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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기 때 화랑임은 확실하나, 자세한 행적과 활동연대 등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준영랑(俊永郞)의 줄임말인 듯한데 이 또한 확실치는 않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백률사(栢栗寺) :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大玄) 아찬(阿喰)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룡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더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CF. 준영랑(俊永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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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에 따라 실례랑(失禮郞)이라고도 하니,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 따른 혼동이다. 신라 신문왕 때 화랑으로 문객 1천 명을 거느렸다. 북쪽 금란(金蘭)으로 갔다가 인근 적국 사람들한테 사로잡혀 목축에 사역됐지만, 신이한 행적으로 돌아왔으니, 이 일을 기념해 만파시적을 만만파파식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2 기이 2 만파식적 :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리공(理恭·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 왼편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백률사(栢栗寺) :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 남쪽에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고 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말하기를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 밟은 돌 위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인 자취다"고 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이 대현(大玄) 살찬(薩喰)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693) 3월에 부례랑이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가서 북명(北溟)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이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오직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가니 이때가 3월 11일이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혔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며 조사케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이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고 4월에는 나라 안 사람을 모아 말했다. "현금과 신적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가 매우 기뻐하며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했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 들에서(혹은 도구都仇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 하시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스님이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 부처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이 절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해 대각간(大角干·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 아찬(阿喰)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 경정궁주(鏡井宮主)로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은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5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는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하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cf. 실례랑(失禮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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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시대 신라인으로 사량궁 사인으로 있으면, 다른 사인들이 관청 곡식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아 그들에게 독살됐다. 근랑(近郞)이라는 풍월주를 따라 수양하면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사사롭게 취할 수 없다는 신념을 익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검군 열전 :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였으므로 다음 해의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倉)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이 말하기를 “뭇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홀로 물리치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만약 양이 적다고 여긴다면 청컨대 더 주겠다!” 하였다. 검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붙여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이찬(伊飡)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렸으므로 그렇게 말했다. 검군이 나와 근랑의 문 앞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하여 드디어 불렀다. 검군이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과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두세 번 거듭 물으니 이에 그 이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어찌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라고 말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내 죽음을 두려워하여 뭇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나는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고, 드디어 모임 장소에 갔다. 여러 사인이 술을 차려 놓고 사죄하였다.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는데 검군이 이를 알고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泰山)을 기러기털[鴻毛]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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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文努)의 유풍을 따르는 신라 화랑 집단에 소속된 불교 승려라는 사실만 확인된다. 활동시기는 그와 교유한 김흠운(金歆運)이 태종무열왕 2년(655)에 사망한 시점을 고려할 때 선덕~진덕~태종무열왕 무렵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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