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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욕망의 변주곡 (5)《화랑세기》와 찰주본기刹柱本記,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by taeshik.kim 2019.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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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복원한 경주 황룡사



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4. 《화랑세기》와 찰주본기刹柱本記,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황룡사 찰주본기를 오로지, 혹은 그것을 주요한 전거로 삼은 직업적 학문종사자의 글은 많다. 나아가 찰주본기가 말하는 황룡사 목탑 창건에 대한 연기緣起와 창건 과정 또한 《삼국유사》가 저록한 그것은 비록 세부에서 차이를 보이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 대략大略이 일치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이에서 나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찰주본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할 때는 대체로 전자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더욱 신뢰를 보내는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신라시대의 기록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신라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므로 후대에 저록된 《삼국유사》의 그것보다는 더욱 신뢰감이 간다는 건 어쩌면 조건반사일 수 있다. 하지만 찰주본기가 신라시대 기록물이라고 해서 그 기록의 정확성까지 모조리 담보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편찬연대의 멀고 짧음을 기준으로 그 사실성까지 판단한다면, 타임 지와 뉴스위크 지를 구독하고,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성철 스님의 신화도 사실史實이 되고 말며, 백제 위덕왕威德王(창왕昌王) 당대에 왕흥사王興寺 목탑木塔을 세우면서 그들이 남긴 기록, 즉, 사리舍利 2개를 넣어두었더니 저절로 세 개가 되었다는 기록도 당대當代의 기록이므로 사실史實을 넘어 진실일 수밖에 없다. 


황룡사 구층목탑 모형. 기록과 발굴을 통해 상상 복원한 모습이다.



찰주본기에 보이는 내용 중에 《화랑세기》와 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나아가 그것이 혹여라도 《화랑세기》 진위 여부를 판정할 수도 있다면, 어느 하나를 절대적 史實에 입각한 정전正典(Cannon)이라고 고정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다른 하나를 판별할 수는 없다. 그가 믿는 正典이 진실을 호도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나아가 편찬연대의 멀고 짧음이 그 기록의 정확성 우열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면, 그 심사자는 당연히 비교대상인 둘을 각기 합당한 위치에 놓고 저울질해야 하지 않겠는가? 


찰주본기와 비교대상인 《화랑세기》만 해도, 이 《화랑세기》가 정말로 김대문의 저작을 저록著錄한 것이라면(그것을 원문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별개로 하고) 외려 《화랑세기》가 경문왕 12년(872)에 완성된 찰주본기보다도 무려 160년 이상을 앞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함에도 찰주본기와 《화랑세기》의 관련 내용을 근거로 《화랑세기》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고 여긴 어떤 논자는 찰주본기에는 용수龍樹가 선덕왕善德王 14년에도 살아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그 이전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화랑세기》에 문제가 있으며 용수와 용춘을 형제라 한 것은 더욱 더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이 논자는 황용사 목탑 중수重修가 왕실과 국가에서 심혈을 기울인 대역사大役事였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왕실과 국가의 중차대重且大한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기록한 찰주본기의 내용은 그 어떤 기록보다 정확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언급의 타당성 여부를 심사하기에 앞서 벌써 이런 입론은 출발 자체가 결정적인 하자를 안았음을 지적할 수 있으니, 그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찰주본기刹柱本記가 말하는 황룡사 창건에 얽힌 기록이 전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하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이 논자가 찰주본기를 절대 근거로 삼아 《화랑세기》 위서론을 주장할 그 당시에도 찰주본기의 그것이 오로지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만을 적었다는 증거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으며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그 조성 내력과 수리 내력을 정리한 첩식帖式, 곧 병풍 같은 접이식 문서로, 신라 경문왕 때 목탑을 수리하고서 써 넣은 것이다.



찰주본기에 의하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세웠다고 하거니와 이런 그가 어려서 살생을 좋아해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法號를 자장慈藏이라 했다고 하거니와, 꿩이 눈물을 흘렸겠는가? 혹시 신라시대 꿩은 눈물을 흘리는 종자가 있었는데 후대 어느 때인가 멸종해 버렸는지 모르지만, 나 역시 어릴 적에 많은 꿩을 잡아 보았으나, 눈물 흘리는 꿩을 본 적이 없다. 볼 짝 없는 거짓말이다. 이런 明하고 白한 거짓말이 들어간 텍스트를 절대 준거로 삼아 그 비교 대상을 가짜라고 몰아칠 수 있는가? 


