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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기자? 기뤠기?

1박4일 키르기스스탄 출장 *** 2009.09.21 19:33:46 지금은 사라진 내 과거 블로그 글이다. 이 시점을 염두에 두어야 아래 문서를 해독한다. 1박4일. 나는 이런 표현이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허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불행이라면 그 체험 당사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하는 고구려 고분벽화 해외 순회전 일환으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행사가 개막하기는 지난 15일. 장소는 이곳 수도 비슈케크이며, 더욱 정확히는 그곳 Fineart Museum이라는 곳이었다. 그 취재를 위해 한국에서는 나와 kbs 취재진 3명의 도합 4명이 현지로 갔다.(취재진만 말함) 비슈케크까지 직항로는 아직 개설되지 않은 까닭에 대체로 키르기스스탄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즈..
내무부 주사 학력고사가 끝났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택할지 하는 문제가 남았거니와, 일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난 스스럼없이 Y대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했으니, 이는 중3때인가 작은 경험에서 비롯하거니와, 이 얘기를 새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아니하다. 까막눈이요, 대입 제도를 비롯한 교육제도에는 전연 더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은 생평 그런 내색한 적 한 번 없으나, 내가 서울로 가겠다 했을 적에 적지 않이 당황했으리라 본다. 공부하라 그리 닥달하고, 특히 엄마는 때론 부지껭이로 아들을 두들겨 팼으니, 그런 아들이 서울로 유학한다 선언했을 적에,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쳤을 것이로대, 모르긴 해도 엄마 아버지 두 분은 이 난관을 어찌 돌파하느냐 하는 문제로 골을 싸맸을 것임이 불문해도 ..
서기 2000년, 부여는 거대한 공사판이었다 부여 궁남지 인근 야트막한 언덕인 화지산이 연차 발굴을 통해 백제시대 녹록치 않은 흔적을 연이어 쏟아낸다. 이 화지산, 여차하면 다 날릴 뻔했다. 자칫하면 전체가 계백결사대공원과 조각공원이 될 뻔 했다.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단을 소개한다. 2000.07.30 07:00:05 파괴일로의 백제 고도 부여 (부여=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폭염이 계속된 28일 공주를 떠나 차로 부여읍에 들어서자 읍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대로 중 오른쪽 편 주택가 숲 위로 무엇인가 거대한 철구조물 1개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현지 주민에게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아파트 공사장이라고 했다. 공사장 입구로는 건축자재와 공사장 폐기물을 실어나르는 육중한 트럭이..
단행본으로 정리한 <쉿! 우리동네> 시리즈 이야기 숨어 있는 역사와 문화를 찾다…'쉿! 우리동네' 출간송고시간 | 2019-07-12 09:00 우리공장 출판부에서 우리 공장 기획시리즈 '쉿! 우리동네 이야기'를 엮어 단행본으로 냈다. 이 시리즈에 내가 직접 관여했음은 여러번 말한 적 있거니와, 그래서 그 출간이 나로서는 그 어떤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판에 박힌 듯하지만, 추천사를 받았는데, 출판부에서는 그 유명한 야부리꾼 유모씨 얘기를 해서 내가 단칼에 내리치고는 저 두 사람으로 갔다. 현직 문화재청장과 현직 국립박물관장이면 됐을 성 싶었다. 초창기 내가 기획하고, 내가 총감독을 했지만, 보다시피 내 이름은 없다!!!! 쫌 넣어주지 ㅋㅋㅋㅋ 출판부가 고생했고, 다른 무엇보다 일선 취재기자들 노고가 만만찮았다. 분량 문제 등등을 고려해 출판부에서 개..
영종도 다이하드 프로펠러 사건 사진은 프랑크푸르트인가 출발한 벵기가 영종도 공항에 착륙하기 전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촬영시점은 2015년 7월 6일 아니면 그 이튿날이었다. 이 사진을 나는 7월 7일자 내 페이스북 계정에 다음과 같이 게재했다. 나는 독일 본에서 막 끝난 그해 제39차인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현지 취재를 끝내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당초 예고한 대로 무난히 세계유산에 등재됐으니 문제는 일본이 신청한 메지지시대 산업혁명 유산군이었다. 그 산업혁명 유산군 중 7곳인가가 조선인 강제징용 비극의 현장이지만 일본 정부는 그런 사실은 일부러 누락한 채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는 바람에 그 등재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관계에 파란이 일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당초 예정한 출장기간도 하루 늘어나는 소동이 빚어졌으니,..
매장문화재가 장의사였던 시절, 埋葬과 埋藏 사이 오늘 현재 전국에 걸쳐 100곳 이상을 헤아리는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그 등장 초창기에는 매장문화재연구원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으니, 1994년 8월 5일, 그 시초를 알리며 출범한 기관 역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었다. 이 연구원은 결국 1999년 9월 9일, 이름을 영남문화재연구원으로 바꾸는데, 가장 중요한 차이라면 '매장'이라는 말을 뺀 것이다. 이 매장을 애초 '埋葬'이라 했는지, 혹은 '埋藏'이라 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그네들이 표방한 목적을 본다면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매장'이라는 말이 사회에 통용하는 가치다. 고고학계를 벗어난 데서는 모두가 전자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시체를 묻는 일을 하는 곳이라 인식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
넌 농촌 출신이라 데모꾼이라 해서... Taeshik Kim June 11, 2017 언젠가 이런 말을 쓴 적 있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혁명을 못 한다고. 이는 실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찢어지리만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인 나는 천성이 그러했다. 한데 세상이 참말로 웃기게도, 세상은 나를 그리 보지 않더라. 나는 1993년 1월1일자로 지금의 연합뉴스 전신인 연합통신 기자로 공채 입사했다. 연합뉴스는 지금도 그러한데 그때도 기자직을 서울주재 기자와 지방주재 기자, 그리고 사진기자 세 부류로 나누어 선발했다. 내가 합격한 그해엔 지방기자직은 없었고, 서울주재와 사진기자만을 뽑았다. 결과 10명이 기자직으로 합격했으니, 개중 2명은 사진기자였다. 서울주재 펜대 기자직 8명 중 나를 포함한 2명은 느닷없이 지방주재로 발령나, 나는 부산지사로 가..
뉘였다가 세운 부여 군수리절터 목탑 중심기둥 아래 전문 인용하는 기사에서도 드러나고, 내 기억에도 분명 송의정 소장 시절이었다. 철두철미 박물관맨인 송의정이 윤형원 등과 더불어 인사교류 명목으로 2년인가 잠시 문화재청으로 파견나가 근무한 적이 있으니, 여담이나 이때 재미를 붙인 윤형원은 이후 한 번 더 문화재청 근무를 자청해 해양연구소에서 과장 2년인가 해 묵고 부여박물관장으로 튀었다. 애니웨이, 송의정 소장 시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역점으로 벌인 발굴사업이 부여 군수리절터였다. 2005년 6월 14일자 내 기사가 이를 예고했으니,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 70년만에 재발굴1935-1936년 조선총독부 조사 이후 처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 마지막 도읍 부여에 위치한 그 시대 절터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