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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미당의 자화상이 투영한 인촌

by taeshik.kim 2018.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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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2000년 향년 86세로 타계한 미당은 1915년 전북 고창 출생이라, 이 자화상이 말하는 사정과 관련해 우리가 고려할 점은 하서 김인후 후손으로 그 13세손으로 호남의 만석군 인촌 김성수(1891~1955)가 고창 출신이라는 점이다. 미당이 자랄 무렵 고창 일대는 김성수 왕국이었다. 이곳을 무대로 사는 사람은 대부분 소작인이었으니, 미당 아비는 그 집안 마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애비는 종"이었다는 말은 풀어쓰면 "우리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의 종"이라는 말이다. 




호남 장성 땅 기호철 선생이 인촌 생가와 미당 생가를 한 눈에 표시한 지도를 보내줬다. 둘 다 바다에서 가깝다. 인촌은 들리는 말로는 경성방직을 일으키기 전에, 혹은 그 무렵에 배 3척을 보유했다 한다. 그 배로 일본으로 호남 쌀을 (밀)수출하고, 대신 일본에서는 광목을 들여와 부를 더욱 축적했다 한다. 이를 발판으로 인촌은 경성방직을 설립하고, 그에서 다시 불린 재부를 기반으로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인수했으니, 이리 보면 저 자화상은 그런 인촌 일대의 단면이 폭로한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미당 외가가 어딘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마도 고향에서 가까웠으리라. 바다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 어촌이지 아니했나 한다. 미당이 회고록을 남겼는지 즉각 확인치는 못했으나, 이런 사정들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으리라. 고기잡으러 나갔는지, 아니면 상선을 탔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배가 전복되어 실종되었는지 혹은 다른 데로 밀향하고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갑오년에 외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무슨 바람인지 안희정 바람인지 등등은 알 수 없으나, 가장 허심하게 보면 우리가 아는 그 바람이다. 그의 고향이 바닷가임을 고려하면, 저 말이 추상과 구상의 오묘한 접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그때는, 그리고 시인은 그리 구상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률이 있기에, 미당은 저리 퉁치고 갔을 뿐이다. 


"스물세 해 동안"이라 했으니, 이 시는 1915년 생 미당이 1937년 어간에 지었음을 안다. 23살 청년이 저리 읊조리니, 그 안타까움이 더욱 절절하다. 


이런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저 자화상은 진짜 미당의 그것이거나 매우 가차움을 안다. 저 시가 나한테 더욱 절절한 까닭은 무대를 옮겨 소백산맥 기슭으로 가면 나랑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시적 재능이 전연 없는 내 자화상은 셀피 사진 한 컷으로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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