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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최대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 하지만 그 일생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이 아래에 소개하는 조희룡이라는 당시 사람의 증언이다. 조희룡(趙凞龍·1789~1866)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라는 사람과 친분이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조희룡의 문집 <<호산외기>> 중에 '김홍도전'(金弘道傳)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홍도(金弘道)는 字가 사능(士能)이요 號는 단원(檀園)이다. 아름다운 풍채와 태도에 마음은 활달하고 구애됨이 없어 사람들이 신선세계에 사는 인물이라 했다. 그가 그린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훼(花卉), 영모(翎毛)는 묘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神仙)을 잘 그렸다. 준찰(?擦), 구염(句染), 구간(軀幹), 의문(衣紋)을 앞 사람들에게서 본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천기(天機)를 운용하여 정신과 그림의 생리(生理)가 시원스럽고 광채가 혁혁하니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니 예원(藝園)의 특별한 솜씨였다.

 

정조 때 대궐에서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있었는데 매양 한 폭 그림을 올릴 때마다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임금은 일찍이 회칠을 한 큰 벽에 해상(海上)의 여러 신선을 그리도록 했다. 홍도는 환관에게 진한 먹물 두어 되를 받들게 하고는 모자를 벗고 옷을 걷어올리고는 서서 붓을 휘두르기를 풍우(風雨)와 같이 하니 두어 시간이 못되어 완성했다.

 

그림 속 바닷물은 약동하니 집을 무너뜨릴 기세였고, 사람은 그 생동하는 모습이 구름을 뚫고 하늘을 올라가는 듯했다. 옛날 대동전(大同殿) 벽화(壁畵)가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

 

또 임금이 금강산과 사군(四郡. 단양<丹陽> 청풍<淸風> 영춘<永春>제천<堤川>)의 산수를 그리라고 했을 때는 각 고을에 명하여 음식 지공을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신화와 같이 하도록 하니 이는 특별 대우였다. 그는 음직(陰職)으로 벼슬이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이르렀다.

 

원래 집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 하니 매우 특이했다. 돈이 없어 못 사고 있는데 마침 돈 삼천 錢을 보내준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그림을 받기 위한 예물이었다. 이에 이천 전을 떼어내 매화를 사고 팔백전으로는 술 몇 되를 사서 동인(同人)들을 모아 매화(梅花)를 감삼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소탈하고 광달함이 이와 같았다.

 

아들 김양기(金良驥)는 자가 千里, 호는 긍원(肯園)이라 했다. 그는 그림에 가법을 이어받아 산수와 가옥과 나무를 잘 그렸는데 아버지 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절친했는데 이제는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찬한다.

 

“예우(倪迂. 예찬<倪瓚>)의 그림은 앞사람의 자취를 쓸어낸 데다 그 소쇄함이 세속을 벗어났으므로 강좌(江左) 사람들이 예우의 그림이 있고 없음으로써 사람의 고상함과 속됨을 정했다. 元나라 때 이름난 화가가 성대히 일어났으나 그 중 예운림(倪雲林)이 드높고 빼어났던 것은 특히 그의 인품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고송류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사이를 독보적으로 왕래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 까닭은 ‘인품이 높아야 필법(筆法) 또한 높다’고 말하고 싶다. (김득신 최북 이인문은 단원과 함께 나란히 세상에 이름이 났다.)

최북은 字가 칠칠(七七)**이니 자 또한 기이하다. 산수와 가옥 및 나무를 잘 그리니 필치가 짙고 무게가 있었다. 황공망(黃公望)을 사숙(私淑)하더니 끝내는 자기의 독창적인 의경(意境)으로 一家를 이루었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사람됨이 격분을 잘 하며 외곬수였으며 자잘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집에서 한 달관(達官)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면서 주인에게 묻기를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姓이 뭔가?”라고 하니 최북은 얼굴을 치켜들고 달간을 보면서 “먼저 묻건대 그대의 성은 무엇이오”라고 했다.

최북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른 그는 갑자기 “천하의 명사(名士)인 내가 천하의 명산(名山)에는 죽는 것이 족하다”고 소리치고는 못에 뛰어들었는데 하마터면 구하지 못할 뻔했다.

 

한 귀인(貴人)이 최북의 그림을 한 점 얻으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협박했다. 분노한 최북은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고 하더니 곧바로 자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했다.

 

늙어서는 한 쪽에만 안경을 낄 뿐이었다. 나이 마흔 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은 七七을 字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호산거사(壺山居士)는 말한다.

“최북의 풍모가 매섭구나. 왕공.귀인의 노리갯감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스스로를 괴롭힘이 이와 같아야 한단 말인가?”

 

조희룡(趙凞龍.1789-1866)이 지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수록된 '최북전'(崔北傳)이란 글이다.

 

**최북이 字로 썼다는 七七은 아마도 칠칠맞다고 할 때의 七七을 희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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