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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 讀史新論

왕건의 죽음과 이일역월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건대,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4일에 사망한다. 이틀 뒤에 발상(發喪)하고, 그 다음날 그의 시신은 빈전(殯殿)에 간다. 빈전은 궁궐 정전 혹은 편전이었을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했다. 빈(殯)을 마치고 그를 장사한 때가 같은 해 음력 6월 26일, 양력 7월 30일이다. 그의 무덤에는 현릉(顯陵)이라 했다. 이로써 본다면 왕건은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27일 만에 묻혔다. 나아가 왕건 기제(忌祭)는 매년 6월 1일이다. 이런 상장(喪葬)제도를 보건대, 고려는 이미 건국과 더불어 왕에 대해서는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일간 상장 의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장제를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말 ..
인덱스index vs 색인索引 vs 인득引得 인덱스index에 해당하는 말이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는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색인(索引)’이라는 말이 그 번역어로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말은 애초에 일본에서 인덱스에 대한 번역어로 만들어낸 말로써, 그것이 다시 한국과 중국으로도 침투해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한데 중국에서는 색인이라는 말 대신에 ‘인득(引得)’이라는 말도 더러 사용한다. 요새 학술계에서는 이 말이 서서히 대세를 장악해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데 인덱스에 해당하는 일본식 한자어 색인을 버리고 인득이라는 말을 쓰게 된 사유가 무척이나 재밌다. 引得이라는 말 역시 근대의 발명품인데, 이 말을 제안한 이는 안식년을 맞은 국내 교수들이 툭 하면 똥 폼 낸다고 싸질러 가는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발명품이다. 이 연구소에..
<한문 강좌> 使, 令으로서의 以 얼마 전에 나는 를 읽다가 그에서 나오는 다음 구절.... 唐明皇以諸王從學,命集賢院學士徐堅等討集故事,兼前世文詞,撰《初學記》。 을 예로 들면서 이 구절은 "당 명황(현종)이 제왕인 아들들에게 공부를 시키고자 할 요량으로 집현원학사인 서견 등에게 명하여 고사 모아서....초학기라는 책을 편찬케 했다"고 옮기면서 이 경우 以는 使나 令에 해당하는 사역 동사라고 말한 바 있다. 한데 각중에 과연 以가 이런 뜻으로 쓰인 경우가 있는지 추가로 조사해 보고픈 욕망이 있어 강희자전 등을 뒤졌더니 전한 말기에 유향이 편집한 《전국책战国策》卷三 진책秦策 一에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용한 다른 용례를 검출했다. 泠向謂秦王曰: 向欲以齊事王, 使攻宋也. 영향(泠向)이 진왕(秦王)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나라가 왕을 섬기게..
유배는 자비유학이다 유배 생활엔 돈이 엄청 나게 든다. 관에서 무상으로 집 임대하거나 먹을 것 대주는 일 따위 않는다. 유배는 자비 유학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무슨 돈으로 18년간이나 강진에서 생활한 거임? 첫째, 원래 부자다. 둘째, 큰아들 정학연이가 무허가 의사하면서 댔다. 셋째, 고액 과외 수업을 했다. 나는 세번째로 본다. 다산이 처음 강진 촌구석에 내려갔을 적에 어떻게 학생들을 모았을까? 서울대 출신 하버드 박사 기재부 과장 출신 이렇게 뻥을 쳤다고 본다. 입소문 났겠지. 족집게 선생 왔다고. 그 소문 진원지는 주막 여인이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반대해 무산된 일부일처제 한국처럼 강고하면서 억압적인 신분제 나는 유사 이래 본 적이 없다. 능력이 아니라 피로써 그 사람 생평을 절단낸 가족제도로 한국사만큼 엄혹한 데가 없다. 능력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고한 일부일처제를 혁파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일부일처제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신분 문제는 일부일처제에서 비롯한다. 한데 내가 알기로 이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폐기하고자 한 심각한 움직임이 전근대에 딱 한번 있었다. 고려시대 원간섭기였다. 이를 당시 힘께나 쓰는 어떤 관료가 원나라 제도 관습을 들어 그 혁파를 과감히 주창하고 나섰다. 누가 반대했겠는가? 당시 재상 마누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정식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첩하고 내가 동급이라니? 이를 전하는 기록을 보면 당시 재상..
동물의 대량 유입과 고려시대 고려가 좀 독특한 면이 있어 지들은 요遼나 금金에서 책봉을 받았지만, 그 내부에서는 또 하나의 조공책봉 체계를 유지했으니, 탐라 울릉도, 그리고 금 건국 이전 여진에 대해서는 시종일관해서 종주국을 자처했다. 종주국이 일방적인 공물의 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쪽에서 하나를 가져오면 두 개를 줘야 하는 것이 조공 책봉 체계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요 금에 대해 조공하니, 중국 대륙 남쪽 송宋과의 관계가 참말로 오묘하다. 이게 조공 책봉 관계도 아니면서 긴 것 같은 묘한 관계. 양국 국교는 나중에야 성립하는데, 송이건 고려건 북쪽 요를 의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송 역시 요에 신속臣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송과 고려 교유는 비외교의 관계가 훨씬 더 활발한 이상한 시스템이 정착한다. 줄기차게 송나..
일본서기와 노동신문 이 이야기도 내가 늘쌍 하는 말이다. 일본서기가 대표하는 고대 일본이 하는 논법은 작금 북한의 행태와 같다. 일본서기 이래 저들의 각종 기록을 보면 한반도 모든 사신 행차는 목적이 조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든 사절을 조공사로 표현한다.하도 저리 뻥을 쳐놓으니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역사연구자가 의외로 많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작금 북한이 하는 꼴과 같다. 저들의 눈에는 모든 외교사절이 그들에 대한 조공 행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특사 방문도 저들을 알현하러 온 조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개뿔도 없으면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한다.북한이 땡깡부릴수록 인근 국가의 사신 행렬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어찌 이것이 조공 행렬이리오?일본서기는 지금의 북한 노동신문에 지..
내가 다 풀어주면, 새로운 왕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매양 史를 읽을 적마다 고려 성종이 죽음에 임해 취한 행동을 보고는 찬탄을 거듭해 마지 않으면서 지도자는 자고로 이러해야 한다는 전범으로 삼는다. 그의 죽음에 즈음한 고려사절요 언급이다. (997년)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송(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는 내천왕사(內天王寺)로 옮겨갔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했다.“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이를 사람은 무엇으로 새로운 은전을 펼 수 있으랴"그러고는 허락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왕이 병들면 죄수를 사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복을 구하고자 하는 관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