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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5대에 걸친 신석기시대 잉글랜드 공동묘지(2)

by taeshik.kim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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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헤이즐턴 빼빼로 무덤 Hazleton long barrows 중 north 쪽, 그러니깐 Hazleton North는 이미 1979년 이래 1982년에 걸쳐 전면 발굴이 있었으니, 이를 지휘한 사람은 Alan Saville이라는 사람이다.

나는 이참에 그가 이 조사를 정리한 글이 웹에 제공됨을 보고는 듬성듬성 읽었으니, 혹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래를 읽어봤으면 싶다.

이를 보면 왜 이런 무덤을 long cairn 혹은 long barrow이라 부르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서 장축인데 서쪽 석축 끝단을 forecourt라 했으므로 이곳이 앞마당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석축 중앙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South quarry, North Quarry라 이름한 곳은 이 석축 무덤시설을 만드는데 필요한 돌을 캐낸 장소다. 석축 중앙 지점 허리통 북벽과 남벽 중앙 지점을 뚫어 그 중앙을 향해 무덤방 chamber를 마련했으니 두 채임버가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시신은 바로 이 남북 체임버에다가 쟁여 쌓는 수법으로 매장했다. 일부 화장한 흔적도 확인됐다 한다. 이 동서 장축 석축을 만들 적에 무엇인가 측량이 있었던 거 같다. 그 동서 축을 발굴자들은 axial alignment라 표현했다.   


From the Transactions of the Bristol and Gloucestershire Archaeological Society

Anatomising an Archaeological Project - Hazleton Revisited
by Alan Saville
2010, Vol. 128, 9-27
The Society and the Author(s)

인근 다른 지역 long cairn인데, 이건 옆구리를 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쪽 귀퉁이를 치고 들어갔다. 암튼 왜 저리 부르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사 결과 이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천700년전, 그러니깐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는 기원전 3천700년 어간의 신석기시대 공동묘지로 드러났으니, 이 무렵은 아직 브리튼 땅에 농경이 도입되기 직전이다.

덧붙여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스톤헨지가 대표하는 거석기념물 혹은 이른바 환호 유구가 브리튼과 아일랜드 일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가 대략 기원전 2천500년~2천년 전 무렵으로 보니, 그보다도 대략 천년 이상이 빠른 시점에 만든 기념물이 되겠다.

조사책임자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남북 무덤방에서 성인과 12-19세 사이 사람 21명 개체분 뼈가 발견됐으며 성인과 어린이 각각 1명씩은 화장한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저들은 물론 한꺼번에 묻힌 것이 아니고 이른바 추가장이라는 형태로 처음 무덤을 만든 다음 계속 쟁여 넣은 방식을 채택했다. 입구는 판돌로 막았다. 맨 마지막으로 성인 1명을 묻었는데 부싯돌과 돌도끼를 부장했단다.

알파벳은 석축 구간을 표시하는 듯하다. 


이곳 조사 당시 모습은 조사보고서와 앞서 말한 조사책임자 글이 전면 공개되는 까닭에 비교적 용이하게 접근하거니와 그에 실린 사진 몇 장을 통해 본다.

북쪽 무덤방 혹은 무덤길에서 확인한 성인 남자 뼈다. 상당히 온전한 상태로 남았음을 본다. 바로 저런 뼈들에서 이번에 DNA를 추출한 것이다. 이건 북쪽 체임버 입구 쪽이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봤다. 1981년 조사 때 모습이다. 


chamber에 그득 쌓인 뼈다구들(위). 저렇게 쌓인 뼈를 토대로 몇 개체분이라는 걸 밝혀냈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상당한 수정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다. 아래 사진은 앞서 말한 앞마당 쪽 발굴이다.  
앞서 본 것들을 조금 더 자세히 본 것들이다. 

매장주체부만 떼어낸 모습이다. 중앙 아래 위에서 각각 중앙을 향해 무덤길을 만들었다. 두 무덤길 혹은 무덤방은 통하지 않음이 확실하다.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는 각기 방형의 방을 만들었다. 


