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고구려 제16대 미천왕(美川王)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미천왕(美川王)<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을불(乙弗)<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미천왕(美川王)은 호양(好攘)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인데 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 경신년에 즉위해 31년을 다스렸다.

☞미천왕(美川王)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불(憂弗)  (0) 2018.02.14
을불(乙弗)  (0) 2018.02.14
호양왕(好壤王)  (0) 2018.02.14
미천왕(美川王)  (0) 2018.02.14
설계두(薛罽頭)  (0) 2018.02.14
살계두(薩罽頭)  (0) 2018.02.14

고구려 제16대 왕으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 혹은 우불이며 서천왕 손자이고, 아버지는 고초가 돌고다. 258년 ~ 331년, 재위기간은 300년 ~ 331년이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미천왕(美川王)<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을불(乙弗)<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 아들이다. 앞서 봉상왕이 아우 돌고가 배반할 마음이 있다 의심해서 그를 죽이니, 아들 을불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켰다. 그 집 곁 늪에서 개구리가 울면, 을불에게 버밤에 기와조각과 돌을 던져 그 소리를 못내게 하는가 하면, 낮에는 나무를 해오라 독촉함으로써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했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 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 집에서 기숙했다. 그 집의 할멈이 소금을 청하므로 한 말쯤 주고, 다시 청하자 주지 않았더니, 그 할멈이 원망하며 성을 내며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 을불이 알지 못하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할멈이 쫓아와 신을 찾아내어서 을불이 신을 숨겼다고 꾸며 압록재(鴨-宰)에게 고소했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볼기를 때린 다음 놓아 주었다. 이리하여 얼굴이 야위고 옷이 남루해 사람들이 보고도 그가 왕손인 줄 알지 못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니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음을 발견했다. 용모 비록 초췌하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하며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니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 해서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했습니다”. 을불이 믿지 못하고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했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라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왕손을 매우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나가자, 국상 창조리가 따라가며 여러 사람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하고, 갈대잎을 관에 꽂으니 여러 사람이 모두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음을 알고, 마침내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어 군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는, 이윽고 왕손을 맞이해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와 6일 동안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에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3년(302)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해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차지했다.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했다.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을 쳐서 깨뜨리니,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살별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우문씨(宇文氏)를 달래 함께 모용외를 치게 했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했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 했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과 장사(長史) 배의(裵)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 머리를 조아려 사실을 고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말하고,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최]비가 수십 기마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 나라로] 도망쳐 오고, 그 무리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인(仁)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鎭撫)하게 하니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는 하성(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아서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맹약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21년(320) 겨울 12월에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31년(330)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矢)를 전하였다. 32년(331)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미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미천왕(美川王)은 호양(好攘)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인데 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 경신년에 즉위해 31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즉위년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은 이름이 사유(斯由)<쇠(釗)라고도 했다>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했다.“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불(乙弗)  (0) 2018.02.14
호양왕(好壤王)  (0) 2018.02.14
미천왕(美川王)  (0) 2018.02.14
설계두(薛罽頭)  (0) 2018.02.14
살계두(薩罽頭)  (0) 2018.02.14
계두(罽頭)  (0) 2018.02.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