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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들어가는 사절을 만나

逢入京使 


[唐] 잠삼(岑參)


故園東望路漫漫  동쪽 고향 바라보니 길은 아득하고 

雙袖龍鐘淚不乾  양 소매 적시며 하염없이 눈물짓네

馬上相逢無紙筆  말 탄 채 만났으니 종이도 붓도 없어

憑君傳語報平安  그대가 말로 전해주시게 평안하다고




중당中唐의 변새시變塞詩를 대표하는 잠삼의 명작으로 꼽히거니와, 《全唐詩》 卷201이 저록著錄했다. 제목을 풀면 입경入京, 곧 서울로 들어가는 사절[使]을 만나서라는 뜻이거니와, 使란 전후문맥으로 보아 안서도호부에 들른 천자의 사절일 듯하다. 아니면, 반대로 도호부에서 서울로 보내는 사절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가능성이 큰 듯하다. 고원故園이란 고향을 말하거니와, 잠삼의 다른 시들을 보면, 당시 서울 장안長安을 지칭한다. 만만漫漫이란 길이 멀게 펼쳐진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룡종龍鐘이란 눈물 흘리는 모양이다. 어쩌다가 시인이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는 사절을 만난 모양이다. 본래 천자의 사절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하지만, 아마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인 듯하다. 그러니 전갈을 부탁하지 않았겠는가?


刘开扬의 《岑参诗集编年笺注·岑参年谱》에 의한다면, 이 작품은 천보天寶 8년(749)에 지었다 하거니와, 이때 잠삼은 지금의 신장위구르 자치구 库车县에 있던 安西로 부임한 상태였다. 이때가 잠삼으로는 제2차 서역 근무였으니, 안서절도사安西节度使 고선지高仙芝 막부 서기书记로 있었으니, 이때 잠삼 나이 34세였다. 

  1. yisabu 2018.10.02 15:19 신고

    그말이 그말일까요?



먼 타향에서 고향 그리워하며 


중국 문학에서는 이른바 변새시(變塞詩)라 해서, 머나먼 서역 변방 전선에 투입되어 그곳 생활을 토대로 이런저런 일상과 풍광과 심정을 노래한 영역을 개척한 잠삼(岑參)이란 인물이 남긴 시 중에 하서춘모억진중(河西春暮憶秦中)이라는 제목을 단 작품이 있다. 우선 제목을 풀면 하서(河西)와 진중(秦中)은 지명이니, 하서란 주로 돈황 서쪽 서역을 말함이요, 진중이란 당시 서울 장안 일대를 지칭한다. 모회(暮憶)란 글자 그대로는 사모하며 기억한다는 뜻이거니와, 사무치며 생각한다는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다. 춘(春)이라 했으니, 이 노래 읊을 시기는 봄임을 알겠다. 아마도 꽃피는 봄이 오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했나 보다. 잠삼은 고향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시로 보아 장안 일대 어딘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듯하다. 《全唐詩》 卷200에 실렸다. 


하서에서 봄에 진중을 그리워하며

河西春暮憶秦中


渭北春已老

河西人未歸

邊城細草出

客館梨花飛

別後鄕夢數

昨來家信稀

涼州三月半

猶未脫寒衣


위수 북쪽 봄은 이미 저물어도

하서 사람은 돌아가지 못하네

변방 성엔 가는 풀 돋아나고 

객사에는 배꽃이 흩날리네

헤어진 뒤엔 고향 꿈 자주 꾸나

이즘엔 집에서 오는 편지도 드무네

양주엔 삼월도 반이 지났건만

아직 겨울옷도 벗지 못하네 


누군가 하서에 체류하다가 진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를 전송하며 소회를 읊었거니와,  위북(渭北)은 위수 북쪽이라, 그가 돌아가는 진중을 말한다. 하서인河西人이란 하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말함이 아니요, 하서로 파견나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는 시인 자신이다. 변성邊城이란 잠삼이 머무는 서역 땅을 말함이요, 세초細草란 이곳 사막에서 자라는 풀을 말하거니와, 봄이라 이제 겨우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모습일 수도 있다. 계절이 봄임은 객관에 심은 배나무 꽃이 한창이라는 묘사에서 엿보거니와, 이곳 량주 땅은 삼월이 절반, 그러니깐 양력으로는 4월 중순이 지났음에도, 기후 풍토 때문에 여전히 겨울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 


함께 허서 땅에서 지내다가 먼저 돌아가는 이가 부러웠나 보다. 고향 생각 그만큼 더 간절해진 듯, 그가 떠나자 부쩍 고향 꿈을 자주 꾼다고 하니 말이다. 글쎄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고향 꿈을 자주 꾸지는 않은 듯하다. 



