있고, 목탑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1m이다. 기단은 길이 약 30m, 너비 약 21m의 상층 기단과 길이 약 32m, 너비 약 23m의 하층 기단으로 이루어진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다. 기초는 적갈색 사질 점토와 황색 마사토로 정교하게 판축하여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약 5m, 너비가 약 3m인 계단 시설 흔적이 앞·뒷면 중앙 2군데에 있다. 제석사지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고,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1 : 0.74로 부여 금강사지 중창(重創) 금당과 비슷하다. 금당터에서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인동 자엽의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여러 점 출토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17m away from the edge of the Pagoda Site and 41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consists of two layers, with the upper one being approximately 30m long and 21m wide and the lower one approximately 32m long and 23m wide. The foundation was intricately built out of reddish brown sandy clay and decomposed granite soil, using rammed-earth technology. Remnants of stairs, approximately 5m long and 3m wide, have been found in the middle of the front and rear of the site. This prayer hall site at the Jeseoksa Temple Site is among the larger ones from the Baekje Period, and its horizontal to vertical ratio of 1:0.74 is similar to that of the reconstructed prayer hall at the Geumgangsa Temple Site in Buyeo. Several concave roof-end tiles with honeysuckle scroll designs and 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s, typical artifacts from the Baekje Period, have been found intact, raising interest in the site.


<목탑터 심초석 너머가 금당터>


강당터 / 講堂址 / Lecture Hall Site


강당터는 금당터에서 약 26m 떨어져 있고, 금당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7m다. 기단은 길이 약 52m, 너비 약 18m의 단층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 3군데서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 중앙 계단의 규모는 길이 약 150cm, 너비 88cm다. 강당터는 규모나 구조에서 익산 미륵사지 강당터와 비슷하다. 


The lecture hall site is located 26m away from the edge of the Prayer Hall Site and 47m away from the center of the site. The platform is presumed to have been a single-level one, approximately 52m long and 18m wide. In addition, stairs have been found at the front, back, and left center of the site, and it is likely that they also existed at the right center. The three sets of stairs discovered are approximately 150cm long and 88cm wide. In terms of its scope and structure, the lecture hall site resembles the one at the Mireuksa Temple Site in lksan.


<강당터, 동에서 서쪽으로>


출토 석재 / 出土石材 / Stone Artifacts 


제석사지 발굴조사 및 유적 정비과정에서 수습된 석재들이다. 초석․지대석․갑석 등 다양한 종류가 확인되는데, 제석사 건물에 쓰인 부재로 추정된다. 


Stone Artifacts Unearthed from Jeseoksa Temple Site, lksan

These stone remains were discovered during the archaeological surveys and the improvement works at Jeseoksa Temple Site. 

A wide variety of artifacts, such as column foundations, foundation stones, and cover stones were identified. In all likelihood, they were among the materials used for the construction of buildings at Jeseoksa Temple. 


<출토 석재>


제석사지 관련 언론보도 모음 


1994.01.05 18:18:00 

益山군 王宮면서 백제 무왕창건 절터 확인


    (裡里=聯合) 全北 益山군 王宮면 王宮리 宮坪마을(일명 궁들마을)에서 중국  문헌에 ‘百濟 武王이 천도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절터(帝釋寺址)가 확인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원광대 부설 馬韓․百濟문화연구소(소장 金三龍총장)는 5일 오후 지도위원회의를 열고 추정 금당지와 추정 강당지등 유구와 百濟시대의 忍冬唐草文 암막새 등 유물을 공개했다.

    중국의 觀世音應驗記에는 “百濟 武王이 枳慕蜜地(한국 지명으로 金馬渚)로 천도한 뒤 精寺(帝釋寺)를 창건했으나 서기 639년에 낙뢰에 맞아 소실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최근 인근 王宮寺址에서 시굴된 건물터(왕궁터로 추정)와 관련, 왕궁면 일대가 백제시대의 또 다른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金三龍 총장은 “王宮면이 시사하는 지명이나 중국의 문헌, 현재까지 진행된 益山군 王宮면과 金馬면 일대의 고적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때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王宮면에 百濟의 도읍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면서 “특히 이번에 절터가 확인됨으로써 그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지도위원회의에 참석한 金正基 박사(한림대 교수. 전 문화재연구소장)는 “추정 금당지의 기단구조가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 축조된 점으로 미루어 이 절이 왕과 직결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해 정밀한 조사와 함께 잘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정금당지는 규모(추정)가 동서 30m 남북 23.2m이며 彌勒寺址와 같은 이중의 기단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추정강당지의 규모(추정)는 동서 50m 남북 18.4m이다.(끝)

