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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만난 한문 원전 텍스트 중에 나를 질려버리게 하고, 나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내 머리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라고 의심케 만든 두 부류가 있다.


1.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이니, 


최치원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터이고, 사산비명이란 치원이가 왕명을 빙자해 돈 받고 이 인간은 매우 매우 훌륭하다고 선전해 준 비문을 말하는데, 당시 신라 저명한 고승이 죽은 다음에 그 비명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써준 것이 바로 사산비명이라. 이들 비명이 각각 자리잡은 곳이 네 山이라 해서 저리 일컫는다. 


한데 이 사산비명은 문체가 사륙변려문이라. 이거 한문 시간에 한 두 번 잠깐 보고는 지나치기 마련인데, 사륙변려문이란 4글자와 6글자가 세트가 되는 것은 물론 그런 세트와 세트끼리로 照應을 하게 만든 문체이니, 그 구성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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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인 셈인데, 말이 그렇지, 요렇게 끼워 맞추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런 엄격한 구도에다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여야 하니, 얼마나 문장 다듬기에 고심을 거듭했겠는가? 변려문은 더욱 뭐 같은 것이 전고(典故)를 무지막지하게 쓴다. 전고란 쉽게 말해 고사성어인데, 그 고사에 얽힌 일화에 웬만큼 정통치 않고는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도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사산비명은 한 문장 넘어가는데 옥편을 수십 번 찾아야 하고, 옥편 찾아도 나오지 않는 구절도 있다. 그에 더해 이 사산비명은 오지게도 문장이 길다. 비문이 길어봐야 얼마나 되겠냐 했다간 낭패본다. 충남 보령시 성주사 터에 남아있는 낭혜화상비라는 것은 총 5천22글자에 달한다.


2. 부(賦)이니


賦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중국사람들도 몰라서 각종 정의가 이미 漢代부터 시도되었지만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운문 같은 산문이며, 산문 같은 운문이니 한 마디로 늴리리야 짬뽕이다. 이런 賦에 속하는 가장 저명한 작품이


壬戌之秋 七月旣望 어쩌구 하는 소동파(소식) 적벽부(赤壁賦)가 있으니, (기망이란 속인다는 뜻이 아니요, 이미 망월 즉 보름을 지났다는 말이니 가득찬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16일을 말한다) 이 적벽부라는 거, 읽어보면 대단히 낭만적이요, 대단히 평이하기만 하며, 거기에 속아 賦란 문체가 아주 만만할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말이다. 소동파만 해도 벌써 11세기 사람이라. 부가 태동한 기점이 빠르면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4~3세기 무렵 楚나라, 혹은 순자 시대지만 그것이 새로운 장르로 각광받기 시작한 시점은 아무래도 前漢시대 초기로 보아야 할 지니,  기원전 2세기 초인 그때를 기준으로 해도 이미 1천200년이나 지난 뒤 소동파라, 종래 사용되던 부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이제는 완연히 산문화한 단계에 출현한 사람이요 작품이라.


한데 이 賦란 작품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前漢대와 그 직후 삼국시대 혹은 위진시대 작품을 볼짝시면, 어려워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다. 사마천보다는 아마도 한 세대 정도 선배일 듯하고, 개그맨 동방삭과 함께 황제 한 무제에게 봉사한 사마상여란 자가 지었다는 자허부子虛賦니 상림부上林賦니 하는 賦가 아마 기억에 《한서》 사마상여전에 전문이 수록됐을 터이니 한 번 그 꼴을 보아주길 바란다. 


무슨 요상한 글자만 어디에서 찾아 그렇게 긁어다 놓았는지, 자전에서도 찾기 힘든 글자 수두룩하며, 그건 고사하고 말은 어찌나 광대무변한지, 옥편 찾는다고 진을 다 빼어 버린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우리는 최치원을 공부하고, 賦를 공부해야 한다.


그런 맛배기로 여기에 경복전부(景福殿賦)라는 부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이름만으로도 벌써 심상치 아니한가? 景福殿? 殿은 宮이니 이를 바꾸면 景福宮이다.


이 역시 분량이 만만치 않은 이에서 모다 소개할 수는 없고(실력이 안된다), 그 앞 머리 몇 줄만 제시한다. 重熙라는 말도 보이는데, 이쯤이면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조성할 때 그 설계도가 이 景福殿賦였다는 사실도 간파하게 된다.