이하는 서성 선생 글을 옮긴 것이다. 


잠삼(岑參, 715-769)은 형주(荊州) 강릉(江陵) 사람으로 군망(郡望)은 남양(南陽)이다. 증조 잠문본(岑文本), 백조(伯祖) 잠장천(岑長倩), 백부(伯父) 잠희(岑羲)가 모두 재상을 지냈고, 부친 잠식(岑植)은 진주자사(晉州刺史)를 지냈다. 744년(30세) 과거에 급제하여 우내솔부(右內率府) 병조참군(兵曹參軍)이 된 후, 749년 안서절도사 고선지 막부의 장서기(掌書記)가 되어 서역에 종군하였다. 751년 장안으로 돌아와 시인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다음해에 두보, 고적, 저광희, 설거 등과 자은사탑에 오르며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754년 대리평사(大理評事),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한 후, 안서북정절도판관(安西北庭節度判官)이 되어 두 번째 종군(從軍)하였다. 757년 우보궐(右補闕)이 되었고, 이후 태자중윤(太子中允),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관서절도판관(關西節度判官), 가주자사(嘉州刺史)를 역임하였다.


잠삼은 고적과 곧잘 ‘고잠’(高岑)으로 병칭되는 성당 변새시파의 대표 시인이다. 초기에는 기려한 시풍이었으나 두 번에 걸쳐 변방에 다녀오면서 풍격이 크게 변하여,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정서로 공명을 추구하는 정신을 노래하였다. 풍부한 상상력과 변화 있는 구성으로 현란하고 명랑한 시풍을 만들었다. 은번(殷璠)은 “시어가 기이하고 구성이 준엄하며, 시의 주제 또한 기이함을 창조하였다”(參詩語奇體峻, 意亦造奇.)고 평하였다. 두보(杜甫)도 「미피의 노래」(渼陂行)에서 “잠삼 형제는 명승지 찾아다니기 좋아해”(岑參兄弟皆好奇)라 하여 그 취향이 기이함을 좋아함을 말하였다. 신문방(辛文房)도 “무리 중에서 홀로 뛰어나며 일반 사람의 정서를 뛰어넘는다”(超拔孤秀, 度越常情.)고 하여 시에서의 독특한 의경창조의 경향을 지적하였다. 『신당서』에 『잠가주집』(岑嘉州集) 10권을 저록하고 있으며, 현재 명대 편찬된 『잠가주시집』(岑嘉州詩集) 7권본이 통행한다.


잠삼의 서역 종군은 2번으로 각각 749년과 754년에 있었다. 

첫 번째 서역 종군 : 749년(35) 겨울 ~ 751년(37) 6월. 대리평사 겸 감찰어사 직책으로 안서절도사 고선지 막부 판관으로 충임. 

두 번째 서역 종군 : 754년(40) 8월 ~ 757년(43) 6월. 안서북정절도사 봉상청 막부 판관으로 나감.


최근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만든 <당오대시인편년사>에서 잠삼 부분을 추출하여 만든 아래 연보에서 해당 년월을 확인하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岑參 繫年 715-769(55세) 


715(開元三)(1) 本年,岑參生,一歲。

719(開元七)(5) 本年,岑參五歲,始讀書。

723(開元十一)(9) 本年,岑參年九歲,好屬文。

729(開元十七)(15) 本年,岑參年十五,丁家艱,隱于嵩陽,能自砥礪,遍覽史籍。

733(開元二一)(19) 本年,岑參年十九,始獻書長安,此後干于王侯,出入二郡,蹉跎十秋。

738(開元二六)(24) 本年或稍前,岑參卜居終南山高冠草堂,有詩作。「終南雲際精舍尋法澄上人不遇歸高冠東潭石淙望秦嶺微雨作貽友人, 終南山雙峰草堂作」

739(開元二七)(25) 正月 岑參北游,至河北道相、洺、貝、冀諸州,途中作詩頗多。「臨河客舍呈狄明府兄留題縣南樓, 登古鄴城, 邯鄲客舍歌, 冀州客舍酒酣貽王綺寄題南樓」