(조순래 기자 작성)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3.21 09:17:00

익산 제석사터 국가 사적지로 지정


    (익산=연합)全成鈺기자 = 백제시대의 절터로 백제 武王의 익산 천도 사실을  뒷받침해 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帝釋寺地)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다.

    23일 익산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 일대 제석사터 2만3천여㎡를  문화재관리국이 최근 ‘사적 제 405호’로 지정 예고했으며 내달 초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예정이다.

    이 제석사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백제 절터 중 하나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절터에는 7층 목탑지로 판단되는 건물지가 남아있으며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금당지와 강당지 등을 확인했다.(끝)


1998.05.13 09:26:00 

국가사적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전북 익산시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최근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내년부터 이 일대 2만3천여㎡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시는 이를 위해 사적지 안에서의 모든 건축행위와 광물의 채취나 반출,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지난 93년 원광대 부설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부분 발굴에 그친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이 절터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해 창건과 폐사연대를 알 수 있으며 백제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암막새가 출토되어 한국 미술사 및 사찰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돼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왕궁평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는데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목탑지(木塔址)와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등의 기단이 발굴돼 이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됐었다.(끝)


1998.11.18 09:41:54 

익산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 유보 


     (익산=연합) 全成鈺기자 = 전북 익산시는 제3산업단지 조성사업이 道와의 입장차이로 산업단지 지정이 불투명해져 이를 유보키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시는 왕궁면 일대에 1천1백억원을 들여 오는 2002년까지 60만6천여평 규모의 제3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지난 5월 전북도에 산업단지 지정신청을 했으나도가 이를 미루고 있다.

     시는 현재 가동 중인 1, 2산업단지가 포화상태여서 지역발전을 위해 자동차부품, 전자, 통신, 기계산업 등 첨단산업을 유치할 제3산업단지 조성이 절실하다며 지난 96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뒤 개발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그러나 도는 도내 미분양 공단 부지가 5곳에 2백51만평에 이르고 있는데도 각 시․군에서 경쟁적으로 신규 공단을 조성하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익산의 제3산업단지 조성 예정지는 백제 말 궁성일 가능성이 높은 왕궁평성과 왕실기원 사찰인 제석사지 등 국가 유적지와 가까워 이를 훼손할 우려가 높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에 따라 시는 문화재 보호대책과 함께 경기가 호전돼 공단부지 분양전망이 밝아질 때까지 공단조성 사업을 미루기로 했다.(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1999.04.12 18:24:00

백제 절터 제석사지 발굴조사


    (익산=연합뉴스) 전성옥기자= 전북 익산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백제말 익산  천도설(遷都說)의 비밀을 간직한 제석사지(帝釋寺址)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3일 시에 따르면 시내 왕궁면 왕궁리의 제석사 터가 작년에 국가 사적 405호로 지정 고시됨에 따라 문화재 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이 일대 2만3천여㎡을 사들여 발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시는 이를 위해 국토이용관리법상 ‘토지 이용계획 확인서’에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음을 등재, 모든 건축과 광물의 채취나 반출 등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하기로 했다.

    시는 또 이 절터를 내년부터 모두 사들여 연차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이고 사적지 보존 및 복원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백제 왕실 기원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이 절터는 백제 무왕(武王)대의 익산 천도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성 유적과 함께 백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말 익산 천도설은 학계의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지난 70년 발견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무왕이 왕궁평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제석사를 지었으나 서기 639년 벼락으로 전소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sungok@yonhapnews.co.kr(끝)


<출토 소조상>


2003.05.16 12:07:13 

익산서 흙으로 구운 불상 수십점 발굴


    (익산=연합뉴스) 전성옥 기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가마터에서 삼국시대에 흙으로 만든 불상 수십점이 발굴됐다. 

