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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긴급편성] 겨울 시베리아 횡단철도 신동훈(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우리 연구실이 진행하는 해외 협력연구에는 얼마 전까지 연재한 인도에서의 연구가 있고, 또 하나는 러시아. 구체적으로는 서(西)시베리아 지역에서 진행하는 연구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Tyumen 지역에 위치한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분원 (Siberian Branch, Russian Academy of Sciences) 산하 북방문제연구소(Institute of the problems of Nort..
[예고] 개간, 산림 파괴, 말라리아 산림이 황폐화 한 1903년 서울 무악재1월 24일 부터 "개간, 산림 파괴, 말라리아" 연재를 시작합니다 (월/목요일). 조선시대 후기 한반도 국가는 격렬한 변화를 시작합니다. 영토 방방곡곡 빈틈이 없을 정도로 개간이 이루어지고 산에 나무는 모두 벌목되고 그 자리에는 화전이 들어섭니다. 이전에는 그다지 많지 않던 논이 전체 농경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급히 높아집니다. 한반도 전체는 사람과 농경지가 가득찬 모양으로 바뀌어 갑니다.&..
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과 도래계(渡來系) 야요이인(弥生人) (3)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조몬인 (왼쪽)과 야요이인 (오른쪽) 골격. 조몬인보다 야요이인이 평균 신장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은 우리 연구실 오창석 박사. 그렇다면 조몬인과 야요이인 인골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서로 다른 종족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일까? 도이가하마 유적 인골로 대표되는 도래계 야요이인 인골은 특징이 다음과 같다. 1..
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과 도래계(渡來系) 야요이인(弥生人) (2)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박물관 야외에 마련되어 있는 돔 구조물. 내부에 발굴 현장이 보존되어 있다. 돔 내부로 들어가는 길. 원래 모래 언덕이었다고 한다. 발굴된 도이가하마 유적 전경 디오라마. 야요이시대 묘지였던 유적 전체 넓이는 동서 약 260미터, 남북 약 70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그 중 일부만 발굴된 상태라고 한다. 발굴된 구역 중에서도 일부에 돔을 만들어 내부를 보존한다. (at 도이가하마 인류학 박물관)..
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과 도래계(渡來系) 야요이인(弥生人) (1)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지난 주말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県)에서 "일본고병리연구회(日本古病病理硏究會) 정기학회"가 있어 다녀왔다. 우리나라도 옛 질병을 연구하는 고병리학자들의 모임인 "한국고병리연구회"가 있는데 비슷한 조직이 일본에도 있다. 고병리라는 연구 분야는 유럽과 북남미를 중심으로 상당한 숫자의 연구자가 활동하는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는 그 숫자가 아직 미미하기만 하다. 우리처럼 일본도 아직 소수 ..
[예고] 짧은 스핀오프: 도이가하마 유적과 도래계 야요이인 원래 "개간과 산림남벌 그리고 말라리아"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려 했습니다만, 짧은 스핀오프를 그 전에 하나 쓰고 넘어가려 합니다. 일본에는 야마구치현에  도이가하마 유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대륙계 야요이인" 인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으로 매우 유명한데,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다음 주 2회 정도, 도이가하마 유적과 야요이인의 일본도래에 대한 짧은 스핀오프를 하나 남기고자 합니다.&nb..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8)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서울시내 발굴현장 기생충 연구는 내게 있어 각별한 의미가 있다. 내가 50대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겪은 여러 연구 중에 이는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 사례에 해당한다. 이런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고, 결과를 역사적 시각에서 해석한 경우도 많지 않다. 나로서 본다면 고기생충학 연구가 단순한 의학사적 관심사를 넘어 과거 우리 조상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7)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앞에서 서울 시내에 홍수가 잦았으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가 하면 장마피해로 종각의 종이 토사로 한길 정도 묻힐 정도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한양성의 홍수피해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기호철, 배재훈 선생이 찾아 낸 당시 기록의 편린을 가지고 지도에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에서 A, B, C, D는 우리가 기생충 샘플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