740(開元二八)(26) 春,岑參自河北歸長安,有詩送郭乂歸博陵。「送郭乂雜言」

冬,王昌齡出爲江寧尉,自長安赴任,有詩留別岑參兄弟,參亦有詩送之。「왕: 留別岑參兄弟」「잠: 送王大昌齡赴江寧」

741(開元二九)(27) 春,嚴維下第歸江東,岑參有詩送之。「送嚴維下第還江東」

742(天寶元)(28) 六月 許登擢第,歸江寧拜親,岑參有詩送之,兼寄王昌齡。「잠: 送許子擢第歸江寧拜親因寄王大昌齡」

秋,岑參東歸,途經華陰,有詩懷閻防;經鞏縣、匡城、汴州等地,均有詩作,又作《感舊賦》,歎己之十年不遇。「宿關西客舍寄東山嚴許二山人時天寶初七月初三日在內學見有高道擧徵, 宿華陰東郭客舍憶閻防, 戲題關門, 鞏北秋興寄崔明允, 醉題匡城周少府廳壁, 至大梁卻寄匡城主人」 〈感舊賦〉

743(天寶二)(29) 春,岑參至醴泉,有詩作「醴泉東溪送程皓元鏡微入蜀, 春日醴泉杜明府承恩五品宴席上賦詩」

四月 岑參在醴泉,有詩送顔允臧赴陳州太康尉任。「夏初醴泉南樓送太康顔少府」

七月 裴耀卿卒,年六十三,岑參有詩挽之,王維爲作遺愛頌。「잠: 故僕射裴公挽歌三首」〈許孟容: 裴耀卿神道碑〉〈元載: 裴冕神道碑〉〈왕: 裴僕射齊州遺愛碑〉

744(天寶三)(30) 三月 岑參、喬潭等二十九人登進士第,禮部侍郎達奚珣知貢擧。

三月 岑參登進士第,授右內率府兵曹參軍,不得志,有詩題終南高冠革堂。「因假歸白閣西草堂, 初授官題高冠草堂」

746(天寶五)(32) 三月 岑參東來衛州,與杜華、熊曜唱和,稱贊杜華詩骨氣凌謝公。「敬酬杜華淇上見贈兼呈熊曜」

冬,杜希望及其妻張氏卒,王維、岑參爲作挽歌多首。杜希望爲杜佑父。「왕:故西河郡杜太守挽歌三首」「잠:河西太守杜公挽歌四首」

747(天寶六)(33) 春,岑參北游晉、絳,往返途中有詩。「題平陽郡汾橋邊柳樹, 驪姬墓下作, 宿蒲關東店憶杜陵別業, 入蒲關先寄秦中故人」

748(天寶七)(34) 八月 顔眞卿以監察御史奉使河西、隴右,岑參作歌送之。「胡笳歌送顔眞卿使赴河隴」

749(天寶八)(35) 冬,岑參遷大理評事兼監察御史,充安西判官,赴高仙芝幕,出塞途中,詩作甚多。「初過隴山途中呈宇文判官, 玉關寄長安李主簿, 經火山, 題鐵門關樓, 銀山磧西館, 過酒泉憶杜陵別業, 宿鐵關西館, 磧西頭送李判官入京, 過磧, 磧中作」

750(天寶九)(36) 秋,岑參至焉耆,有詩懷終南別業。「早發焉耆懷終南別業」

751(天寶十)(37) 二月 岑參在武威安西幕中,有詩憶長安。「安西館中思長安」

三月 岑參在武威安西幕中, 有詩作. 「登涼州尹臺寺, 河西春暮憶秦中, 武威春暮聞宇文判官西使還已到晉昌」

五月 高仙芝與大食戰,大敗,士卒死亡略盡。時岑參在武威安西幕中,有詩送劉單赴軍事前線,幷呈高仙芝。「武威送劉單判官赴安西行營便呈高開府」

六月 岑參罷安西募東歸,經臨洮,有詩留別祁樂。「贈酒泉韓太守, 酒泉太守席上醉後作, 臨洮客舍留別祁四」

752(天寶十一)(38) 三月 岑參在長安,有詩送薛播及第歸河東。「送薛播擢第歸河東」

五月 岑參在長安,有詩送祁樂歸河東。「送祁樂歸河東」

九月 岑參在長安,有詩懷友人姚曠等。「懷葉縣關操姚曠韓涉李叔齊」

秋,高適、岑參、儲光羲、杜甫、薛據同登長安慈恩寺塔,各有詩作。杜甫詩寓時事之憂。「고적: 同諸公登慈恩寺浮圖」「잠삼: 與高適薛據登慈恩寺浮圖」「저광희: 同諸公登慈恩寺塔」「두보: 同諸公登慈恩寺塔」

秋,高適、岑參同作詩題李翥壁畫;秋末,李翥游越,高、岑復各作詩送之。「고적: 同李九士曹觀壁畫雲作, 秦中送李九赴越」「잠삼: 題李士曹廳壁畫度雨雲歌, 送李翥游江外」