    원광대 박물관은 16일 "익산시의 의뢰로 지난 3월부터 시 향토유적 2호인 왕궁리 가마터를 시굴조사하던 중 가마터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흙으로 구운 불상의 두상 등 수십 점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흙으로 구운 다수의 불상과 이를 굽던 가마터를 발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백제 때 소조불상(흙을 구워 만든 불상)과 보살상, 천부상, 악귀 및  동물상 등이 연화문 수막새, 기와 등과 함께 수습돼 삼국시대 불교사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토된 불상은 완전한 형태는 아니나 길이 20-30㎝의 두상과 몸통, 좌대 등이며 백제시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연화문 수막새 60여 점도 함께 수습됐다.

    이중 두상의 우측 절반만 남아 있는 천부상은 고온으로 구워 회청색을 띠고 두툼한 볼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전형적인 백제시대 불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원광대 김선기 책임연구관은 "이 가마터는 백제시대 왕궁터인 왕궁리  유적지와 왕실 기원사찰이었던 제석사지의 기와와 불상을 굽던 곳으로 추정된다"며 "삼국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는 만큼 보존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사진있음)

    sungok@yonhapnews.co.kr 

(끝)

 


2007.08.29 15:22:21 

익산 제석사지 본격 발굴


    (익산=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제석사지(사적 제405호)를 발굴한다고 29일 밝혔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A.D.600∼641년)이 수도를 금마로 옮기기 위해 세운 왕실 절로 추정되는 제석사지는 얼마 남지 않은 백제사찰지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발굴작업은 오는 30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진행된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1993년 시굴조사를 실시, 명문와와 암막새를 비롯한 7세기 당시의 기와를 다량 발굴했다.

    부여연구소는 "사찰 중심부(9천100㎡)인 목탑지-금당지-강당지에 걸쳐 발굴하며, 사찰의 규모 및 존재양상, 각 유구들의 축조방법을 밝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ichong@yna.co.kr

(끝)  

 

<목탑터 기단판축>


2008.07.09 17:36:59 

백제 3중기단 목탑지 첫 확인

부여문화재연구소 제석사지 발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목탑이 들어설 기단을 3중으로 다져 만든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전북 익산 제석사지(사적 405호)에 대한 올해 발굴조사 결과 정교한 판축(版築)으로 만든 삼중기단 목탑지와 백제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화려한 인동당초문 암막새를 출토한 금당지 등을 확인했다고 9일 말했다. 

    제석사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옛 문헌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 사비(부여)에서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는 일환으로 세웠다가 639년에 벼락이 쳐서 불당(佛堂)과 회랑(回廊) 등이 불탔다고 한다. 

    조사 결과 두께 약 3m에 3중인 목탑 기단은 차곡차곡 흙을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깥쪽 기단은 한 변 길이 21.2m에 이중 구조였으며 그 안에 목탑 중심부가 위치하는 또 다른 기단이 드러난 것이다. 

    목탑은 우선 지면을 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약 70cm 두께로 갈색 사질 점토를 채워 넣은 다음, 다시 그 위에는 약 250cm 두께로 또 하나의 판축 기단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소는 이와 같은 3중 기단 갖춤 목탑은 동아시아 3국 불교 건축에서는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전형적인 백제 연화문 수막새 및 다른 기와 편과 함께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다량으로 확인됐다. 

    조사단은 이 암막새들이 "같이 출토되는 유물 및 그 출토 층위를 볼 때 백제시대 유물로 판단된다"면서 "중앙에는 도식화한 귀면문(소위 도깨비 문양)을 조각했으며 그 좌우에는 유려한 인동당초 문양이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제석사지 곳곳에서는 건물 기단 기초를 다지기 위한 달구질 흔적이 확인됐으며 그 북동쪽 폐기장에서는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됐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2009.10.29 09:50:59 

익산 왕궁리 백제 궁궐 후원 발견

곡수로도 드러나, 제석사지 가람 배치 추가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7세기 백제 궁궐의 후원(後苑)과 수로가 발견됐다.

    1989년 이후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을 발굴조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올해 그 북편 구릉지역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 궁성 내부 후원과 물길(곡수로<曲水路>), 보도(步道) 시설, 석축시설 및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고 29일 말했다.

