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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 讀史新論

관직과 관위, 중앙과 지방의 길항(拮抗) 삼국사기 제38권 잡지 제7(三國史記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직관 상(職官上) 서두에서는 신라 직관 체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개술한다. 신라는 벼슬 호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그 이름이 같지는 않다. 이에는 중국과 동이 명칭이 뒤섞였으니[唐夷相雜], 예컨대 시중(侍中)이나 낭중(郞中)과 같은 것은 모두 중국[唐]의 벼슬로 그 의미를 고찰할 수 있지만, 이벌찬(伊伐飡)이나 이찬(伊飡)과 같은 것은 모두 동이의 말로써 그렇게 이름하게 된 연유를 알 수가 없다. 처음 이들 벼슬을 두었을 때는 틀림없이 관직마다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위계에 따라 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 높음과 낮음을 변별하고 그 능력의 크고 낮음에 따라 대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문헌..
태胎를 찾아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4년 庚午(1570·선조 3) 3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임천(林川)에 임금님 태(胎)를 묻었다.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 조정 공론이 선대 전례에 따라 땅을 골라 태를 묻고자 하여 잠저(潛邸)에다가 태의 소재를 물어 그 동산 북편 숲 사이에서 찾아서는 그것을 묻을 곳을 가렸다. 강원도 춘천 땅에 묻으려고 산역(山役)을 거의 끝내고 정혈(正穴)을 살폈더니 그곳은 옛날 무덤이었다. 그래서 다시 황해도 강음(江陰 지금의 금천(金川))으로 옮겨 터를 닦으니 정혈 수십 보 밖에 작은 항아리가 묻힌 것을 발견해, 그곳도 옛날 무덤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이 “이는 정혈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단지 작은 항아리뿐이요 다른 ..
율곡이 말하는 면신례免新禮, 공무원 신참 신고식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卷之上 융경(隆慶) 3년 기사(己巳·1569·선조 2) 9월조에 보이는 기사 중 하나다. ○ (선조 임금이) 사관(四舘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에서 새로 과거에 합격하여 들어온 신진들에게 침학(侵虐·학대)하던 풍습을 혁파토록 명하셨다. 이이가 임금께 아뢰기를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는 비록 하루아침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나, 다만 교화(敎化)를 해치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을 사관(四舘)에서 ‘신래(新來·처음 온 사람이라는 뜻)’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침학(侵虐)하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대체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
숭배 대상으로서의 우물[泉 혹은 井] 우물에는 신령이 사는 곳이라 해서 신물로 존숭받은 흔적을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콕 집어 찾아 제시하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그 흔적 하나를 독서하다 우연히 발견해 소개한다. 조선 초기 문사文士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제3에는 그의 외할아버지 안공安公이 열두 고을 수령을 역임하면서 겪은 일화, 혹은 행한 일을 나열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순흥 안씨 안종약安從約이라, 고려 공민왕 5년, 1355년에 출생하여 여러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해주목사를 마지막으로 정계 은퇴해 은거하다가 세종 6년, 1424년에 향년 70세로 졸했다. 이에는 그가 지금의 충남 부여 일대에 설치된 임천林川군을 다스리던 때에 지방장관으로 행한 여러 행적 중 하나로 음사淫祠 철폐를 들었거니와..
고려 예종 외모는 옥동자? 송 선화(宣和) 5년, 고려 인종 원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은 인종을 직접 만나고는 그 결과 보고서로 송 조정에 제출한 에서 왕해(王楷), 곧 고려 16대 임금 예종을 일러 이렇게 묘사했다.眉宇疏秀。形短而貌豐。肉勝於骨。이를 한국고전번역원 역본(김주희, 1994)에서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고 옮겼다.이 문제는 자칫 사자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으니, 뜻을 확실히 하고자 몇 가지를 찾아봤다. 먼저 '미우(眉宇)가 소수(疏秀)하다' 했으니 이것부터 해결하자.'眉宇'는 글자 그대로는 눈썹의 지붕 혹은 처마라는 뜻이니, 여튼 이마 부분을 말한다. 이를 중문사전에서는 "眉额之间。面有眉额,犹屋有檐宇,故称。亦泛指容貌"라 했으니, 애초에는 얼굴 부분에서..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려와 고구려를 혼동했다 고려 태조 13년(930), 왕건은 고창(안동) 전투에서 견훤에 대승하면서 승기를 완전히 잡는다. 한데 이 사정을 전하는 기록이 심상치 않다. 이때 왕건은 지금의 경상도 중북부와 영동을 다 손아귀에 넣고 지금의 포항에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정리한 고구려 영토는 얼토당토않다. 영일현, 그러니깐 지금의 경북 포항까지,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고구려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택도 없는 소리다. 함에도 이런 택도 없는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나는 《삼국사기》가 고려와 고구려를 헷갈리는 바람에 저리 잘못 정리했다고 본다. 아래는 《고려사절요》 해당년 기록이다.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경북 청송 진보) 장군 선필(善弼)이 와서 ..
이성계의 장송의례와 수릉壽陵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
정다산의 중국환상 "중국은 문명이 발달해 아무리 외진 시골이나 먼 변두리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 사대문에서 몇 리만 떨어져도 아득한 태고적처럼 원시사회다. 하물며 멀고먼 시골은 어떠하랴? 무릇 사대부 집안은 벼슬길에 오르면 서둘러 산기슭에 셋집을 얻어살면서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혹시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재빨리 서울 근처에 살며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다. 원문을 대조하지 않고 누군가의 번역을 옮긴다. 원문이 없으니 대조가 불가능하다. 다산...요즘 태어났으면 재빨리 미국으로 날랐을듯.. 거기서 원정출산도 했을 듯 왜 중국이었을까?그것이 단순한 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