753(天寶十二)(39) 夏,顔眞卿自武部員外出爲平原太守,岑參作詩送之。「送顔平原-幷序」

九月九日,杜甫與岑參同在長安,阻雨不能相訪,遂作詩寄岑參道相思之情。「두:九日寄岑參」

秋,岑參在長安,有詩送魏叔虯東歸幷懷喬潭。「送魏升卿擢第歸東都因懷魏校書陸渾喬潭」

754(天寶十三)(40) 二月 岑參在長安,作詩送王說歸河南。「梁園歌送河南王說判官」

六月 杜甫與岑參等屢遊鄠縣渼陂,各有詩作。「잠:與鄠縣群官泛渼陂, 與雩縣源少府泛渼陂」「두:與源大少府宴渼陂, 渼陂行, 渼陂西南臺」

八月 岑參赴安西封常淸幕,途經隴山、臨洮、凉州、玉門關,均有詩作。「玉門關蓋將軍歌, 涼州館中與諸判官夜集, 赴北庭度隴思家, 臨洮泛舟趙仙舟自北庭罷使還京, 發臨洮將赴北庭留別」

九月 封常淸出師西征,岑參留守輪臺,作『輪臺歌』及『走馬川行』送行,及師還,作詩獻;又奉使交河郡,作詩獻封常淸。「北庭西郊候封大夫受降回軍獻上, 使交河郡郡在火山脚其地苦熱無雨雪獻封大夫, 北庭作」

冬,岑參在北庭,有『獻封大夫破播仙凱歌六首』,又作『白雪歌』及『天山雪歌』送人歸京。

755(天寶十四)(41) 四月 岑參在北庭封常淸幕,有詩送人還龜茲。「北庭貽宗學士道別, 熱海行送崔侍御還京, 火山雲歌送別」

六月 岑參在北庭封常淸幕,與同幕李棲筠等唱和。「登北庭北樓呈幕中諸公, 敬酬李判官使院卽事見呈, 使院中新栽柏樹子呈李十五栖筠, 陪封大夫宴瀚海亭納涼, 奉陪封大夫宴得征字時封公兼鴻臚卿」

九月 岑參在北庭,九日,陪封常淸登高,有詩。「奉陪封大夫九日登高」

756(至德元)(42) 春, 岑參本年四十二歲,官北庭支度副使;嚴武本年三十一歲,在長安宮殿中侍御史;春,岑參有詩寄嚴武。「與獨孤漸道別長句兼呈嚴八侍御」

757(至德二)(43) 六月 岑參自北庭歸鳳翔,杜甫等狀薦之,授右補闕,有詩作。〈두:爲補遺薦岑參狀〉「行軍詩二首」

758(至德三)(44) 正月 岑參在長安,官右補闕。時許登歸江寧,李舟赴漢南,參與杜甫皆作詩送之。「두:送許八拾遺歸江寧覲省甫昔時嘗客游此縣于許生處乞瓦棺寺維摩圖樣志諸篇末, 因許八奉寄江寧旻上人, 送李校書二十韻」「잠:送許拾遺恩歸江寧拜親, 送弘文李校書往漢南拜親」

二月 賈至在長安官中書舍人,早朝大明官,作詩,王維、杜甫、岑參和之。王維時已爲中書舍人。「가:早朝大明宮呈兩省僚友」「왕: 和賈舍人早朝大明宮之作」「두:奉和賈至舍人早朝大明宮」「잠:奉和中書舍人賈至早朝大明宮」「두:宣政殿退朝晩出左掖, 紫宸殿退朝口號, 晩出左掖, 春宿左省」

三月 杜甫、岑參同在諫垣,有詩酬答。「잠:寄左省杜拾遺」「두:奉答岑參補闕見贈」

759(乾元二)(45) 春, 岑參自右補闕遷起居舍人。「西掖省卽事」

五月 岑參貶虢州長史,五月赴任,經華山,有詩;抵虢州,作詩寄朝中故人。「佐郡思舊遊-幷序, 出關經華嶽寺訪法華雲公, 初至西虢官舍南池呈左右省及南宮諸故人」

秋, 杜甫在秦州,作詩寄懷彭州高適、虢州岑參。「寄彭州高三十五使君適虢州岑二十七長史參三十韻」

761(上元二)(47) 春 岑參在虢州長史任,嚴武赴河南尹任,經虢州,參有詩贈之。「稠桑驛喜逢嚴河南中丞便別, 虢州南池候嚴中丞不至, 使君席夜送嚴河南赴長水」