    물길은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크게 두 줄기가 확인됐으며, 그 중간에는 물을 저장해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네모난 집수시설(集水施設)이 드러났다.

    곡수로는 너비 80~140㎝이고 단면은 바닥이 편평한 U자형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총 길이는 228m다.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庭園)에서 보이는 구불구불한 사행수로(蛇行水路)와 유사한 형태지만, 이들과는 달리 왕궁리 유적 수로는 바닥이나 측벽에 자갈돌이나 판석 등의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나아가 수로 내부에서는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주변에서 백제시대 기와 등이 소량 출토됐다.

    부여연구소 김낙중 학예연구관은 "신라시대 포석정이나 일본의 고대 정원에도 물을 대기 위한 수로는 있지만 이렇게 구릉 전체를 이용한 큰 규모의 수로는 없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곡수로가 궁성 내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역할뿐만 아니라 정원과 어우러진 조경 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 동진(東晉)시대부터 유행했고, 일본 헤이죠큐(平城宮) 동원정원(東院庭園) 등에서 채택된 구불구불한 물길이 후원 공간의 중심적인 요소로 확인돼 동아시아 고대 원림의 조영방식에 대한 비교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연구소는 평가했다.

    연구소는 또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1.4㎞ 떨어진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 대한 2차 조사를 통해 가람 배치가 기본적으로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사찰의 그것과 동일하며,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확인된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이외에 회랑지, 중문지, 동ㆍ서 건물지가 확인됐다. 

    목탑지 중심에서 동쪽으로 42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된 동회랑지는 폭 7.8m로, 폭 6.8m인 미륵사지 회랑 백제 사찰의 회랑 가운데 가장 넓다. 

    또 목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편에서 목탑과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한 방형 건물의 기초부(동서 21.5m, 남북 20.8m)가 새롭게 확인됨으로써 제석사의 조성 및 변천양상을 밝히는 데 새로운 단서를 확인하게 됐다.

    건물 기초부는 현재의 지표 아래로 130㎝ 두께가 남아 있으며, 특히 목탑 기단 기초에서 보이는 달구질 흔적(건물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흔적)보다 훨씬 치밀하고 정교하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이 방형 건물은 목탑과 그 규모와 축조수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목탑과 유사한 성격의 건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kimyg@yna.co.kr

(끝)

 

<악귀상 기와>

 

2016.07.12 09:45:36 

익산 제석사 폐기유적서 백제 악귀상 출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소조상 등도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익산 제석사(帝釋寺) 폐기유적에서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악귀상(惡鬼像)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3월부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사적 제405호)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커다란 눈과 들창코, 입 사이로 보이는 치아가 인상적인 악귀상을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익산 왕궁 부근에 세운 절로, 중국에서 간행된 책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정관 13년(639) 벼락으로 인해 불당, 칠층탑, 회랑, 승방이 불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폐기유적은 불에 탄 기와와 벽체, 불상 조각을 버린 장소다. 규모는 남북 32.4m, 동서 28m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악귀상 외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살짝 다문 천부상(天部像)과 나한상(羅漢像) 혹은 불교 승려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흙으로 구워 만든 불상) 2점도 나왔다. 이들 소조상은 강인한 느낌을 주는 눈매와 두툼한 코, 둥그스름한 정수리가 특징이다.

    이와 함께 회칠이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는 벽체 조각과 흙벽돌 등 다양한 건축 부재가 출토됐다.

    연구소는 제석사지 소조상을 부여 정림사지, 중국 뤄양 영녕사(永寧寺), 일본 가와하라데라(川原寺)에서 나온 출토품과 비교하면 동아시아의 불교 문화교류 양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석사지 폐기유적에서는 2003∼2004년 시굴조사를 통해 소조상과 연꽃무늬 수막새, 벽체 등이 발견됐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세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기존에도 악귀상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 나온 유물은 사람보다 동물 느낌이 난다는 점에서 다르고, 눈에 유리가 남아 있는 것도 독특하다"며 "폐기유적 아래에 경작지 유적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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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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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09일 13시55분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대부분 찬술한 가운데 그 일부는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승려가 보충했다는 주장이 이제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군데군데 있다. 특히 그 맨 앞에 붙은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왕들과 후삼국 왕들의 계보인 왕력(王曆)이 그 이하 본문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백제 무왕(武王) 역시 그러하다. 