이 찰주본기에는 중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를 바탕으로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해 시작해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쳤다고 하면서 이 건축 공사에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삼았다고 덧붙였으니 감군은 말할 것도 없이 공사 총감독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논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화랑세기》가 위서僞書인 근거가 되는가? 그의 주장, 즉, 이를 볼 때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은 한 사람이며, 《화랑세기》에 의하면 목탑 완공 무렵에는 이미 죽고 없어야 할 용수龍樹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그런 내용을 담은 《화랑세기》는 위서僞書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가? 


첫째,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위서僞書가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나를 포함해 이종욱과 이강래도 논증했듯이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 자체에서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찰주본기에 645년 황룡사 목탑 창건 당시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고 해서 이것이 《화랑세기》가 가짜라는 근거는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같은 찰주본기의 기록이 오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안 흘리는 꿩이 눈물을 흘린다는 거짓말까지 한 찰주본기가 용수龍樹에 대한 기록이 오류일 수 있다는 상정은 왜 하지 못하는가? 


찰주본기. 접이식 병풍 문서를 풀어해친 모습이다.



나아가 찰주본기 그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도 이간伊干 용수龍樹는 용춘龍春과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明明하고도 白白하게 드러난다. 어떤 근거에서 나는 이같은 담대한 주장을 제기하는가?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 조에 이르기를 이해 여름 4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追封했다 한다. 나아가 《삼국유사》에서는 왕력王曆 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조에서 그의 아버지를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용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이라 했다고 하지만 같은 기이紀異 편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서는 김춘추가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라 해서 결국 김춘추가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문흥文興이라는 시호를 지어 받친 것만은 분명함을 밝혀준다. 


더불어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8 신문왕 7년(687) 조에 이르기를 이해 여름 4월에 대신大臣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고했다고 하면서 그 제문祭文을 수록했거니와 이에서 신문왕은 종묘 영전에서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고 삼가 테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고 했다고 한다. 


묻는다. 그가 용수龍樹건 용춘龍春이건, 나아가 그가 한 사람이건 두 사람이건 관계없이 이미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된 마당에 경문왕景文王이 비록 방계이긴 하지만 엄연히 선대 왕실 계보에 속하고 열성조列聖祖에 편입된 그를 이름으로써 부를 수 있는가?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이 같은 사람에 대한 이異표기라면, 이미 경문왕 당시에 그의 위상은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이 아니라 엄연히 문흥대왕文興大王이어야할진대 어찌하여 찰주본기에는 ‘이간伊干 용수龍樹’라고 등장할 수 있는가? 정말로 용수龍樹와 용춘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문흥대왕文興大王이 이간伊干이었을 적에 감군監君을 맡아” 정도로 표현해야 한다. 


찰주본기가 완성된 무렵 신라 말기에 왕은 생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죽은 뒤에 존호尊號로써 바친 시호諡號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이 시대 다른 금석문에서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으니, 예컨대 진성여왕 4년(890) 이후 언제인가 세운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郞慧和尙 백월보광탑비白月葆光塔碑에 법사를 일러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니 태종무열왕이 8대조시다”고 했으니, 어디에 김춘추金春秋라는 이름을 썼는가? 


황룡사 목탑터 심초석. 저 돌덩이가 목탑 중심 쇠기둥을 받침한 흔적이다.



나아가 애장왕 시대(800~808)에 건립했다는 고선사高仙寺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에도 “문무대왕文武大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일찍이 저절로 이루어짐에 응하여 나라가 평안하였으며”라고 해서 이에서도 시호가 보이지 결코 김법민金法敏이라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실례實例는 략略하거니와,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대왕大王에 추봉된 사람은 결코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피휘避諱 시스템에 대한 조그마한 이해만 있어도 정말로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이 같은 사람으로 본다면 찰주본기에 ‘이간伊干 용수龍樹’라는 표현이 등장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는 찰주본기에서 보무당당하게 ‘이간伊干 용수龍樹’라는 표현이 사용됐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낸다. 