762(寶應元)(48) 正月(建寅月) 岑參由虢州長史改太子中允,充關西節度判官,在潼關,有詩寄同州刺史王政。「潼關鎭國軍句覆使院早春寄王同州」

正月 杜甫在成都,因送人歸京寄詩岑參、范季明。「泛舟送魏十八倉曹還京因寄岑中允參范郎中季明」

春 王季友居華陰,春,岑參有詩懷之。「潼關使院懷王七季友」

九月 岑參在虢州長史任,爲天下兵馬元帥雍王李适掌書記,從至陜州,有詩作「陝州月城樓送辛判官入奏」

763(寶應二)(49) 正月 岑參入爲祠部員外郎,作詩頌劉晏;又與郎士元同作詩題晏三湘圖。「尹相公京兆府中棠樹降甘露詩, 劉相公中書江山畵障」 「낭:題劉相公三湘圖」

九月 岑參在長安祠部員外郎任,與嚴武唱酬,時嚴武爲京兆尹。「暮秋會嚴京兆後廳竹齋」

秋,岑參又有詩獻兵部侍郎李進,又與成賁唱和。「秋夕讀書幽興獻兵部李侍郞, 和刑部成員外秋夜寓直寄臺省知己」

764(廣德二)(50) 正月 岑參在京爲考功員外郎,本月或稍後,轉虞部郎中,有詩送李光進爲渭北節度。「奉送李太保兼御史大夫充渭北節度使」

正月 嚴武自黃門侍郎出鎭劍南,高適、岑參有詩送行。「送嚴黃門拜御史大夫再鎭蜀川兼覲省」

六月 岑參在長安,獻詩裴冕求汲引。「左僕射相國冀公東齋幽居-同黎拾遺賦獻」

夏 張謂在長安,夏,與岑參同作詩送僧歸一游吳。「장:送靑龍一公」「靑龍招提歸一上人遠遊吳楚別詩」

765(永泰元)(51) 三月 岑參在朝官庫部郎中, 作詩送盧幼平赴杭州刺史任「送廬郞中除杭州赴任」

春,岑參、獨孤及同至長安韋員外家赴宴賞花,有詩唱和。「韋員外家花樹歌」「독고:同岑郎中屯田韋員外花樹歌」

五月 岑參在長安,作詩送郭英乂出鎭劍南。「送郭僕射節制劍南」

七月 岑參、錢起同在長安,有詩挽苗晉卿。「잠:苗侍中挽歌二首」「전:故相國苗公挽歌」〈李華:苗晉卿墓志銘〉

秋 岑參、獨孤及同在長安,秋,作詩送黎燧赴江陵;自春及秋,二人尙有詩同送李之芳、長孫全緖等。「送江陵黎少府, 奉送李賓客荊南迎親, 送羽林長孫將軍赴歙州, 送王七錄事赴虢州」「독고:送江陵全少府之任, 送李賓客荊南迎親, 送羽林長孫將軍赴歙州, 送虢州王錄事之任」

十一月 岑參自庫部郎中出守嘉州,途中與成賁唱和「酬成少尹駱谷行見呈」〈독고:送成都成少尹赴蜀序〉

冬 戎昱在長安,有詩贈岑參,盛贊其詩;冬,在涇陽,有詩詠元戎出師。「贈岑郎中, 涇州觀元戎出師」

766(永泰二)(52) 二月 杜鴻漸出鎭劍南,薦岑參爲職方郎中兼侍御史,佐其幕;發長安,作詩,岑參有和鴻漸詩。「奉和杜相公初發京城作」

三月 杜甫在雲安,有詩寄岑參。移居夔州,多登臨懷古之作, 又作詩詠夔府風情. 「寄岑嘉州, 移居夔州作, 船下夔州郭宿雨濕不得上岸別王十二判官, 白帝城, 上白帝城二首, 白帝城最高樓, 武侯廟, 八陣圖, 負薪行, 最能行」

三月 杜鴻漸入蜀,發利州益昌縣,作詩,岑參和之;郎士元在長安,亦有和作。「奉和相公發益昌」「낭:奉和杜相公益昌路作」

四月 岑參在梁州,有詩;復與成賁、鮮于晉聯袂赴蜀,途中頻有唱和。「梁州對雨懷麴二秀才便呈麴大判官時疾贈余新詩, 與鮮于庶子泛漢江, 與鮮于庶子自梓州成都少尹自褒城同行至利州道中作, 赴犍爲經龍閣道, 早上五盤嶺」