미륵사지 전경미륵사지 전경 (사진제공=김태식)


 이곳 왕력 편에서는 백제 제30대 왕인 그를 일러 “무강(武康)이라고도 하는데 헌병(獻丙)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릴 때 이름을 일로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년(600)에 즉위해 41년을 다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본문 중 한 편에 해당하는 기이(紀異) 편 제2에 ‘무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 의하면 당장 이를 부정한다. 기이란 글자 그대로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정리했다는 뜻이니 이 경우 '紀'는 기록하다, 적는다는 같은 발음의 글자 ‘記’다. 그 전체 편명에 어울리게 이곳에 저록(著錄)한 무왕 관련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연애담과 그에 따른 미륵사 창건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를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거니와, 이 기이 편에서 《삼국유사》는 그 제목 ‘무왕’ 아래에 그것을 주석하기를 “옛날 책에서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백제에 무강은 없다”고 했다. 분명히 왕력 편에서는 그의 다른 이름으로 무강(武康) 혹은 헌병(獻丙), 나아가 어릴 적 이름으로 일로사덕(一耆篩德)을 들었음에도 본문에서는 이를 스스로 부정했으니 말이다. 이런 주석이 《삼국유사》 편찬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보충해 넣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데 이에 등장하는 무강을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위만에게 내쫓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라는 주장 또한 억세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예컨대 조선 후기 역사서들에 집중적으로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그 불후의 편년체 역사 대작인 《동사강목》에서 그 정설화를 시도하니 본문에서 기준이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으니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이 쌍릉이 지금의 익산 쌍릉이다. 한데 세속에서 이를 영통대왕릉이라 부른다는 증언은 조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永通’은 말할 것도 없이 ‘末通(말통)’의 오기다.   글자가 비슷한 데 따른 인쇄 착오다. 이 말통은 곧 서동(薯童)이니, 이는 저 《삼국유사》 ‘무왕’에 보이는 대목, 다시 말해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니… 항상 마[薯]를 캐다 파는 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비롯한다. 서동은 곧 마동, 혹은 맛동일 것이니 이것이 곧 저 말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실제 그 뿌리가 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련 기록을 보면 분명 말통이다.   


 나아가 순암은 같은 《동사강목》  고려 숙종 7년(1102) 조에서는 고려가 이해 겨울 10월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기자사(箕子祠)를 세운 사실을 특기하고는 그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붙이는데 그에서 이런 내용이 보인다. 


마한 시조인 무강왕 기준(箕準)은 곧 기자의 41세손으로 남쪽 땅에 나라를 열어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미륵사지미륵사지 (사진제공=김태식)


 이에서는 아예 마한의 시조로 발전했으며, 더구나 그가 기자의 41세손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무강왕을 둘러싼 이런 인식은 순암과 동시대 인물인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대저(大著) 《연려실기술(然黎室記述)》에도 보인다.   이곳 권 제19 ‘역대전고(歷代典故)’ 중 ‘삼한(三韓)’ 조에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한 나라 혜제(惠帝) 원년 정미(BC 194)에 좌우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을 쳐서 격파하고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어 국호를 마한이라 하고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하고는 54국을 거느리니 세상에서 무강왕(武康王)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긍익은 금마산 기슭 용화산(龍華山)을 일러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 하는데 석성(石城)이 있어 둘레 3천900 척인데 세상에서는 기준이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한데  《연려실기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이 이미 인심을 얻고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용화산 위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세 미륵이 연못 가운데에서 나왔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절을 지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우니 이에 불전(佛殿)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드니,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 석탑이 있는데 굉장히 커서 높이가 몇 길이나 되니, 동방 석탑 중 최고이다. 