이번에 이 무덤방에서 수습한 35명(아마 재조사 과정에서 개체가 늘어난 듯하다) 분에 이르는 뼈와 이빨에서 DNA를 추출했으니 이 작업은 Newcastle과, Central Lancashire, Exeter 그리고 York 대학, 그리고 Harvard, Vienna 등지의 유전학 전공자들이 했다고 한다. 그 결과 35명 중 27명이 긴밀히 생물학적인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단다. 간단히 말해 부모 자식 관계이거나 형제자매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이런 성과는 Nature에 발표됐다.

대체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 및 형제들과 같이 묻혔다. 이는 부계사회였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가 하면 딸들 중에서 어릴 때 죽은 둘은 이 무덤에 묻혔지만 성인 딸은 전연 흔적이 없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남편 무덤에 묻혔거나 혹은 다른 곳에 묻혔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나는 이것이 족외혼 흔적이 아닌가 한다.

선사시대 이토록 많은 사람 관계가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만치 좋은 상태로 뼈가 남았다는 게 기적이니깐 말이다.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 적어도 브리튼 일부 지역에 산 사람들이 이룩한 사회를 들여다 볼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만은 틀림없다.

더 놀라운 점은 이들 27명이 한 집안의 5대를 계속한 흔적이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히 말해 이 무덤은 그 집안에서 돈을 주어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들었던지 아니면 지들이 직접 만들었든지 그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암튼 그 집안이 독점하며 5대를 내리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도 1대가 30년가량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연구성과로만 보면 이 집안은 이 일대에서 150년 이상을 주름잡았음을 본다. 더 간단히 말해 여긴 우리 땅이라 해서 그 집안이 이 일대를 지배한 것이다.



그 성과를 이런 표 한장으로 첨부했다. 실은 이 표가 이번 연구성과를 압축한다.

이걸 보면 좀 복잡한데 한 남자한테 여자가 여러 명이고, 또 그 여자 중에는 그 남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한테서도 씨를 받아 후손을 두었음을 본다. 적어도 이 표에서는 근친혼이 전연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하나 조카가 숙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 보일 뿐이지만, 이 숙모도 그 남편 삼촌은 할아버지가 다른 여자한테서 받은 씨다.

이 가계도는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조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맨 윗줄 맨 가운데 저 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씨족 가계도다. 이 씨족은 이 시조를 중심으로 그 직계 후손으로 구성되며, 외부 수혈은 오직 혼인에 의해서만 이뤄진다. 이 외부수혈은 오직 여성한테만 해당한다.

이는 저 사회가 철저한 부계 중심 족외혼이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저 씨족 시조한테도 형제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없을 수도 있지만,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형제들도 각기 저와 같은 씨족을 이루어 분파했을 것이다. 나아가 저 시조 직계 후손 남자 중에서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그 중심에서 밀려나거나 따로 분파해 또 하나의 씨족을 형성한다.

인골은 35개체라 했는데 저 표에는 내가 헤아려 보니 41명인가가 등장한다. 드러나지 않는 이들을 채워넣었다는 뜻이다.

양자제도가 저 무렵에도 있을 것이라는 논급이 보이는데 이건 너무 앞서간 것이다. 예컨대 다른 남자한테서 이미 씨를 받은 여자를 후처나 첩으로 들였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도 양자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나, 우리한테 익숙한 그런 양자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저런 관념이 있었다는 것은 그 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기억 장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 기억 장치 중 대표가 제사다. 그 시조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같은 씨족 일원임을 체득한 것이다. 그것이 꼭 제사일 필요도 없거니와, 예컨대 연례적인 카니벌 같은 제도를 통해 시조를 기억하는 방식을 채택했을 수도 있다.

덧붙여 저런 씨족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무덤을 만든 사람은 저 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 혈연 집단이어니와 그런 가문이 적어도 5대를 가도록 강고한 가족 혹은 씨족 관념을 유지한 채 집단을 형성했으며, 이 집단은 그 집단이 존재한 시기에 그보다 더 큰 집단의 일원이 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을 것이니, 그것은 무덤을 만든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 구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리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석기시대의 운영 원리가 우리한테 익숙한 역사시대의 그것이랑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 보기엔 저 사회가 조선시대랑, 그리고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랑도 근간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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