내가 알기로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에 대해서는 그 이름과 관련해 별의별 낭설이 횡행하지만, 개중 그럴 듯한 설명이 시경(詩經)을 지목하는 것이라, 이에서 다름 아닌 景福이란 말이 보이거니와 이를 따다 와서 만들었다는 것이라는 설명이니, 아마 이를 설계한 정도전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직접 원류로 바로 여기서 말하는 경복궁부를 지목할 수 있으니, 이 당시 魏나라 왕궁 정침이 바로 경복전이라, 물론 이 경복전이란 말 자체도 말할 것도 없이 그 뿌리를 시경에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조선왕조 개창 주체들은 틀림없이 이 경복전부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다. 우리가 경북전부를 읽어야 하는 소이 중 하나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이 작품은 梁나라 무제(武帝) 장자인 태자 소통이란 자가 편집한 《문선》(文選)이란 시문집 중 賦己 第十一卷 ‘宮殿’ 편에 실린 두 작품 중 하나로서 王文考의 노 영광전 부 병서(魯靈光殿賦 幷序)에 이어 ‘하평숙 경복전부(何平叔 景福殿賦)’라는 제목으로 수록됐으며, 청대 烏程 嚴可均이 校輯한 《전삼국문》(全三國文)에는 권21 ‘夏侯惇 夏侯惠 一’ 첫 번째로 실렸다.


경복궁부 저자인 하안(何晏)은 자(字)를 평숙(平叔)이라 하며, 남양(南陽)(지금의 河南 南陽) 사람이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는 않으나 後漢 獻帝 興平 2년(서기 195) 전후로 생각되며, 정시(正始) 10년(249)에 죽었다. 三國시대 玄學家의 대표주자로 거론된다.


大將軍 何進의 손자이며 曹操가 司空으로 있을 때 그 어미 尹氏를 받아들이고 아울러 하안을 가자(假子)로 삼으니, 자못 조조에게서 총애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금향공주金鄕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何晏은 아름다운 용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世說新語》 容止 제14에 이르기를 “何平叔美姿儀, 面至白. 魏明帝疑其傅粉, 正夏月, 與熱湯餠. 旣啖, 大汗出, 以朱衣自拭, 色轉皎然”이라고 했다. 


情色을 탐하고 五石散을 복용하며 取浮?客했다. 하안은 성질이 교만하고 자랑을 일삼으니 文帝가 미워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임용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다 正始 초가 되어 조상(曹爽)이 집정하게 되자 何晏 또한 중용되어 散騎侍郞에 발탁되고 이어 侍中, 吏部尙書가 된다. 그러다가 正始 10년(249)에 “佐曹爽秉政事敗”라는 이유로 조상과 함께 사마의(司馬懿)에게 誅殺되었다.


하안은 어릴 적부터 才秀知名하며 老莊을 좋아했다. 왕필과 나란히 “王何”라고 칭해지며 魏晉 玄學家의 대표인물 중 하나다. 그는 儒道를 합치하고자 했으니 그리하여 노자로써 유교를 해석하고자 했다. 


그의 《導論》에서 말하기를 “유가 유됨은 무에 기대어 생겨난다. 일이 일됨은 무로 말미암아 이뤄진다.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고, 이름지으려 해도 이름지을 수 없으며, 보려 해도 형체가 없고, 들으려 해도 소리가 없으니 이것이 도의 온전함이다”(有之爲有, 恃‘無’以生;事而爲事, 由無以成. 夫道之而無語, 名之而無名, 視之而無形, 聽之而無聲, 則道之全焉). 


이런 이해를 발판으로 《老子》가 말하는 無爲之道를 《논어》가 말하는 도로 이해하고자 한다. 남아 있는 글로는 《無名論》 《無爲論》 《韓白論》 《冀州論》 등이 있다. 賦는 1편만 전하고 있으니 《景福殿賦》가 그것이니, 이는 위 明帝 曹叡가 許昌에서 景福殿을 완성할 때 何晏이 受命하여 지은 작품으로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興建 緣起를 말한 다음 2부에서는 궁전 규모와 구성, 배경, 장식을 묘사하며 아울러 정치 人事의 상응한다는 시각에서 그 의미를 해설하며 3부에서는 풍자 정신을 발휘한다. 이 작품은 東漢 王延壽 撰 《魯靈光殿賦》와 함께 궁전 건축을 묘사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何晏은 또한 시에도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유협은 그를 평가하여 “浮淺”, 즉, 부박하고 천박하다(《문심조룡》 明? 第六》)고 하고 있으니 지금에는 겨우 3수만 전할 뿐이다. 



http://zh.wikipedia.org/wiki/%E4%BD%95%E6%99%8F”


景福殿賦洛陽宮殿簿曰:許昌宮景福殿七間.