六月 岑參入蜀,經劍門,作詩寄劍南幕中楊炎、杜亞。「入劍門作寄杜楊二郞中時二公幷爲杜元帥判官」

七月 岑參入蜀,經漢州,抵成都,與劍南幕中僚友唱和。「漢川山行呈成少尹, 陪狄員外早秋登府西樓因呈院中諸公, 尋陽七郞中宅卽事」

767(大曆二)(53) 三月 杜甫自夔州西閣遷居赤甲,又遷瀼西,有詩紀事,兼憶及鄭審、薛據、郗昻、岑參。「卽事, 赤甲, 暮春題瀼西新賃草屋五首」

春 岑參在成都,春,陪崔寧(卽崔旰)泛浣花溪,有詩。去冬今春,參遍訪成都古迹,所至多有題詠,時岑參在杜鴻漸幕府。「早春陪崔中丞同泛浣花溪宴, 先主武侯廟, 文公講堂, 楊雄草玄臺, 司馬相如琴臺, 嚴君平卜肆, 張儀樓, 升遷橋, 萬里橋, 石犀, 龍女洞」

四月 岑參至嘉州刺史任,有詩寄成都楊炎「初至犍爲作,上嘉州靑衣山中峰題惠淨上人幽居寄兵部楊郎中」

768(大曆三)(54) 七月 岑參罷嘉州刺史,東歸,作詩。「東歸發犍爲至泥溪舟中作」

九月 岑參東歸阻寇,淹泊戎、瀘間,有詩作。「阻戎瀘間群盜, 靑山峽口泊舟懷狄侍御, 楚[秋]夕旅泊古興, 下外江舟中懷終南舊居, 巴南舟中夜書事, 巴南舟中思陸惲別業」

769(大曆四)(55) 春 岑參旅寓成都,有感于蜀中之亂,作詩寄朝中友人。「西蜀旅舍春歎寄朝中故人呈狄評事, 送綿州李司馬秩滿歸京因呈李兵部」〈招蜀客文〉

七月 岑參旅寓成都,作詩懷兩省舊游。「客舍悲秋有懷兩省舊遊呈幕中諸公」

十一月 岑參寓成都,冬卒,年五十五;有集八卷,杜確爲序。



白雪歌送武判官歸京(백설가송무판관귀경)

백설가로 서울로 돌아가는 무판관을 전송하며


[唐] 잠삼(岑參·715-770) 


北風捲地白草折(북풍권지백초절) 북쪽 바람 몰아치니 흰풀이 꺾이고 

胡天八月卽飛雪(호천팔월즉비설) 오랑캐 하늘엔 팔월에도 눈나리네

忽如一夜春風來(홀여일야춘풍래) 문득 하룻밤새 봄바람 불어와 

千樹萬樹梨花開(천수만수리화개) 천만 그루 배꽃 피운듯 

散入珠簾濕羅幕(산입주렴습라막) 어지러이 주렴에 들어 장막 적시니 

狐裘不煖錦衾薄(호구불난금금박) 갖옷도 따뜻하지 않고 비단이불도 얇네.

將軍角弓不得控(장군각궁불득공) 장군은 각궁 얼어 당길 수도 없고 

都護鐵衣冷難着(도호철의냉난착) 도호는 쇠갑옷 차가워 입지도 못하네

瀚海闌干百丈氷(한해란간백장빙) 사막엔 이리저리 백길 얼음 펼쳐지고

愁雲慘淡萬里凝(수운참담만리응) 수심어린 구름 구슬피 만리에 서렸네

中軍置酒飮歸客(중군치주음귀객) 군막에 술상 차려 가는 이 대접하니 

胡琴琵琶與羌笛(호금비파여강적) 호금과 비파, 강적 소리 울려퍼지네

紛紛暮雪下轅門(분분모설하원문) 어지럽게 저녁 무렵 눈발 군문에 내리고

風掣紅旗凍不飜(풍체홍기동불번) 바람 몰아쳐도 깃발 얼어 펄럭이지 않네

輪臺東門送君去(윤대동문송군거) 윤대 동쪽 문에서 그대 떠나 보내니 

去時雪滿天山路(거시설만천산로) 가실 때 되니 천산길엔 눈 가득 쌓였네 

山廻路轉不見君(산회로전불견군) 산길 돌아 떠나가니 그댄 보이지 않고 

雪上空留馬行處(설상공류마행처) 눈위엔 말 지난 자국만 덩그러니 남았네

서성 선생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잠삼의 시에 나오는 북정(北庭)은 어디인가?


먼저 "동한 때의 북정"에 대해 알아보자.


