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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은행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던 김천 섬계서원

by taeshik.kim 202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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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서원 건축이 일대 붐을 이루면서 그 입지를 선택할 적에 키가 된 요소 중 하나로 나는 은행나무를 꼽는다. 성균관이건 서원이건 향교건 그 설립자 겸 재단 이사장은 불변인데 공자가 그 주인공이다. 《장자》에 보면 공자가 가르친 학교 혹은 학단을 행단杏壇이라 표현했다.


김천 섬계서원. 그 뒤편에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다. 천연기념물 300호다. 



이 행杏은 새김이 살구와 은행 두 가진데 조선에서는 은행으로 통일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함을 표방하는 모든 시설은 은행나무를 심어 표식을 삼았다.


그렇다면 은행나무가 없으면 어찌 할 것인가? 은행나무 근처에 학교를 세우면 된다. 경북 김천의 섬계서원이 바로 이런 곳이다.


섬계서원과 은행나무. 비석은 대원군 때 훼철되고서 세운 유허비다. 


저 은행나무는 수령 오백년을 상회하는 노거수다. 섬계서원은 그 역사가 고작 이백년이다. 답은 나왔다.

은행은 유교 건축에서 이리도 중요한데 아무도 그 심각성을 지적하지 아니한다.

(2015. 12. 20)

 

***

 

서원 입지를 선택할 적에 은행나무가 고리가 되었다는 보기다. 조선 순조 연간에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순절한 충의공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배향하고자 세운 섬계서원은 항용 서원 혹은 향교라면 보게 되는 그 전면 은행나무 두 그루가 없다. 

 

대신 본래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던 곳을 선택함으로써 그 필요성을 감쇄해 버렸다. 서원이 들어설 당시 이미 저 은행나무는 그때도 노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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