何平叔典略曰:何晏, 字平叔, 南陽人也. 尙金鄕公主. 有奇才, 頗有材能, 美容貌. 魏明帝將東巡, 恐夏熱, 故許昌作殿, 名曰景福. 成, 命人賦之, 平叔遂有此作. 平叔爲散騎常侍, 遷尙書主選. 後曹爽反, 爲司馬宣王斬於東市.


大哉惟魏, 世有哲聖. 크도다, 위나라여. 대대로 현철한 성인이 일어나니라.

武創元基, 文集大命. 무제가 큰 기틀 세우시고 문제가 큰 명을 모으시니,

皆體天作制, 順時立政. 모두 하늘과 하나되어 제도 만드시고, 때 맞춰 정령을 세우시니

東都賦曰:體元立制, 順時立政. 謂依月令而行也. 禮記曰:凡擧事必順其時. 尙書有立政篇. 

至于帝皇, 遂重熙而累盛. 지금 황제에 이르러, 이윽고 더욱 빛나고 거듭 번창하니라.

遠則襲陰陽之自然, 멀게는 음양의 자연을 따르고

近則本人物之至情. 가깝게는 인물의 지극한 성정을 근본으로 삼으며,

上則崇稽古之弘道, 위로는 옛날의 큰도를 받들어 살피고

下則闡長世之善經. 아래로는 장구한 세상의 훌륭한 법칙을 드러낸다.


2011.09.21 08:57:52

위진남북조시대 지식인 사회 사상계를 풍미한 이른바 현학(玄學)의 열풍을 논할 적에 왕필(王弼)과 더불어 늘 쌍괴(雙魁)로 거론되는 이가 하안(何晏)이니, 그가 남긴 장대한 서사 문학의 금자탑으로 경복전부(景福殿賦)라 題하는 것이 있어, 이는 제목 그대로 경복전(景福殿)이라는 궁궐 완성을 기념해 그 건물의 장대함과 당시 황제의 위대함을 칭송한 산문과 운문의 중간적 존재라.  그 첫 대목을 볼작시면,  

大哉惟魏, 世有哲聖. 武創元基, 文集大命. 皆體天作制, 順時立政. 至於帝皇, 遂重熙而累盛.  

이라 했으니 이를 굳이 옮긴다면,  

위대하구나 魏나라여, 세상에 현철한 성인이 계셨으니, 무제(武帝)께서는 큰 터를 세우시고, 문제(文帝)께서는 하늘의 명을 모으셨으니, 모두가 하늘을 본받아 제도를 정하시고, 때에 맞춰 다스림을 세우시니라. 지금의 황제에 이르러 마침내 그 밝음을 거듭하시고 성대함을 거듭 쌓으셨도다.  

이 경복전부는 당연히 현재의 황제를 칭송하는 데 초점이 가 있으니, 이후에는 볼짝없이 현재의 황제를 칭송하는 구절로 이어질 것이어니와, 그가 이룩한 업적 중 하나로 당연히 이 賦의 소재이자 주제인 景福殿으로 마침내 넘어간다. 경복전이란 낙양을 위시하여 당시 魏國의 오도(五都), 즉, 5개 수도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허창(許昌)이라는 곳에 세운 궁궐 건축물을 일컬음이니, 바로 이에서 조선왕조의 法宮인 경복궁의 이름이 유래한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 著錄된 정도전의 말만 믿어 경복궁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슨 조선왕조, 혹은 정도전 자체의 창안 혹은 발상으로 여기곤 하지만, 이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하안은 지금 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다가 그 구체적인 실례로써 경복전 건립을 들거니와, 이 대목을 볼작시면,

且許昌者, 乃大運之攸戾, 圖讖之所旌. 苟德義其如斯, 夫何宮室之勿營? 帝曰:“俞哉!”  