북정은 동한 때 흉노족이 남북으로 분열하면서, 북쪽을 통치하던 북선우가 거주하는 중심지이다. 이 중심지를 북선우정이라 하며 줄여서 북정이라 한다. 북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고 자주 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东汉初期汉光武帝与匈奴通好,不断派遣使者前往赐财物,而单于骄倨益横,汉匈关系仍没有改善。东汉建武五年(29年),匈奴扶植卢芳为汉帝,割据五原、朔方、云中、定襄、雁门等五郡,都九原(今内蒙古包头市西南)。后降汉,被封为代王。后复叛,留匈奴历十余年。

南北匈奴分立

  在东汉初年,匈奴就大量进入塞内。46年前后,匈奴国内发生严重的自然灾害,人畜饥疫,死亡大半。而统治阶级因争权夺利,发生分裂。48年,匈奴八部族人共立呼韩邪单于之孙日逐王比为单于,与蒲奴单于分庭抗礼,匈奴分裂为两部。后日逐王比率4万多人南下附汉称臣称为南匈奴,被汉朝安置在河套地区。而留居漠北的称为北匈奴。


기원후 48년 일축왕비 선우가 포노 선우와 대립하면서, 일축왕비 선우는 4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하여 감숙지방에 안치되었기에 남흉노라 하고, 북흉노는 사막 이북에 거주했다. 89년 두헌(竇憲)과 경기(耿秉)가 연연산(몽골 항아이산)에 오르고, 91년 동한의 군사가 금미산(金微山, 알타이산)을 공격했으므로 북정의 주요 위치는 결국 지금의 몽골 서부 지역에 해당하겠다.


"당대의 북정"은 북정도호부의 관할 지역을 가리킨다.


북정도호부는 702-791년 사이에 설치된 방진으로 원래 광대한 안서도호부의 일부였으나, 무측천 때 서돌궐을 막고 서역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분할하여 천산 이북(알타이산과 바이칼호 포함)을 관할하였다. 북정도후부의 치소는 지금의 신장 우루무치 동쪽에 있는 지무살(吉木薩爾). 천산 북록의 동단에 위치한다.


이에 따라 천산 이남은 안서도호부가 관할했다. 

안서도호부는 원래 당 건국 초기인 640년에 처음 설치된 후 808년까지 존속되었다. 북정도호부가 분할된 이후는 천산 이남(카자흐스탄 동남부, 타지흐스탄 동부, 아프칸스탄 포함)을 관할하였다. 640년 고창을 점령한 후 고창에 치소를 두었으나, 648년 쿠차국을 점령한 후에는 쿠차(龜兹, 지금의 庫車)로 옮겼다. 657년 소정방이 투루판 지역의 서돌궐을 평정하면서 치소를 다시 고창으로 돌아왔다가 다음해 다시 쿠차로 옮겼다. 702년 이후 천산 이남과 파미르고원 이동 지역을 주로 관할하였다.


안서도호부와는 별도로 안서절도사가 있었다. 

안서절도사는 안서 4진의 군사-정치 복합체를 관할하는 대빵.

안서 4진은 648년 안서도호부가 쿠차로 옮길 때 주위에 있는 쿠차(龜兹), 우전(于闐), 언기(焉耆), 소륵(疏勒) 등 네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안서도호가 지휘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718년 현종이 탕가혜(湯嘉惠)를 ‘사진절도경략사’(四鎭節度經略使)로 임명하면서 절도사가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사진절도경략사는 ‘적서절도사’(磧西节度使)라고도 했으며, 주로 쿠차에 주둔하면서 안서도호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안서절도사’라고도 칭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농우와 하서는 물론, 북정과 안서의 주둔군까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 안서와 북정은 중원과 연락이 끊겨 일시에 쇠락하였고, 안서 4진도 티베트의 손에 들어갔다.


역대 안서절도사


1 高仙芝 747.12.28 

2 封常清 752.12.25 

3 李珙 756.7.15 

4 衛伯玉 759.12. 

5 馬麟 763.11


그럼 잠삼은 북정에 갔는가?


잠삼은 749년과 754년 두 번에 걸쳐 안서(安西)에 종군하였다. 

첫 번째 서역 종군 : 749년(35) 겨울 - 751년(37) 6월. 대리평사 겸 감찰어사의 직책으로 안서절도사 고선지 막부의 판관으로 충임됨. 

두 번째 서역 종군 : 754년(40) 8월 - 757년(43) 6월. 안서절도사 봉상청 막부의 판관으로 나감.


두번 모두 안서절도사 아래에 있었다. 안서절도사 치소는 쿠차. 

쿠차는 투루판에서 중국의 서쪽 끝 카슈가르로 가다보면 천산 남록을 따라가게 되는데 중간에 나오는 곳. 이 길이 바로 천산남로로 남쪽으로 드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어 천산의 남록을 따라 길이 놓여 있고 성읍이 줄 지어 있는 형국이다.


잠삼의 시에서 자주 나오는 또 하나의 지명은 윤대(輪臺).


