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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사전

왕승달(王僧達. 423~458) 南朝 宋의 大臣으로 지금의 山東에 속하는 낭야(琅邪)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대대로 大族이며, 臨川王 劉義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詩文을 잘 지어 당시에 자못 文名이 높았다. 나중에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의 후군참군(後軍參軍)이 되었으며 의성태수(宣城太守)를 역임했다. 성격이 유렵(遊獵)을 좋아해 말을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3~5일 동안 귀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사냥하는 곳에서 사송(辭訟) 문서를 다루는 일도 있었다. 그때 太子 유구(劉劬)가 작란(作亂)하자 심양(尋陽)으로 도망쳤다. 뒤에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에 가작되었다. 왕승달은 사람됨이 자만심이 심해 재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군태수(吳郡太守)에 제수되어 외관으로 나갔다..
《영락대전(永樂大典)》 永樂大典考(영락대전고) 출전 : 이혜은, ‘永樂大典考’, 《도서관》 2002년 겨울호( 제57권 제4호. )를 요약 발췌함 1. 편찬과정과 구성 明 成祖(永樂帝)는 建文帝의 자리를 빼앗자 문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永樂 元年(1403) 7月1日 翰林院 學士들에게 고금을 통한 經史子集 百家의 書와 天文, 地理, 陰陽, 醫, 卜, 雜技에 이르기까지 모두 망라하여 分類 편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翰林學士 解縉이 總載가 되었고 여기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147명이었다. 永樂 2年(1404) 11月에 책이 완성되자 『文獻大成』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文獻大成』이 간략하다 생각하여 重修를 명하였다. 永樂 3年(1405) 南京의 文淵閣에 편찬 본부를 설치하고 姚廣孝를 總載로 임명하고 解縉 등이 편찬업무를..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와 탕구(湯球) 편《십육국춘추집보(十六國春秋輯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중국사에서 저명한 혼란기로 꼽히는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이룩한 16국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양식으로 다룬 사서(史書)로써, 그 혼란기를 수습한 북위(北魏) 왕조 때의 최홍(崔鴻)이란 사람이 찬자(撰者)이다. 최홍은 동청(東淸) 하현(河縣) 사람이니 이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평원(平原) 서남쪽에 해당한다. 최광(崔光)의 종자(從子)이며, 청년 시절에 이미 수사(修史)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서진(西晉)이 망하고 그 왕실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동진(東晉) 왕조를 건국하자 중원 지역에서는 흉노족(匈奴族)의 유연(劉淵)․갈족(羯族)의 석륵(石勒)․선비족(鮮卑族)인 모용괴(慕容廆)․저족(氐族)인 부견(苻堅) 등이 각축하면서 다투어 왕조를 세우니 이를 역사에서는 16..
《상서대전(尙書大傳)》 《尙書大傳》은 전한(前漢) 초기 금문상서가(今文尙書家)인 복생(伏生)의 제자들인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 등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들이 각자 들은 내용을 기록하고 기억을 덧보태어 이룩된 상서(尙書), 즉, 서경(書經)의 해설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상서대전을 전형적인 주소(注疏) 류로 보기는 힘들다. 전형적인 注疏라면 본문격인 尙書 구절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체제를 보이겠으나, 물론 그런 곳도 없지 않으나, 문장의 대의(大義)를 설명하는 곳이 많다. 따라서 체례(體例)는 《한시외전》(韓詩外傳)․《춘추번로》(春秋繁露) 등과 비슷하다. 《尙書大傳》 중 홍범(洪範) 約五十傳을 보면 首尾가 完備해 위후(緯候) 說의 선구를 이룬다. 상서대전에는 허다한 해설이 今文尙書 29편의 범주에서 나온다. 《尙書..
《초학기(初學記)》 먼저 내가 이용하는 판본은 《初學記》(上․下) , 中華書局과 《初學記索引》, 中華書局 許逸民 編임을 유념하라. 初學記는 명칭이 시사하듯이 공부하는 초보자들을 위한 책인데, 당 현종 이륭기의 명을 받들어 광록대부(光祿大夫)이며 행우산기상시(行右散騎常侍)이며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이며 부지원사(副知院事)이며 동해군개국공(東海郡開國公)인 서견(徐堅) 등이 봉칙찬(奉勅撰)해서 천자에게 받친 것이다. 성격별로 분류하자면, 유서(類書), 즉, 분류학 사전이다. 이보다 앞서 나온 비슷한 성격의 문헌으로는 저 유명한 예문유취(藝文類聚)가 있다. 예문유취야 그 분량과 그것이 커버하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니, 이로써는 初學을 위한 교재가 되기는 힘들었다. 이에 현종은 皇子, 즉 자기 아들들을 위한 시문 교육용 교재 편찬을..
공후(箜篌) “空侯”(공후) 또는 “坎侯”(감후)라고도 표기한다. 고대의 撥弦 악기 중 하나로 分臥式과 豎式 두 종류가 있다. 臥箜篌는 전하기를 漢 武帝 때 樂人인 侯調가 제작했다고 한다. 唐代 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漢武帝가 使 樂人侯調하여 所造케 하고는 以祀太一하게 했다. 或云하기를 侯暉가 所作한 것은 其聲이 坎坎 應節하여 謂之하기를 坎侯했다. 聲이 訛하여 爲 箜篌했다, 篌란 樂工人의 姓에서 말미암았을 뿐이다”고 했다. 나아가 《통전》은 “舊說一依琴制. 今按其形, 似瑟而小, 七弦, 用撥彈之如琵琶也”라고 했다. 豎箜篌는 豎琴의 前身으로서 後漢 時에 西域을 거쳐 中原에 들어왔다. 다시 《通典》에 근거할 때 “豎箜篌는 胡樂也라, 漢 靈帝가 好之하여, 體는 曲하지만 長하며, 二十二 弦이 있고, 懷中에..
강적(羌笛) 고대 羌族의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吹管 악기의 일종으로 강관(羌管)이라고도 한다. 그 역사는 유구해 漢代 이래 역사문헌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漢武帝時에 丘仲이 笛을 作하니 그 후에 또 강적(羌笛)이 있었다”고 했다. 陳暘의 《樂書》에는 또 이르기를 “羌笛은 구멍이 다섯이다. 馬融이 賦笛에서 이르기를 羌中에서 왔으며 舊制에는 구멍이 4개였을 뿐이다. 京房에서는 구멍 하나를 더하니 그리하여 五音을 갖춘다”고 했다. 隋․唐에서 宋․元․明 各代에 이르기까지 강적은 文人의 詩文에서 자주 보인다. 王之渙의 《涼州詞》에 이르기를 “羌笛何須怨楊柳, 春風不度玉門關”라고 했으며. 範仲淹은 《漁家傲》에서 읊기를 “羌管悠悠霜滿地, 人不寐, 將軍白發征夫淚”라고 했다. 羌笛은 油..
삼도(三都) 東漢 시대에 “三都”란 東都인 낙양(雒陽. 지금의 洛陽市 東北), 西都인 장안(長安), 南都인 宛(河南 南陽市)을 지칭한다. 晉나라 때 左思가 읊은 《삼도부三都賦》의 “三都”란 삼국시대 蜀都인 성도(成都) 吳都인 건업(建業. 南京), 魏都인 업(鄴. 河北 臨漳縣 西南 鄴鎭 동쪽 1.5㎞)을 말한다. 唐代에 “三都”란 東都 洛陽, 北都 진양(晉陽. 太原市), 京都인 長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