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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285

오도일吳道이 기생 추향秋香의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오도일(吳道一, 1645~1703), 기생 추향(秋香)의 손녀 추성개(秋聲介)와 현손녀 가련(可憐)에게 준 시] 명기(名妓)는 손녀와 현손녀까지도 칭송하고 사후 1백여 년 이상 지났어도 문사들이 성묘를 했었다.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은 1702년 여름 장성으로 귀양을 와서 7개월 만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장성에 유배 중에 남긴 시문을 모은 것이 〈오산록(鰲山錄)〉으로 그의 문집인 《서파집(西坡集)》 권8에 수록됐다. 그는 장성의 명기 추향의 손녀와 현손녀를 만나 시 두 수를 남겼다. 시는 아름답게만 그려졌는데, 실상은 심했던 듯하다. 《숙종실록》 29년 2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오도일(吳道一)이 장성(長城) 배소(配所)에서 죽었는데 59세였다. 오도일은 본래 방탕하고 몸을.. 2021. 12. 4.
里와 호구戶口 조선후기 리里는 도대체 몇 호가 기준이었을까? 오늘날 장성 황룡면 아곡리는 《세조실록》에는 소곡리小谷里로 나오고 조선후기에도 오래도록 소곡리였다가 정조 연간에 소곡리와 북문리, 하남리 셋으로 나뉘었다. 북문리는 암탉골이라는 곳으로 탁곡卓谷으로 표기했는데, 아곡리 자동차캠핑장 주차장에 사창社倉이 만들어지고 그 북문 쪽이라고 하여 북문리가 되어 '북너메'로 불린다. 하남리는 우리집 하남정사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하남정사와 아래 작은집 입재立齋-나중에는 성재省齋로 바뀜-를 이르는 마을이름이다. 호제노호(戶第奴戶)까지 포함해도 모두 6집 정도인데, 하나의 리가 된다. 도통 알 수가 없다. 사진은 1789년 《호구총수 戶口總數》 다. 2021. 11. 30.
진상품, 힘 있는 고을이 만만한 이웃에 떠넘긴 고역 진상품을 지역 특산물이라고 홍보하는 자치단체가 허다하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그런 소리 못한다. 진상품은 힘없는 동네의 설움일 뿐 특산물과는 상관이 없다. 각 고을에서는 월령月令 진공품이 정해져 있어서 매달 이를 진상해야 했다. 힘 있는 고을은 쉽게 구하고 변질될 우려도 없는 쌀 따위를 바치는 것이고 힘 없는 고을은 변질되기 쉽고 구하기도 어려운 것을 바쳐야 했다. 심지어는 바다를 끼지 않은 산군山郡 진상품에 조기도 있었다. 고향 장성이 오늘날은 폐기물처리업체 따위만 가져오지만, 조선 시대에는 힘이 엄청 세서 진공품을 하나하나 이웃 고을에 떠넘겼는데, 헌종 때에 이르면 죽력을 만드는 청대죽靑大竹 25개와 2년마다 생록生鹿 1마리만 바치면 되었다.-저 청대죽도 얼마 뒤에 담양에 토스했다. 나주나 담양을 보.. 2021. 11. 30.
한 [보지락] 내린 비 한자로는 일려一犁. 중국 송나라 때 시문에서 때 맞게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라는 뜻으로 쓰인 일려우一犁雨에서 비롯한다. 이를 이르는 우리말이 보지락이다.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의존명사] 비가 온 양을 나타내는 단위. 보습이 들어갈 만큼 빗물이 땅에 스며든 정도를 이른다. ❖예문 비가 한 보지락 시원하게 내렸다. 2021. 11. 21.
목도木道? [木道] 이게 뭐지? 나무판자를 깐 길? No! 船 or 水路! 최립의 《간이집》 제7권 에 벼와 기장 우거졌을 통진 물가 찾는 이 길 / 禾黍通津涘 배편을 얻어 순탄하게 이를 수만 있다면 / 木道得無阻 이라는 게 그 사례. 2021. 11. 18.
승석僧夕 국어사전에는 "승려가 저녁밥을 먹을 때라는 뜻으로, 이른 저녁때를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도대체 스님들 언제 저녁을 드시는지 모르니 어느 정도 시간인 줄 모르겠다. 僧夕後~를 있지도 않았던 스님이 저녁밥을 먹고 떠난 뒤라고 번역한 게 더러 보인다. 202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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