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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났다. 가뜩이나 불면증 시달린 나날들이라, 우중충함이 주는 그 늦은 낮잠에서 주섬주섬 깨어, 흐리멍덩한 몸뚱이 이끌고 나선다. 볕이 났다고 아들놈이 알려준다. 어디론가 나서야 했다.  


1호선 남영역에 서니 역사 지붕 빈틈으로 파란물이 쏟아진다. 시내로 향한다. 


종로3가 역에 내려 세운상가 쪽으로 향한다. 종로대로를 사이에 둔 세운상가 옥상에 오른다. 저 계단 아래로는 근자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조선시대 유적을 보존조치했다. 


9층 옥상에 오르니 눈이 부시다. 우선 종로 방면을 본다. 아래로는 재개발을 기다리는 판자촌이 광할하다. 6.25 전쟁 이후 쏟아져 들어온 피난민들이 이룩한 그 판자촌에서 역사를 시작한다. 


눈길을 오른쪽 정면으로 돌린다. 저 멀리 종묘 너머로 북한산이 보이고 다시 그 뒤편엔 온통 바위덩이 도봉산이 고개를 내민다. 젊은 여성 둘이 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종묘 정전이 풀숲에 옴팍하다. 근자 종로대로에서 종묘 정문으로 향하는 대로를 뚫었거니와 시선은 시원하다. 아직 단풍 절정에 이르기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뒤로 돌아보니 남산이 왜 난 이제야 눈길 주냐 핀잔이다. 남산타워 우뚝한데, 오늘 저곳에 올랐더라면 인천 앞바다가 훤하고, 개성까지도 조망할 수 있었으리라. 


동대문 방향으로도 내친 김에 시선을 둔다.


이렇게 가을은 정점으로 치달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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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가서 조상을 제사하는 행위인 묘제墓制 혹은 묘를 살피는 성묘省墓는 실은 각종 의례서에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어느 일정 시기까지 무덤에다가 그 표식인 봉분을 만들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으로 나는 본다. 중국사를 보면 공자 이전에는 봉분이 없어, 일단 무덤을 쓰고 나면, 그 위치는 후손도 이내 잊어버린다. 그런 까닭에 장소도 모르는 묘제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묘제의 제1 성립 조건은 그 위치 확인이다. 묘제를 둘러싼 이렇다 할 규정이 없는 까닭은 나는 이런 역사성에서 말미암는다고 본다. 묘제 혹은 성묘는 때마다 무덤을 소제하는 행위인 소분掃墳 혹은 잡초를 베어내는 벌초伐草와도 밀접하다. 

봉분이 없던 시대, 조상숭배는 자연 조상의 혼이 깃들었다고 간주하는 사당인 종묘宗廟 혹은 가묘家廟, 그 신체神體가 깃들었다는 밤나무 막대기인 신주神主 문화 발달을 불러온다. 종묘와 가묘는 시체와 혼의 분리를 위한 시설이다. 이 시대 무덤은 저 먼 곳에다가 만드는 일이 보통이니, 하기야 거리가 문제가 되었으리오? 어차피 무덤 제사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점이 조선시대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 때 문사文士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상사일)과 4월 8일(석탄일), 그리고 9월 9일(중양절)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했으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국조)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고 해서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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