윤대는 정주(庭州)의 속현으로 치소는 지금의 신강 미천현(米泉縣). 이곳은 쿠차에서 동쪽으로 약 200키로 가면 나오는 지금의 윤대현(輪臺縣)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다.(약 400키로 더 감) 역사 지명은 주위 지역을 여러 차례 옮기진 경우가 많다. 윤대는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잠삼의 활동 범위는 두 번 모두 쿠차와 윤대 일대인 것. 그러므로 천산 북쪽과 인연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의 시에 북정이란 말이 자주 나올까?


다음 시를 보자.


<북정으로 부임하며 농산을 넘다가 집을 그리며>(赴北庭度隴思家)


西向輪臺萬里餘, 서쪽으로 윤대까지 만여 리나 되는데

也知鄕信日應疎. 고향 편지는 날이 갈수록 드물어지리

隴山鸚鵡能言語, 농산에 앵무새는 말을 할 수 있으니

爲報家人數寄書. 어서 알려주게, 집안사람에게 자주 편지하라고


제1구를 보면 잠삼은 북정과 윤대(輪臺)를 같은 지명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북정, 적서, 윤대 등을 유사한 지역 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가 강원도나 영동이나 관동이나 동해나 유사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처럼, 장안 출신인 잠삼의 입장에서는 이들 지명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지금 위에서 말하는 관할지역은 엄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고, 때로 북정도호부에서 윤대와 쿠차를 관할하기도 했다. 북정도호부의 지무살은 윤대와 멀지 않았던 것이다.


...잠삼이 다녔던 길을 생각하며

3시간 동안 작성.

서성 선생이 정리했다.


杜甫 

寄岑嘉州(229-2494)〈766.3

同諸公登慈恩寺塔(216-2258)

九日寄岑參(216-2258)

渼陂行(216-2261)

奉答岑參補闕見贈(225-2414)

寄彭州高三十五使君適虢州岑二十七長史參三十韻(225-2427)

泛舟送魏十八倉曹還京因寄岑中允參范郎中季明(227-2461)


王昌齡 

留別岑參兄弟(140-1428)


賈至 

早朝大明宮呈兩省僚友(235-2596)


儲光羲 

同諸公登慈恩寺塔(138-1398)


獨孤及 

同岑郞中屯田韋員外花樹歌(247-2770)


戎昱 

贈岑郎中〈765.冬

白雪歌送武判官歸京(백설가송무판관귀경) 잠삼(岑參. 715~770)

백설가로 서울로 돌아가는 무판관을 전송하며

北風捲地白草折(북풍권지백초절) 북쪽 바람 몰아치니 백초가 꺾이고 

胡天八月卽飛雪(호천팔월즉비설) 오랑캐 하늘엔 팔월에도 눈나리네

忽如一夜春風來(홀여일야춘풍래) 문득 하룻밤새 봄바람 불어와 

千樹萬樹梨花開(천수만수리화개) 천만 그루 배꽃 피운듯 

散入珠簾濕羅幕(산입주렴습라막) 어지러이 주렴에 들어 장막 적시니 

狐裘不煖錦衾薄(호구불난금금박) 갖옷도 따뜻하지 않고 비단이불도 얇네.

將軍角弓不得控(장군각궁불득공) 장군은 각궁 얼어 당길 수도 없고 

都護鐵衣冷難着(도호철의냉난착) 도호는 쇠갑옷 차가워 입지도 못하네

瀚海闌干百丈氷(한해란간백장빙) 사막엔 이리저리 백길 얼음 펼쳐지고

愁雲慘淡萬里凝(수운참담만리응) 수심어린 구름 구슬피 만리에 서렸네

中軍置酒飮歸客(중군치주음귀객) 군막에 술상 차려 가는 이 대접하니 

胡琴琵琶與羌笛(호금비파여강적) 호금과 비파, 강적 소리 울려퍼지네

紛紛暮雪下轅門(분분모설하원문) 어지럽게 저녁 무렵 눈발 군문에 내리고

風掣紅旗凍不飜(풍체홍기동불번) 바람 몰아쳐도 깃발 얼어 펄럭이지 않네

輪臺東門送君去(윤대동문송군거) 윤대 동쪽 문에서 그대 떠나보내니 

去時雪滿天山路(거시설만천산로) 가실 때 되니 천산길엔 눈 가득 쌓였네

山廻路轉不見君(산회로전불견군) 산길 돌아 떠나가니 그댄 보이지 않고 

雪上空留馬行處(설상공류마행처) 눈위엔 말 지난 자국만 덩그러니 남았네


이 시는 당 현종 천보 14년(755), 잠삼이 윤대에서 봉상청 막부 관리로 있을 적에 지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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