용수龍樹는 결코 대왕大王에 추봉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용수龍樹는 명백히 용춘龍春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만천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용수龍樹가 대왕大王에 추봉되지 않았으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늘상 일운一云 혹은 일작一作과 같은 말을 연결고리로 삼아 그와 매양 나란히 언급되는 용춘龍春이야말로 바로 문흥대왕文興大王임을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찰주본기를 통한 용수龍樹-용춘龍春 문제에 대한 구명이 《화랑세기》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화랑세기》 전체를 통괄하면 둘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자 같은 지도知道를 어머니로 하는 동복同腹 형제다. 용수龍樹가 형이며, 용춘은 동생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견이 있어 벌써 《화랑세기》 자체에 용수龍樹의 출자出自를 헷갈리니, 13세 용춘공龍春公 傳에 이르기를 “公(龍春)의 형 용수龍樹 전군殿君은 동태자銅太子(동륜銅輪)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금태자金太子(금륜金輪)의 아들이라고도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면서 《전군열기殿君列記》를 인용해서는 “公은 곧 용수龍樹 갈문왕葛文王의 동생이다”는 언급을 덧붙였다. 그러고는 본문에서는 시종일관해서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을 동부동모同父同母 형제로 간주했다. 나아가 같은 용춘공龍春公 傳에 의하면, 어느 시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후맥락으로 미뤄 영수龍樹가 적어도 용춘龍春보다는 적어도 몇 년 이상 전에 먼저 죽어 아내 천명공주天明公主와 아들 춘추春秋를 용춘龍春에게 맡겼다고 기술한다. 이에 용춘龍春은 춘추春秋를 아들로 삼았다고 했다. 


Bronze Mirror from wooden pagoda Site, Hwangryongsa Temple, Gyeongju.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서 3점이 출토된 동경 중 톱니바퀴모양 문양이 있다 해서 거치문경(鋸齒文鏡)이라 일컫는 유물이다.지름 9.0㎝. 646년 목탑을 세울 때 사리공양품 중 하나로 안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작은 구리거울을 깨뜨리지 않은 채 통째로 넣었다. 이 매장 패턴은 동시대 무덤의 그것과 똑같다.



춘추春秋의 생부生父에 대해서는 같은 《화랑세기》 다른 곳에서도 혼돈스런 구석이 있으니, 용춘공春秋公 傳 세계世系에서는 “아버지는 용춘공龍春公이니 금륜왕金輪王의 아들이다”고 해서 마치 생물학적 아버지가 용춘인 것처럼 기술했다. 이를 종합한다면 춘추春秋에게 용수龍樹는 생부生父이며 용춘龍春은 숙부叔父로서 양부養父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미 《화랑세기》 자체에서 용수龍樹의 부계父系를 금륜金輪과 동륜銅輪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데다, 춘추春秋 또한 생부生父가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사이를 오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런 혼란을 정리할 수는 없을까? 나는 춘추春秋의 친부親父는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춘추春秋가 용춘龍春을 생부生父로 여기지 않았냐 하는 쪽에 강한 심증을 두고 싶다. 그 까닭은 춘추공龍春公 전에 나와 있듯이 용춘龍春이 태화太和 원년(647) 8월에 수壽 70으로 훙薨하니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그를 “갈문왕葛文王에 추존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양부養父가 생부 같다고 해도 생부生父를 제쳐두고 양부養父만을 갈문왕葛文王 혹은 대왕大王으로 추존하는 일이 있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는 그를 갈문왕으로 추봉하면서 바친 시호諡號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관련 기록을 검토할 때, 문흥文興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화랑세기》에서는 그를 갈문왕葛文王에 추봉했다 하거니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文興)大王이라 해서 차이를 보인다. 갈문왕葛文王와 대왕大王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아니면 필사 과정에서 현존 《화랑세기》가 모종의 착란錯亂을 빚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신문왕 조에 보이는 종묘宗廟 제문祭文을 볼 적에 적어도 신문왕神文王 시대에 용춘龍春은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존칭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Bronze Mirror from wooden pagoda Site, Hwangryongsa Temple, Gyeongju.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서 3점이 출토된 동경 중 사신경(四神鏡)이다. 지름 16.8㎝. 646년 목탑을 세울 때 사리공양품 중 하나로 안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심초석의 적심 중심부 사이에서 테두리가 삼등분되어 흩어진 채 수습됐으며 나머지는 낮은 위치에서 수습된 점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거울을 깨뜨리는 파경(破鏡)이 있었다고 보인다. 뉴좌에 사엽문을 배치하고 방격을 돌렸으며, 그 바깥에 사신을 부조했다. 주연(周緣)은 평연(平緣)으로 32자 명문, '靈山孕寶 神使觀爐 飛圓曉月 光淸夜珠 玉臺希世 紅粧應圖 千嬌集影 百福來扶'를 새겼다. 신선도교사상이 농후하다. 이와 유사한 거울은 중국 섬서성 서안 수묘(隋墓)에서도 출토됐는데 이 무덤에서는 수 대업(大業) 7년(611)이란 기년이 새겨진 유물과 함께 나와 좋은 비교자료가 된다. 파경한 모습과 동경을 부장하는 양상은 동시대 무덤의 그것과 똑같다. 왜? 탑은 부처님 무덤인 까닭이다.