 이를 보면 기자조선과 그 마지막 왕 기준, 그리고 백제 무왕과 선화부인이 아주 뒤범벅을 이룬다. 이는 기록이 어떻게 한데 뒤엉켜 이상한 신화를 만들어내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 (사진제공=김태식)


 그렇다면 도대체 백제 무왕과 마한, 그리고 기자조선은 어떤 고리로 이렇게 연결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공교롭게도 백제 무왕이 미륵사라는 대찰을 창건한 지역과 위만에 쫓긴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이 도망쳐 정착한 곳이 같은 지역으로 인식된 데서 유래한 착종(錯綜) 혹은 착란(錯亂)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준이라 하는 기자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에 쫓겨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들어가 마한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고대 중국 문헌 곳곳에서 보이거니와, 이것이 나중에는 그 정착지가 금마(金馬)라는 등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기록이 애초 등장하는 중국 문헌들을 보면 기준은 마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공략하여 정착했다고 하지만,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역사가 조작되어 그가 바로 마한이라는 왕국을 창설한 시조로 둔갑하기에 이른다. 당장 《삼국유사》만 해도 기이 제1에 ‘마한’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서 그 정체를 종잡기 힘든 《위지(魏志)》를 끌어다가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이 궁인과 좌우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했다.  


 이런 혼란은 현재까지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조선 초기 완성된 팔도지리 총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 듯하다. 이곳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조를 보면 그 싹이 보인다. 예컨대 이 지역 사찰 관련 기록을 모은 불우(佛宇) 조를 보면 미륵사(彌勒寺)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나아가 같은 대목 고적(古蹟) 조를 보면 쌍릉(雙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그 비(妃)의 능이라 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쌍릉이 오늘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지역이다. 이로써 보건대 늦어도 조선 초기에는 이미 기자조선 준왕과 백제 무왕이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주건대 신라 시대 김태식과 대한민국 시대 김태식, 혹는 대한민국 시대 권투선수 김태식과 연합뉴스 기자를 역임한 김태식이 짬뽕된 것과 같다 하겠다. 


 《승람》 외에도 조선 시대 그런 흔적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며(益山彌勒寺石浮屠)’라는 시가 있다. 



귀신의 공인지 백성의 힘인지 끝내 아득하네

위로는 용화산 만 길 능선 넘어섰네

천년 두고 석재는 죄안을 이루었으니

가련토다 금마의 무강왕이여



鬼功民力竟茫茫

上軼龍華萬仞岡

千載石材成罪案

可憐金馬武康王



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 (사진제공=노기환)


 이때만 해도 미륵사 석탑은 온전했나 보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 뒤편 용화산보다 높게 보였겠는가? 실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리 볼 수도 없는 까닭은 그것을 관람하는 위치에 따라 그리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점필재는 이 거대한 석탑을 백성의 고혈을 짜내 이룩한 결과물로 본다. ‘죄안(罪案)’이라는 말은 범죄 사실 기록부, 요즘 말로 치환하면 범죄 사실 판결문 정도를 의미한다. 


 점필재는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인물이라 이런 사람들은 불교는 경멸한 특징이 있다. 그 시조처럼 통하는 주희 자신이 이미 격렬한 반불교주의자라, 그를 따르는 후학들도 자연 반불교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거니와, 이 시에서도 점필재의 그런 성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데 이를 만든 이를 점필재는 금마의 무강왕이라 했다. 실제는 백제 무왕인데도 말이다. 그에게는 아마도 금마국 무강왕과 백제 무왕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리라. 


 비단 이런 전승이 아니라 해도 실제 익산 금마면 일대는 백제 무왕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곳에는 그가 창건한 미륵사 터가 있고, 실제 이는 근자 그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봉영사리기(逢迎舍利記), 다시 말해 사리를 맞이하여 석탑에 안치하면서 남긴 기록에서 더욱 분명한 사실로 확인됐다. 미세한 차이라면, 문헌에는 이 절을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 했지만, 백제 시대에 이를 실제로 창건하고 남긴 사람들이 작성한 이 사리장엄기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왕비, 다시 말해 좌평(佐平) 사타적덕(沙陀積德)의 딸이 창건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인근 쌍릉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이라 전한다. 실제로 이 무덤이 백제시대, 특히나 사비 도읍기 왕릉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니 정말로 이곳이 무왕 부부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 충숙왕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에 대규모 도굴단이 이 무덤을 도굴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 바로 금은보화가 다량으로 묻혀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도움받은 곳>

한국고번역원 한국고전 종합DB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 201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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