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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285

숙종이 꿈꾼 경복궁 복원 임진왜란에 불탄 경복궁을 고종 때 중건하였지만, 이전부터 중건 계획이 있었다. 숙종의 중건 계획이 막연히 중건해야 한다는 당위성이었다면, 영조는 이를 구체화해서 원래 모습을 연구하고 실제 설계도면도 만들었다. 그러나 영조는 국력을 쏟아부어 중건하려고 않고 건물을 하나씩 복원하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연구가 안 되었지만, 조만간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숙종의 중건 계획이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다만 그의 시를 통해 그 일단은 알 수 있다. 〈경복궁을 바라보며[望景福宮]〉 저 울창한 솔숲이 온통 법궁이었거늘 欝彼松林是法宮 오색 상서로운 구름 속에 짙푸르도다 葱蘢瑞色五雲中 언제쯤이면 중수하려는 계획 완수하여 何時得遂重修計 근정전 높이 올라 백관을 인견하려나 勤政高臨引百工 .. 2022. 7. 14.
〈매미에 대한 설 갑진년〔蟬說〕〉 by 鹿門 임성주任聖周(1711~1788) 새벽 6시가 넘어 잠들어 매미 소리에 깨었다. 나가야 하는데 멍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가 남긴 〈매미에 대한 설[蟬說]〉이 떠올랐다. 나는 전근대 시대 글을 볼 때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이나 인연으로 퉁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과학적 태도가 마땅치 못하다. 매미 소리는 입에서 나지 않고 등에서 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원인을 달리 분석할 수는 없었을까? 《녹문집(鹿門集)》 권21에 수록되었는데,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을 그대로 소개한다. 〈매미에 대한 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蟬說 甲辰〕〉 매미가 우는데 소리가 등에서 나온다. 무릇 천하에 소리를 내는 동물은 모두 입으로 소리를 내는데, 매미만 등에서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데도.. 2022. 7. 14.
〈죽은 고양이를 묻으며[埋死猫]〉 by 조선 숙종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어서 사람을 시켜 잘 싸서 묻어주게 했으니, 귀한 기르던 동물이라서가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는[戀主] 것이 예뻐서였다. 《예기(禮記)》에 “해진 일산을 버리지 않는 것은 개를 묻기 위함이다.[敝盖不棄 爲埋狗也]” 라고 하고 그 주석에 “개와 말은 모두 사람에게 공로가 있으므로 특별히 감사함을 보이는 것이다.[狗馬皆有力於人 故特示恩也]”고 하였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공로는 없더라도 기르던 동물로서 주인을 사랑할[戀主] 줄 알기에 싸서 묻어주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당연하다. 予之畜猫死, 使人裹而埋之, 非貴畜物也, 愛其戀主也。 《記》曰:“敝盖不棄, 爲埋狗也。” 註曰:“狗馬皆有力於人, 故特示恩也。” 猫雖無有力於人, 畜物能知戀主, 埋之以布, 非過也宜也。 숙종이 금손이라는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 2022. 7. 8.
영조 어제시 한북문漢北門 한북문漢北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대계를 정하고서 為國為民定大計 정묘년 10월에 탕춘대에 행차했다오. 丁卯孟冬幸蕩春 도성과 북한성은 마치 기각지세인데 都城北漢如掎角 가운데 새로운 금성탕지 하나가 있소. 中有一座金湯新 그 서북쪽 모서리에 성 문루가 있거니 西北角上有標樓 수문이라 하던 것 한북문이라 명명했소. 古稱水門名漢北 지나간 세월에 그 얼마나 행차했던가 向歲重光其幾行 오늘 올라 보면서 먼 옛일 추억하노라. 今日登覽遥憶昔 옛적에 상신이 보장의 땅으로 삼으려고 粵昔相臣為保障 한 움큼 정성으로 북한산성을 쌓았었지. 一掬忱誠城漢北 내가 스무 살 오위의 반열에 있었을 때 予在卄歲五衛列 호가하여 이곳에 와서 자세히 보았다오. 扈駕到此仔細看 북쪽에는 산성이 있고 남쪽은 한양도성 北有山城南漢都 탕춘대 요충지를 어찌 소.. 2022. 7. 4.
옛사람이 인식한 꽃의 의미 송(宋)나라 증단백(曾端伯)의 화중십우(花中十友)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난(蘭)은 방우(芳友), 매(梅)는 청우(清友), 납매(臘梅)는 기우(奇友), 서향(瑞香)은 수우(殊友), 연(蓮)은 정우(淨友), 담복(薝蔔 치자)은 선우(禪友), 국(菊)은 가우(佳友), 암계(巖桂 목서)는 선우(仙友), 해당(海棠)은 명우(名友), 도미(荼䕷 찔레)는 운우(韻友)이다. 《花木鳥獸集類 卷上 花》 2022. 7. 3.
세검정洗劍亭, 그 내력 [세검정] 세검정은 인조반정 후 칼을 씻어서 세검정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록을 추적하면 영조 때 총융청을 신영동으로 이설할 즈음 지은 것이다. 일부 연구자 가운데 그 이전 기록에 세검정이 보인다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그 세검정은 함경도 삼수군(三水郡)의 세검정이다. 영조 때 여항문인 김상채(金尙彩)는 《창암집 蒼巖集》 권2 〈세검정〉 시에서 “정묘년(1747, 영조23)에 총융청을 탕춘대 뒤로 옮겨 세우고 무진년(1748)에 새로 정자를 지었다.[丁卯 摠廳移建于蕩春臺後 戊辰新構亭也]” 고 하였으니 1748년(영조 24)에 지어졌다. 영조는 신미년(1751, 영조27) 7월 17일 비를 맞으며 세검정에 올라 시를 한 수 지어 이곳에 걸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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