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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671

AI로 증폭해 본 근대 기생님들 인터넷에 기생 사진이라 해서 떠돌아다니는 님들을 긁어서 AI로 증폭해 봤다. 유료로 돌리면 더 좋은 화질을 얻겠지만 이것으로 그런대로 만족한다. 물론 저들 사진 출처는 식민지시대에 발행된 엽서가 압도적이다. 다만 그 엽서들조차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빛이 바랬다. AI 기술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일부는 증폭한 다음 포토샵 기능을 활용해 보정했다. 그런대로 인쇄용 사용 정도는 가능하도록 해 봤으니, 이용하고픈 분들은 맘껏 활용하기 바란다. 정윤희를 빼다박은 기생도 있다. 2024. 2. 20.
한번 보고 두번 보고 못잊어 다시 찾은 기생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5권에 보이는 대중례待重來라는 기생 이야기다. 김 사문金斯文(사문斯文은 유학자를 지칭하는 말-인용자)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에 실망하고는 밀양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2024. 2. 20.
[귀주대첩] (3) 거란을 엿 먹이는 고려, 북송 연호를 채택하다 거란과 모든 관계를 닫아버린 고려는 현종 7년, 1016년 연호마저 개태開泰라는 거란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선 북송北宋 연호인 대중상부大中祥符를 채택해 쓰기 시작한다. 한데 이 일이 이상한 점은 앞서 보았듯이 거란을 버리고 이제 다시 宋을 섬기겠다는 고려의 요청을 宋이 거부했다는 데 있다. 이미 그 자신도 거란에 신속해 버린 송은 거란 눈치를 봐서 고려를 외방外邦 제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완곡히, 그러면서도 분명히 했다. 다만 그렇다 해서 송으로서도 그러지 말라 말릴 처지도 아니었다. 지들이 좋아서 지들 맘대로 한다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음 그만이었다. 나는 고려가 실제로 宋으로부터 무슨 실질적인 지원, 예컨대 군사지원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고려가 등신이 아닌 이상 당시 거란.. 2024. 2. 19.
한달간 병석에 누웠다가 간 “중흥의 군주” 고려 현종 전통시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군주의 죽음을 기록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보통 왕이 언제 불예不豫하다 하고는 보통은 그 이튿날 아니면 사흘째에 붕崩 혹은 훙薨이라 뜬다. 군주한테 쓰는 불예不豫를 보통 몸이 편치 않다는 정도로 옮기지만, 그 자체 중병에 대한 완곡어법이기는 하지만, 실상 이 말이 쓰이는 맥락을 보면 회복 불능한 중태라는 뜻이다. 고려 제8대 임금 왕순王詢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 중태에 빠진지 한달만에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뇌출혈이나 뇌일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고려사와 절요에 의하면 재위 22년째인 1031년 4월 28일 을사에 병져 누운 그는 대략 한 달 뒤인 다음달 5월 25일 신미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서한다. 왕이 병이 위독해지자 태자 왕흠王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는.. 2024. 2. 19.
되치기 당한 무신, 장교로 임명되는 문관들 한국사를 보면 문반과 무반 그 양극화는 아무래도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을 분기점으로 삼아야 할 성 싶다. 신라를 보건대 그 이전에는 말 그대로 출입장상出入將相이라, 문무반 구분이 엄격치 아니해서 장군이 곧 재상이었고 재상이 곧 장군이었다. 이런 시대가 일통삼한이 되면서 급속도로 문관 일변도로 변해간다. 왜?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된 까닭이다. 그러다가 신라말이 되면서 이제 300년을 움츠린 막부시대가 개막한다. 진성여왕 시대는 그 고비였으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삼국사기 말은 곧 막부시대가 개막했고, 다시 군인들의 시대가 왔다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왕건 자신도 막부정권 지도자였고, 실제로 그 수하 장수들한테 엎혀서 느닷없이 쿠데타로 집권하고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마상.. 2024. 2. 19.
탁영 김일손이 만난 운석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이자, 그의 을 편찬을 위한 사초에 굳이 실어 무오사화(1498)를 촉발하고 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그가 앞일을 알았더라면 을 사초에 싣지 않았을까? 하여간 그런 그가 충청도 도사로 있던 1495년(연산군 1) 5월, 그는 연산군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시국을 두고 그 처리에 관한 이익과 병폐를 무려 26조목으로 정리한 것인데, 그중 자연재해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 12월 27일(임오)에 서산瑞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는데, 곧 전하께서 상주가 되신 뒤의 일입니다. 올해 정월 18일(계묘)에 한산韓山 등지에 지진이 있었고, 2월 초하루에 3분의 1이나 먹은 일식이 있었고, 그 달 7일에는 대낮에 별이 떨어졌으니, 괴이함이 또..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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