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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5

지석誌石, 저승세계로 가는 도로 안내판 지석誌石은 묘지명墓誌銘 일종이나 무덤 밖에서 여기가 누구 무덤임을 표지하는 신도비神道碑 혹은 갈기碣記碑와는 달리 무덤 안에다가 시체랑 같이 묻는 표식이라는 점에서 갈 길을 달리한다. 그 구체하는 매장 위치는 일정한 패턴이 없어 중국의 경우 현실玄室 통로 쪽에 두는 관례가 있으나 고려나 조선의 경우는 봉분 흙더미나 그 바깥 묘역에 묻는 일이 많았으니 힘께나 있는 집안에선 신도비랑 지석을 동시에 세우거나 묻었으나 아무래도 신도비 쪽이 돈이 많이 들고 또 그걸 세우는 자격에 제한도 있어 지석만 넣는 일이 많았으니 그 내막이 무엇이건 여기가 누구네 무덤임을 표식하는 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경기도박물관이 이런 지석만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꾸미고선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런 자리를 장만했다기에 자칫 무미하기 짝이 없을.. 2022. 12. 9.
慶州寺院の庭園石が新羅の神道碑? 慶州寺院の庭園石が新羅の碑石だった…「最古の神道碑」 朴洪国·李泳鎬教授、8世紀の碑文80字判読し「恭順阿飡神道碑」と命名 「国立慶州博物館「飡之碑」の冒頭部分…字は名筆金生が書いたようだ」 Part of oldest identified stele in Korea, Silla Sindobi discovered Part of oldest identified stele in Korea, Silla Sindobi discovered SEOUL, May 26 (Yonhap) -- A part of Silla Sindobi Stele, believed to the oldest among the identified ones in Korea, was discovered in Gyeongju, North Gyeonsang Province.. 2022. 5. 27.
[용인시박물관 기획전]돌에 새긴 사대부의 정신 2021년 용인시박물관 기획전 "돌에 새긴 사대부의 정신" 전시가 바로 오늘, 3월 17일(수) 개막했다. 이번 기획전시는 박물관 신윤정 학예사의 마지막 전시라서, 더 신경이 쓰였기에, 출장에서 복귀하는 중에 잠깐이지만 박물관에 들러 둘러봤다. 이번 전시는 용인시박물관에서 그간 수집해 온 사대부 묘비 탁본자료를 소개하는 자리로, 무덤 주변에 세우는 다양한 석물 중에서도 묘비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단순한 표석을 넘어서서 당시 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와 역할, 그들이 지녔던 정신세계를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조선시대 용인은 수도 한양과 가까워 많은 사대부들이 자리를 잡았고, 용인이씨, 연안이씨, 한산이씨, 해주오씨, 한양조씨 등등이 명문거족으로 조선시대 내내 이름을 떨쳤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 2021. 3. 17.
오윤겸 무덤에 신도비가 없는 이유 조선중기 문단을 주름잡은 계곡溪谷 장유張維(1587~1638)가 붓 가는 대로 써서 모은 글 《계곡만필谿谷漫筆》을 읽다가 그 제2권에서 다음 일화를 마주했으니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묘비를 미리 지어 놓았고, 오윤겸은 임종 때에 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李元翼在世時預撰墓碑吳允謙臨終遺命勿立碑]] 이상李相 원익元翼과 오상吳相) 윤겸允謙은 모두 학덕이 높은 원로대신이었는데, 이상의 명성이 더욱 중하였다. 한데 이상이 생존시에 이준李埈) 숙평叔平한테 자신의 묘비墓碑를 미리 지어 놓도록 부탁하니, 그 뜻은 대체로 자신을 너무 미화美化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으나 숙평이 지은 글을 보면 칭찬하는 말이 굉장했다. 반면에 오상은 임종臨終에 즈음해 비碑를 세우지도 말고 시호謚號도 청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러고 보.. 2020. 12. 22.
왕릉 신도비는 왜 사라졌을까?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의 비는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태종(太宗) 헌릉(獻陵)의 비는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며, 세종 영릉(英陵)의 비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문종(文宗) 현릉(顯陵)에서는 세 능의 전례에 의하여 곧 비를 세우려고 공역(功役)을 이미 시작하였었는데, 어느 건의하는 자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행한 사적은 국사(國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사대부와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중지하소서.” 하여, 이를 좇았다. 뒷날 영릉을 여주(驪州)로 옮김에 따라 또한 비를 매장하고 쓰지 않았으니, 본조[國朝] 능침(陵寢)에 비를..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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