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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4

심곡서원과 친일파 한규복(韓圭復)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심곡서원(深谷書院)은 1985년, 1992년 두 차례 소장 전적을 도난당해서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심곡서원 강당 안에는 송시열이 찬한 1673년 강당기(講堂記), 1730년 숙종대왕 어제(肅宗大王 御製), 도암 이재(李縡, 1680~1746)가 원장으로 취임하여 제정한 1747년 심곡서원 본원 학규(本院 學規) 등 심곡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편액들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1931년과 1933년 심곡서원 중건 당시를 기록한 중건 상량문 편액과 조광조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를 소재로 지은 한시 ‘행수가(杏樹歌)’ 편액이 남아 있는데, 찬자는 한규복(韓圭復, 1881~1967)이란 사람이다. 한규복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 사람이다.. 2024. 3. 5.
편액 읽어 찾아낸 경주 서악서원 역사 민경 강군한테 툭 던졌다. 강구나, 탈초해라. 2분 만에 반응이 온다. 천계삼년계해 선액숭정후재경자 소진익년신축이 조명복게 天啓三年癸亥 宣額崇禎後再庚子 燒燼翌年辛丑以 朝命復揭 천계 3년 계해년(1623)에 편액을 하사받고[宣額] 숭정후 두번째 경자년(1721)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듬해(1722) 신축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다시 편액을 걸었다. 이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안내판이 심대한 팩트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안다. 조금 더 자세히 본다. 인조 원년 1623년에 '서악서원'으로 사액된 것은 맞다. 저때 와서 임란 때 불타버린 '서악정사'가 국가공인 '서악서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역사가 싹 빠졌다. 서악서원이 다시 불이 나서 도로 세운 시점은 1721년이며, 옛 편액을 본떠 다시 '.. 2023. 7. 9.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현판 글씨 쓰다 백발이 된 중장仲將 위탄韋誕 우리의 삼국시대 중반에 해당하는 중국사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왕조 중 하나인 유송劉宋 시대 황족 일원 유의경劉義慶이 엮은 일화 모음집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교예巧藝 제21에 세 번째로 수록된 일화가 다음이라 위중장은 글씨를 잘 썼다. 위 명제가 궁전을 세우면서 편액을 달고는 중장을 시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글을 쓰게 하고자 했다. (중장이 일을 마치고) 내려오니 머리카락과 귀밑머리가 허애졌다. 이 때문에 자식들한데는 다시는 글씨를 배우지 말라고 했다. 韋仲將能書. 魏明帝起殿, 欲安㮄, 使仲將登梯題之, 旣下, 頭𩯭皓然, 因敕兒孫, 勿復學書. 이것이 《世說新語》 본문이다. 이 일화 주인공 위탄韋誕(179~253)은 자를 중랑仲將이라 하는데, 저 이야기에서는 본명 대신 字로 등장한다. 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 2022. 7. 10.
현충사, 그 실타래를 풀며(1) 현충사(顯忠祠)의 여러 층위와 박정희 현판 문제(1)‘이충무공 유허’와 ‘현충사’, 그 괴리 그의 탄강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해군 총독으로 맹활약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시설이 있으니, 이를 우리가 현충사(顯忠祠)라 하거니와, 현재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이 시설은 우선 면적이 방대하기 짝이 없어, 개인 사당으로 이토록 큰 규모는 없다. 시민공원을 겸한 이 현충시설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첫째,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곳이 중앙정부요, 둘째 그것이 보존정비된 내력이 이미 그런 특성이 농후하게 관철되었으며, 셋째 그 연례 제례를 관장하는 기관 역시 중앙정부인 까닭이다. 제관은 대통령이 하다가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까지는 국무총리가 집도한다. 도대체 이.. 2018.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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