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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285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3대 새빨간 거짓말 1. 가난해서 송곳 꽂을 땅도 없고 일단사일표음한다. (문집 간행할 정도면 요즘으로 따지면 100억 이상 자산가는 됨) 2. 벼슬에 뜻이 없다. (문집에 낙방한 과거시험 답안지 수두룩) 3. 병에 시달려 다 죽은 몸이다. (서른 즈음부터 그래 놓고 90까지 사는 경우가 많음) By 기호철 2019. 12. 11.
2x9는 부추 둘 부추[韭子] 김우급(金友伋, 1574~1643) ​ 푸른 머리털 이슬비에 젖으니조석으로 잘라도 아직 남았네사람마다 열여덟 반찬 먹으니이 상서를 비웃지는 마시구려 翠髮和煙雨, 昏朝剪更餘. 人皆十八食, 莫笑李尚書 [해설] 제목 ‘구자韭子’는 ‘부추[韭菜]의 씨앗’을 이르지만, 시 내용으로 보면 ‘부추[韭菜]’ 그 자체를 읊은 것이다. 3행의 열여덟 반찬은 부추를 이르는 말이고 4행의 이 상서李尚書는 후위後魏의 명신 이숭李崇(455~525)이다. 이숭은 상서령 의동삼사尚書令儀同三司를 지냈고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압도하여 수천 명을 부렸는데도 성품이 대단한 구두쇠여서 너절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는데, 끼니에 언제나 고기도 없이 부추 나물과 부추 절임만을 먹었다. 이숭 문객인 이원우李元祐가 어떤 이에게 “이.. 2019. 12. 8.
동전 강제화 정책을 노래한 김우급의 시 동전을 사용하려고 먼저 시험 삼아 녹봉으로 나누어줌[用錢先試頒祿]김우급金友伋(1574~1643) 듣자니 조정에서는 동전 사용하려고백관에게 유달리 많이도 반사하다네지팡이 짚고 나가도 돈 한 푼이 없어나부끼는 주막 깃발도 자주 못보거늘 聞說朝廷用青銅, 百官頒賜也獨豐. 扶杖出門無一貫, 不堪頻望酒旗風. [해설] 동전을 유통 보급하기 위한 화폐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633년(인조 11)에 조선통보朝鮮通寶를 법화法貨로 주조, 유통하기로 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를 본떠 만들었는데 세종조에 주조, 유통하던 조선통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로 주조하였다. 이 동전은 서울의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34년에는 안동·대구·개성 등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인물.. 2019. 11. 30.
표절 팩트 폭격, 시구를 훔쳤나 안 훔쳤나? 중국 송나라 시승詩僧 혜숭惠崇이 하수는 산세에 나뉘어 끊어지고 봄은 불탄 자리에 들어 푸르네 河分岡勢斷 春入燒痕靑 라는 시구를 유난히 자부하였다. 혜숭의 사제師弟가 평소 표절을 일삼는 혜숭을 조롱하여 시를 짓기를 하수는 산세에 나뉘어 끊어진다는 것은 사공서의 시구이고 봄은 불탄 자리에 들어 푸르다는 것은 유장경의 시구로다 사형이 옛 시를 많이 범한 것이 아니라 고인의 언어가 사형과 유사할 뿐이라네. 河分岡勢司空曙 春入燒痕劉長卿 不是師兄多犯古 古人言語似師兄 라고 하였다. *** 이상은 기호철 선생 페이스북 2019. 11. 24 글인데 옮겨온다. 사공서司空曙(720~790)는 당대 시인으로, 字를 문명文明 혹은 문초文初라 했다. 유장경劉長卿 역시 당나라 때 시인으로 생몰년을 모른다. 字는 문방文房이라 했다.. 2019. 11. 25.
서정주〈비나리는 밤〉(1934) 비나리는 밤 徐廷柱 이러케 비가 나려쌋는 밤杜鵑이는 어느 골작에서 노래를 부릅니까.해지기 전 내 회파람으로서 궁장을 마추엇든그 이름 모를 山새들은 또 어데가 잇습니까.하늘의 별들은모조리 죽어버렷습니다.念佛외우든 老僧이 잠든지 오래고처마 끝에 풍경이 뎅그랑 우는 이 밤― 어머니여 기인 이 밤을 어찌하오리까.당신은 머언 옛날옛이얘기 들려주며 아들을 재웟지요그러면 오늘 밤도 아들은어머니 이얘기 듣겟습니다.당신은 지금 아득한 山들을 넘어서비나리는 이 밤을 내 숲속으로 날러오시겟습니까?(雲門庵) *** 이 시는 미당 시 중에서는 공간한 작품으로는 발표 연대가 가장 빠른 것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2019. 11. 23.
사극의 어전회의와 역사의 어전회의 임금이 집무실인 편전에서 신하들과 만날 때 신하들이 좌우로 늘어서거나 이열종대로 엎드린 장면이 자주 노출된다. 그러나 그렇게 서는 경우는 없다. 어떤 종류의 모임이냐에 따라 자리 배치가 정해져 있고, 품계에 따라 나아갈 수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특히 정3품 미만은 편전 출입문 쪽 기둥을 넘어갈 수 없었다. (첨부한 창덕궁 선정전 사진의 왼쪽 두 기둥이 그것이다.) 다만 시종신은 예외였다. 조선이라는 사회 의전이 오늘날 의전만 못했다고 보면 안 된다. 201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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