용추龍樹-용춘龍春을 둘러싼 《화랑세기》 자체의 복잡다단한 혼란상이랄까 하는 양상을 볼 때, 우리는 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그들에 관한 기록에서 왜 반드시 두 표기가 일작一作이나 일운一云과 같은 말로써 매양 붙어다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해명할 수도 있다. 내가 주장하는 대로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화랑세기》가 편찬되던 시점에 벌써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은 서로의 행적이 오버랩되어서 누가 누구인지를 헷갈리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혼란상이 결국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까지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시금 지적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을 결코 같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여전히 둘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근현대 역사학자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화랑세기》가 홀연히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까지 고찰을 토대로 우리는 이제 다시 찰주본기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추단을 내리게 된다. 


645~646년 황룡사 목탑 완공 때 감군監君이 이간伊干 용수龍樹라는 언급은 착오임이 명백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 


《화랑세기》에서는 용춘龍春이 죽은 시점을 태화太和 원년元年(647) 8월이라고 못박기는 했지만, 그의 형 용수龍樹가 어느 시점에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할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사 목탑이 기공되고 완공된 645~646년 무렵에는 용수龍樹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전후 문맥으로 보아 용수龍樹는 용춘龍春보다는 적어도 몇 년 이상 전쯤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므로 이럴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Bronze Mirrors from wooden pagoda Site, Hwangryongsa Temple, Gyeongju.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아래서 3점이 출토됐다. 646년 목탑을 세울 때 안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리 공양품 중 하나다. 이들 거울은 문양에 따라 사신경(四神鏡.지름 16.8㎝.中), 거치문경(鋸齒文鏡.지름 9.0㎝.右), 무문경(無文鏡.지름 5.3㎝.左)으로 구분된다.



이로 볼 때 황룡사 목탑 공사에 총감독을 맡은 이는 용수龍樹가 아니라 용춘龍春이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왜 찰주본기는 용수와 용춘을 헷갈렸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화랑세기》 편찬 단계에서 벌써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은 행적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데 착안하면, 이런 착란錯簡이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느 날 느닷없이 주어진 《화랑세기》를 통해 어느 논자의 지적처럼 신라 당대의 기록이면서 왕실과 국가의 중차대重且大한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그 어떤 기록보다 정확성을 기했을 찰주본기의 오류, 혹은 오류 가능성까지 교정하게 된다. 그래서 《화랑세기》는 ‘괴물’이다. 


이른바 황룡사 구층목탑 진단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경주 황룡사지 구층목탑 기단부 지하에서 발견됐다. 진단구(鎭壇具)란 땅의 동티를 막기 위해 건축물 지하에 매설해 넣는다. 하지만 이는 불교신학을 전연 모르는 개소리라, 부처님한테 받치는 공양품이 무슨 진단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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