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종묘12

왕 또한 마누라는 한 명뿐, 부묘祔廟의 중요성 전반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견주어 고려시대가 적서 차별 양상이 극심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는 상대성 이론이라, 견주어 볼 때 그리 보인다뿐이지, 고려시대라고 적서차별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적서 문제는 결국 혼인 양태에서 비롯하는데, 더 구체로는 남자 한 명에 부인이 한 명인 1부1처제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적어도 기록으로 남은 흔적으로 볼 때는 철저한 1부1처제 사회였고, 남자한테 부인은 같은 시기에 한 명이 있을 뿐, 복수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어서 이쪽도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어느 인터넷 사전을 보니 "고려시대에는 두 명의 정실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서자를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서자를 적자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2024. 1. 25.
어보御寶와 어책御冊, 그 아슬아슬한 관계 "어책御冊은 어보御寶에 대한 주석(annotation)이다" 얼마전 감수라는 되먹지 않은 이름으로 어보 관련 평가서에다가 내가 함부로 썼다가, 이건 아무래도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 해서 빼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다. 한데 이 말 맞는 거 같아. 명언 같아. (2016. 1. 3) *** 내 말 틀린 거 봤어? 맞어. 어보와 어책 이 둘 관계를 제대로 의심해본 사람이 없다. 어보가 추상이라면 어책은 그 추상을 해체한 구상이다. 그것을 풀어쓴 것이 바로 어책이다. 어보건 어책이건 신주神柱와 더불어 신위神位를 구성하는 삼두마차다. 실제 종묘 각 신실神室은 이 셋을 모름지기 세트로 안치 봉안해서 모신다. 2024. 1. 3.
[墓와 廟] (2) 종묘가 없어 성묘省墓를 택한 고려 현종 나는 앞서 무덤에 봉분이 등장함으로써 조상 추숭 의례는 종래 그 혼령인 신주를 모신 종묘(집안으로 좁히면 가묘家廟) 말고도, 그 후손이 무덤에 직접 가서 제사를 올리는 능행陵行도 생기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따라서 봉분의 출현은 廟에서 墓로 조상 추숭 의식이 이동(혹은 병행)했음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 이런 내 말을 단칼에 증명하는 대목이 있다. 《고려사절요》 권제3권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갑인 5년(1014) 여름 4월 조 대목이다. “왕이 친히 재방齋坊에 체제禘祭하고 (선대왕과 그 부인들에게) 존시尊諡를 더 올렸다. 당시에 대묘大廟가 완성되지 못하여 매양 시제時祭가 되면 각기 해당 능陵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가 이제 재방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 2023. 11. 21.
청자 순화 4년명 호 靑磁淳和四年銘壺, 죽은 왕건을 위한 봉헌물 청자 순화 4년명 호 靑磁淳和四年銘壺 Jar with Inscription of "4th Year of Sunwha". Celadon 국보 제326호 National Treasure No.326 고려 993년 Goryeo 993 보물이었다가 2019년 5월 2일 국보로 승격했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점토로 만든 후 황록색 회유 계통 유약을 입힌 이 항아리에는 제작 시기와 용도를 알려주는 음각陰刻 명문銘文이 굽바닥에 있다. 한반도에 청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던 10세기 고려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가장 확실한 제작 연대를 갖춘 유물이라는 점에서 도자사 연구에서 그 중요성이 첫 손에 꼽힌다. 실제로 이 유물은 한반도에서 제작한 청자로는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 완형 유물이다. 바닥 명문은 다음과 같다.. 2023. 7. 6.
왕궁 왕릉 종묘 사찰을 하나로 묶는 그랜드디자인 왕릉에 대한 이해의 출발은 왕궁이다. 왕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왕릉이 안보인다. 둘은 왕이 거주하는 집이다. 나와바리가 다를 뿐이다. 왕궁은 살아있는 왕의 독점적 구역이요 왕릉은 죽은 왕들의 조차지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이 종묘다. 종묘는 두 가지를 한 군데로 봉합한다. 이런 이해는 사찰에 대한 그것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사찰은 부처님의 집이다. 그 집은 불교 도입 초창기엔 생전의 집(대웅전)과 사후의 집(탑파)가 착종하다 고려시대 이후엔 급속도로 대웅전 중심으로 재편한다. 탑은 사라졌는가? 대웅전으로 통합됐을 뿐이다. 탑이 애초에 중국에 상륙했을 적에 그것을 원묘圓廟와 같은 용어로 번역하곤 했으니, 이는 탑파가 지닌 원초적 의미가 추모에 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런 廟로서의 탑파가 훗날 대웅전 하나.. 2023. 5. 31.
종묘와 사직은 남녀가 밀회하고 섹스하는 곳 아래는 종묘와 orgy 라는 제목으로 2008년 1월 26일 19:04:08에 쓴 글이다. 춘추전국시대 종묘宗廟 혹은 사직社稷을 일컫는 이름은 차이를 보였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이들 국가 최고 제사시설이라 할 수 있는 곳을 그것이 자리한 지명을 따서 다르게 부르기도 한 모양이다. 연燕의 경우 조祖라 했고, 제齊는 사직社稷이라 했으며, 송宋은 상림桑林이라 했다. 또 초楚는 운몽雲夢이라 했다. 이들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글 맨 뒤에 출전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송나라 사직 혹은 종묘가 있던 곳이 뽕나무 수풀이라는 데서 단적으로 확인되며, 초나라 사직이 있던 운몽 또한 장왕을 비롯해 초나라 역대왕들이 자주 거둥해 사냥하던 곳이라는 점에서 수풀이라는 특성을 검출해 낼 수 있.. 2023. 4. 1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