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아래는 2018년 6월에 발간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식지 《박물관신문》 562호 기고 전문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내가 만난 박물관인들을 이런 식으로나마 정리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리 붙여봤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단발성이라 아쉽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역대 관장 - 한병삼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장 


역대 국립박물관장 혹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중에 무게감만으로는 아마 한병삼 선생을 최고로 치지 않나 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지만, 이런 그와 나는 이렇다 할 인연이 실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98년 12월, 정기 인사에서 내가 사회부를 떠나 문화부에 안착해 문화재 분야를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는 관장직에서 물러난 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거니와 그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라든가 발굴현장에서 가끔 마주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더러 목격한 모습이지만, 각종 발굴현장에 지도위원 등의 자격으로 드러낸 그의 남다른 특징이 있으니, 우선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해당 발굴단이 조사한 유적‧유물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 않았다. 이를 직접 조사한 조사원보다 지도위원이 더 많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신념 같은 것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 매양 조사단을 향해 “무엇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가”를 물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자신이 원했건 하지 않았건, 그런 까닭에 해결사를 자임하는 일이 많았다고 안다. 발굴현장에서 조사단이 부닥치는 문제가 오죽이나 많은가? 이를 염두에 둔 자문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예컨대 모든 유적 유물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장광설을 펴기 좋아하는 다른 지도위원보다는 조사단에서는 매우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커렁커렁했다. 키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 연배로는 큰 편이었으며, 몸집은 거대했다. 달변이라는 느낌까지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눌변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 많지는 않았으되, 꼭 필요한 말한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외모 때문인지, 그리고 신선을 방불하는 온통 허연 머리카락 때문인지 연배에 견주어 뿜어내는 ‘포스’는 더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는 분명 박물관에서는 적어도 고고학 분야에서는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에서는 늘 이른바 주류였다. 그는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기 전에 그곳 사학과를 다닌 까닭에 체계적인 고고학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기 힘들다. 실제 자신이 직접 조사에 참여한 발굴현장은 나로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박물관 고고학의 대부로 통한다. 그를 꼭짓점으로 삼는 박물관 고고학 흐름에서 소위 주류로 분류하는 인물들을 뽑아보면 고고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느닷없는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 감사 여파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암으로 타계한 한영희와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을 역임하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다가 얼마 전 퇴임한 이영훈 등이 꼽힌다고 안다.


다호리 유적 감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일 일화가 있다. 이 독특한 인물은 공직 부침이 극심하거니와, 그 꼬장꼬장한 성격과 장거리 여행이 힘든 신체 특징과도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투서에서 시작했는지 어떤지 모르나, 국립박물관 고고부가 오래도록 연차 발굴을 벌인 다호리 유적 발굴에 비리 혐의가 있다 해서 문화부인지 감사원인지 감사를 받게 되었거니와, 담당 학예직들은 그야말로 불려가서 혼쭐이 났다. 그에서 한영희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거니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장래의 박물관장감이라는 평이 자자하던 한영희는 유명을 달리한다. 한영희는 내 기억에 1999년인가 타계했으니, 나랑은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 이 감사에서 임학종은 발굴야장을 제출했다. 한데 이 야장을 보던 감사관이 학을 떼고 말았다. 언제 어느 때 껌 한 통 구입한 기록까지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야장을 보고 감사관이 경악하고 말았다. 


한병삼을 이쪽 업계, 특히 박물관 주변에서는 대체로 ‘경배’에 가까운 존경을 바쳤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홀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며, 어디까지나 나는 기자였으니깐 말이다.  


 내가 한병삼을 마지막으로 본 곳은 2000년 한양대박물관이 발굴 중이던 경기 하남 이성산성 현장에서였다. 그 몇 달 뒤인가 갑자기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마지막 현장에서 조사단에서 마련한 스포티지 차량에서 내리는 그를 보니 거둥이 아주 좋지는 않았다. 물었더니 허리 디스크 수술 여파라 했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이성산성 현장에서 그를 부축해 오른 이가 나중에 서강대 총장까지 하는 서강대 이종욱 교수였다. 내가 당시 현장에서 이종욱 선생한테 한 관장과는 어떤 인연이 있냐고 물었더니 영남대 교수로 재직할 때 경주를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며 당신 연구를 격려했다 한다.


그의 공직 혹은 그 주변 이력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박물관과 더불어 문화재위원으로서의 행적이다. 그는 1985~2001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는 사실이다. 위원은 2년마다 새로 위촉되니 8번이나 거푸 한 것이다. 1997~2001년에는 제6분과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무렵 문화재 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경우 더러 문화재청과 박물관 충돌이 불가피한 일이 있기도 한다. 이때마다 그는 박물관 편을 노골적으로 들었다고 기억한다. 대표적으로 문화재청이 지금의 분황사 인근에 추진한 황룡사지전시관을 무산시킨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전시관 공사를 앞두고 그 예정지인 분황사 인근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했으니, 그 발굴설명회(당시에는 아마 지도위원회라 했을 것이다)에서 그는 “여기다가 전시관을 지으면 경주박물관엔 누가 오겠느냐”고 한 말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박물관 한병삼을 논할 때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그의 친구들이다. 그의 서울대 사학과 동기생으로 같은 박물관에 생평을 투신한 인물로 미술사학도로서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 선생이 있고, 박물관계의 대모로 통하며 최종 공직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는 이난영 선생이 있다. 이 세 사람 사이에는 묘한 라이벌 의식도 적지 않았던 듯하지만, 늘 선두주자는 한 선생이었다. 한병삼 관장 시절 정양모 선생은 이 조직 넘버 투인 학예실장이었으며, 미술사학도인 이난영 선생은 경주에 있었다. 한 선생이 물러난 뒤 정 선생이 후임 관장이 된다. 정양모 관장 시설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다. 


한 선생이 타계한지 벌써 18년이라니, 질풍의 세월이 믿기지 않는다. 그의 이력을 보면 서른여섯에 박물관 고고과장이 되고, 마흔에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임명되어 무려 9년을 재직했다. “나이 50에도 달항아리 들고 다니게 생겼다”고 자조하는 지금의 학예직들이 보기엔 그가 비록 느닷없이 떠났다고 하지만 어쩌면 낙원천국을 살다간 다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