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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 이희승>


내가 회고록 읽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글들을 훑다보면, 이런저런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거니와, 근자에 한번 훑은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1896~1989)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역시 그런 회로록 중 하나다. 내가 읽은 판본은 도서출판 선영사에서 2001년 11월 25일 1쇄가 나온 2016년 4월 20일 간행 그 재판이어니와, 그 원판은 이 책에 붙은 저자 서문에 의하면, 1975년 11월 8일에 시작해 이듬해 1월 26일까지 '나의 이력서'라는 제목 아래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을 원바탕으로 삼고, 이후 "약간의 보충과 오기(誤記)가 뚜렷한 개소(個所)를 정정(訂正)하여" 1977년 한국능력개발사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생몰년에서 보듯이 94세로 장수한 일석의 그 긴 생평을 일석 자신이 담담히 정리했으니, 그 긴 생평만큼이나 이 한 편이 그대로 한국근현대사 단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석 이희승>


이에는 몇몇 나로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지 않게 보이거니와, 해방 이전 이화여전 교수 재직 시절 일화도 개중 하나다. 일석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인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하기는 1932년 4월. 해방 직전까지 이 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부임한) 그 당시 이화여전은 문과, 가사과, 음악과 등 3개 학과뿐으로 학생 수는 200명도 채 못 되었다"(102쪽)고 하며, 나아가 "정동 시절의 이화여전 교수진은 여자가 많았고 남자 교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로는 "문과에 월파 김상용과 한치진(철학), 김인영(성경), 그리고 나, 이렇게 넷뿐이었고, 가사과에 장기원, 김호직, 음악과에 성악가 안기영이 있었다. 상허 이태준은 나보다 2, 3년 뒤에 들어왔다"(105쪽)고 한다. 일석이 회고하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은 이랬다.


"상허는 월파와는 달리 술은 그리 즐기지 않았으나 얼굴 모습이 유난히 준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깨끗해서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던 당대의 작가였다. 골동품 수집 취미에 탐닉했던 그는 진고개 골동품상에 자주 다녔는데, 그의 권유로 나와 월파도 한때 고미술에 취미를 붙였었다. 그는 좋은 물건을 발견할 때면 분수도 모르고 욕심을 냈고, 힘이 미치지 못하면 김활란 선생을 졸라 사들이곤 했다. 학교에 방 하나를 얻어 그렇게 사들인 물건들을 진열하곤 박물실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화여대 박물관의 밑천이 된 것이다"(106쪽)


일석이 말하는 진고개란 지금의 서울 중구 충무로2가 일대를 말하는 곳으로, 남산 산줄기에 형성된 고갯길이다. 한자로는 니현(泥峴)이라고 했으니, 글자 그대로 비가 오면 진흙이 고통이었던 듯, 이 일대 남산골을 터전으로 삼은 가난한 선비들을 그들이 나막신을 신고는 딱딱 소리를 내며 다녔으므로, 이들은 남산골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이라 부른 일이 많았다. 한데 일석에 따르면, 식민지시대엔 이 일대에 골동품상이 밀집한 듯하다. 지금 골동품상 거리라면 장안평과 인사동이 유명하나, 그땐 그랬나 보다. 이 일대를 이태준이 헤집고 다닌 모양이고, 분수에 넘치게 그에 탐닉했으며, 정 여의치 않으면 김활란 박사를 꼬드겨 본인이 탐내던 물건을 이화여전 이름으로 구입하게 했다고 하니, 이것이 종국에는 이화여대박물관 설립 뿌리가 되었다니, 혹 이대박물관을 가시는 분들은 그에서 상허의 체취를 느껴보기 바란다. 


<상허 이태준>


덧붙이건대 대학 부설 박물관 중에 별도 건물을 갖춘 시설 현황이라든가 컬렉션 규모와 질, 그리고 그 활용방법에서 이대박물관은 서울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과 더불어 그 대표의 모범이라 할 한하다는 점을 특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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