라 하니, 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옮겨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신하들이 아뢰기를) 나아가 許昌이란 곳은 곧 大運이 이르는 곳이니 도참(圖讖)에서 지칭한 곳이옵니다. 진실로 德과 義가 이와 같다면 어찌 宮室을 세우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하니, 황제께서 이르시기를 “그렇도다!”고 하셨다.  

이렇게 경복전은 황제의 윤허 아래 有司(담당관서)에서 건축에 들어가니, 하안의 증언을 그대로 빌리자면 “日力을 審量하고 費務를 詳度”하여 “經始之黎民을 鳩하고 農功之暇豫를 輯하는 한편, 東師之獻捷으로 因하고 海孽之賄賂를 就하여서” 마침내 “景福之秘殿을 立”하게 된다. 

들어갈 노동력을 계산하고, 그 비용을 상세히 계산해서 백성을 동원하되, 농한기를 이용했으며, 나아가 동쪽으로의 군사 정벌, 즉, 오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겨 얻은 전리품으로 경복전이라는 새로운 궁전을 세웠다는 말이다. 땡전 한푼 안 들이고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순서를 밟아 가면 우리가 賦라는 문학 형식이 매우 생소하다 해도 그 다음에 무슨 내용이 따를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이렇게 세운 경복전이 얼마나 장대하고 훌륭한 궁전 건축인지가 따를 것임은 不問해도 可知하다. 

실제 景福殿賦는 이렇게 흘러가니, 먼저 景福殿 건물 양태가 외관에서 장대함을 기술하고, 이어 그에 견주어 그 내부는 신비한 공간임을 강조하게 된다. 이 대목이 경복전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됐으니,  

故其華表則鎬鎬鑠鑠, 赫奕章灼, 若日月之麗天也. 其奧秘則蘙蔽曖昧, 髣彿退概, 若幽星之纚連也.  

라 하거니와, 이 대목은 이해에 적지 않은 애로가 있어 무엇보다 하안이 구사하는 어휘가 난수표를 방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략의 의미는 파악 가능하니, 이에서 지시 대명사 ‘其’는 말할 것도 없이 景福殿이라는 궁궐을 말함이니, 전반부는 그것(경복전)의 화표(華表), 즉, 화려한 표상(겉모습)을 기술하고, 후반부는 그것의 ‘오비’(奧秘), 즉, 신비로움을 풍기는 내부를 기술하는 것이다. 한데 그 겉모습을 수식한 형용사가 당장 華이니, 하안이 이를 통해 외부 경관을 어떻게 기술할 지는 삼척동자도 알지니, 화려 장대함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에 대비해 ‘奧’, 즉, 내부는 ‘秘’라고 했다. 

실제 그 화려한 겉모습을 하안은 “鎬鎬鑠鑠, 赫奕章灼, 若日月之麗天也”라고 했다. “鎬鎬鑠鑠, 赫奕章灼”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알 필요가 없다. 이들 단어에 화려함, 햇빛과 동의어들인 金과 火와 같은 부수자를 사용하고 赫, 章처럼 불과 관련된 단어를 총동원했으므로, 그 모습이 “눈이 부시다”는 뜻이 됨은 이제는 알 터이다. 실제로 그 모습을 개괄한다면, 하안은 이런 겉모습이 “若日月之麗天”, 즉, 해와 달이 맑은 하늘에 빛나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과는 대비되어 내부는 음침하며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 모습을 하안은 “蘙蔽하고 曖昧하여 退概를 彷佛하니” 그것은 마치 “幽星의 纚連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폐(蘙蔽)”란 무엇인가? 엄밀한 학문적 자세가 아니라면 이것을 굳이 자전까지 찾을 필요는 없으니, 두 단어 모두 풀(草)을 의미하는 ‘艸’가 글자 꼭대기에 있으니, 이런 풀이 머리에 우거진 모습이 어떻겠는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은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와 병렬적으로 경복전 내부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曖昧”라는 말도 그 의미가 자명해졌다. 一言以蔽之건대 “예폐(蘙蔽)”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즉, 曖昧 또한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하여 무엇이 무엇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曖昧의 근본 의미다. 나아가 이런 曖昧가 바로 지금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 뜻인 것이다. 함에도 어찌하여 적어도 그 역사가 2천년을 자랑하는 이런 曖昧라는 말이 일본말의 殘滓로 취급되어 퇴출되어야 하는 위기를 맞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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