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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금4

측량, 빗금에서 라인으로 근대는 빗금에서 선으로의 이동이다. 측량은 선을 긋고 경계를 수치화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 유길준이 측량 학교를 세웠겠는가? 측량없이 선을 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도 경계는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언제나 빗금이라 언제나 그 빗금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측량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한 곳이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실시되고 그것이 적용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을 옥죈 산송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저 두 사업으로 조선총독부가 토지와 산림을 수탈했다는 신화가 자리잡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토지 산림 수탈은 금을 긋지 않은 상태에서 빗금으로만 존재하던 구역에서 늘 발생한다. 수탈은 전근대에 훨씬 더 많았다. 요즘도 이웃간 담장 구역이 어디까.. 2023. 9. 29.
평과 마지기...강렬한 빗금의 전통, ㎡의 탄생 식민지시대 문서를 보면 길이를 재는데 자주 보이는 단위가 尺(척)이다. 이것도 후기로 갈수록 미터법으로 대체한다. 미터법이 尺에 대해 지닌 최대 강점은 빗금의 경계를 최소화한다는 사실이다. 척으로 하면 척과 척 사이에 빗금이 생긴다. 이 점에서 미터법도 근간의 한계가 있지만 둘은 비교하면 그 빗금이 훨씬 줄어든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근대는 빗금의 퇴출이며, 그 자리에 라인을 갖다 놓는 것이다. 근대가 개막하면서 빗금이 급속도로 퇴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통은 강고해 그것이 가장 널리 남은 곳으로 아파트 건축물 너비를 말할 때 쓰는 평이 있고, 농촌에서는 논밭 넓이를 말할 때 쓰는 마지기가 있다. 이 평은 얼마전부터 언론에서 나서 없애기 시작했다. ㎡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기는 내가 혹 둘을.. 2023. 9. 29.
빗금의 온상 양안量案, 근대는 빗금에서 선으로의 이동이며 토지조사업은 그 필연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후기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이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경계의 확정과 이를 통한 삥뜯기인 세금 부과를 위함이었다. 소재지 지번 지형 등급 면적 소유주를 빠짐없이 기재해 빈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경계였다. 오만분지일 정도 되는 지도가 첨부되어야 하지만 지도가 없다. 지도가 없다 함은 경계가 빗금이란 뜻이다. 왜 이랬는가? 측량술이 없어서였다. 측량을 하지 못하니 그 경계는 언제나 빗금이었고 그 빗금 자리에서는 언제나 분쟁이 일어났다. 산송이니 뭐니 하는 망국병의 근원이었다. 근대는 저 빗금을 없애야 했다. 빗금은 선으로 바꿔야 했다. 토지조사사업, 그건 단군조선 이래 한국사의 혁명이었다. 저 빗금이 선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유류 토지가 발생했다. 남는 땅이었다. 이 .. 2022. 11. 17.
문화재행정의 요체는 빗금을 없애고 선을 긋는 일이다 꼭 8년 전 오늘인 2012년 12월 9일, 나는 내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앞 사진을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종래의 문화재 발굴현장에서 보이는 경고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식의 협박 경고문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 바꿔야 합니다. "개 조심...물려도 책임 안짐" 이런 식의 경고문이 가뜩이나 걸림돌 취급받는 문화재에 더 해악을 끼칩니다. 아마 이 경고판은 그 무렵 내가 함안 성산산성 발굴현장 취재를 갔을 적에 찍어둔 것이려니와, 이 무렵 나는 저와 같은 문화재보호구역이라든가 발굴현장 등지에 세워놓은 각종 안내판에 보이는 위압적인 문구들에 대한 문제를 집중 지적했거니와, 이를 계기로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저와 같은 협박성 문구를 더는 적지 말라는 공문까지 현장에 내려보낸 것으로 안다. 그래서.. 2018.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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