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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698

[귀주대첩] (7) 전쟁 직전 강감찬의 동태 948년 생인 강감찬은 70세에 도달한 1017년 정월에는 정년 퇴직하거나, 정년퇴직하고 싶다는 사표를 던졌어야 한다. 나는 틀림없이 강감찬이 저 시기에 저랬다고 본다. 그것을 현종은 반려했다. 다만, 사서에서는 누락됐을 뿐이다. 그건 현종으로서도 강감찬을 따로 써 먹을 데가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를 간접 증언하는 흔적이 고려사 현종본기와 고려사절요에 모두 보인다. 한창 전운이 감도는 현종 9년 1018년 5월, 현종은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로 삼는다. 서경유수 겸 내사시랑평장사다. 서경유수는 외직이고 내사시랑평장사는 내직으로 재상이다. 한데 서경유수를 임명하면서 그 임명장 뒤에다가 현종은 이상한 말을 쓴다. “경술년(1010) 중 외적의 침입[虜塵]이 있게 되자 창과 .. 2024. 2. 22.
[귀주대첩] (6) 3차 고려거란전쟁의 미스터리들 거란과 여진인 내투來投가 이어지는 어수선한 상황은 이미 예고한 3차 고려거란전쟁이 어느 쪽으로 승리가 기울지를 암시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연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친 이 전쟁은 그 요란한 선전과는 달리 실상 거란이 동원한 군사가 그네들 기준으로 10만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그네들 일방 선전이라 실상 참전 규모는 더 적었다고 봐야 한다. 전쟁의 제1 홍보 조건은 뻥, 개뻥치기였다. 전쟁 홍보의 핵심은 성과는 과장하고, 피해는 숨기거나 최소화한다는 데 있다. 한 명 죽여놓고 백명 몰살했다 하고 백명 죽었는데 두 명 죽었다고 하는 짓거리는 러시아랑 우크라이나아 한 판 붙은 저 전쟁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무튼 자칭 10만이라는 거란군을 막고자 고려가 동원한 군대가 놀랍게도 갑절이나 많은 20만.. 2024. 2. 22.
[비형랑과 화랑세기] (3) 양자로 즉위한 김춘추 : 생부는 갈문왕, 양부는 대왕大王 갈문왕이 종말하고 추봉 대왕이 등장하는 획기를 나는 김춘추 즉위에서 찾는다. 김춘추의 등장은 중국식 예제가 한반도에 착근하는 계기였다. 이런 중국식 대왕 추봉 바람에 갈문왕이 대표하는 소위 고유 신라 추봉 시스템은 도전에 직면했다. 김춘추한테는 생부와 양부가 따로 있었다. 그는 양자로 즉위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용춘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과 사도思道 사이에서 난 둘째아들로 동부동모同父同母 형이 용수龍樹다. 춘추는 용수가 천명天明 공주에게서 낳은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작은아버지 용춘에게 가서 자랐다. 용춘은 천명을 아내로 받아들이는 한편 적자嫡子가 없어, 형의 아들인 조카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 춘추는 양자養子로 작은아버지에게 입적되었다. 화랑세기에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춘추는.. 2024. 2. 22.
[귀주대첩] (5) 거란에 무슨 일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란인 거란이 군사를 동원하는 데는 패턴이 있어, 예외는 없지는 않으나 저들 또한 겨울을 이용했으니, 이때가 말할 것도 없이 농한기인 까닭이며, 유목 전통이 강한 저들은 이때를 빌려 거개 사냥을 하곤 했으니 이때가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적기였다. 요새 군인이라면 사시사철 각종 훈련을 해대지만 이는 적어도 직업 군인 혹은 그에 징발되어 일정기간 복무하는 근현대 군대 시스템을 말하며, 전근대는 이와 같은 전업적 군대 육성 시스템은 운영할 수도 없었으니 간단히 돈 때문이었다. 돈이 엄청나게 들었고, 그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댈 재간이 없었다. 특히나 당시는 몸으로, 숫자로 떼우는 시절이라, 군대 동원은 곧 다른 공공부문 인력 상실을 의미했고, 그네들이 전부 농사를 짓거나 유목을 해야 하는 까닭에 한가롭게 군대 가서.. 2024. 2. 22.
[귀주대첩] (4) 전운이 감도는 전야 이제 또 다른 전쟁은 불가피했다. 아예 거란과의 문을 닫아버리고 모든 관계를 단절한 고려로서도 전쟁을 불사했다. 아니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왜 이랬을까? 이 정도면 됐다 생각했는데도 계속 거란이 무리한 요구를 일삼고 툭 하면 군사도발을 감행하니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상태임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고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요구가 이른바 강동육주 반환과 현종의 친조였다. 이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한데 거란은 자꾸만 저를 요구했다. 둘째 막상 붙어보니 거란 군사력이 별거 아니었다. 뭐 겉으로는 대단한 듯하고 그 때문에 첨에 겁부터 먹고 달아나기 바빴지만 실상 전력은 과대포장됐고 오합지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말타고 하면 쌈 잘해? 뭘 잘해? 또 내성이 생기.. 2024. 2. 21.
고적도보는 식민 모국 일본을 엿먹이는 총독부 회심작이다 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는 그 계획의 담대함과 그 실제 사업 내용,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인류역사에 전례를 보기 힘든 성취였다. 전대에 이와 견줄 만한 데는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 의한 백과사전 편찬과 그 맞은 편 중국이 시도한 사고전서와 고금도서집성 편찬이 있다. 믿기는가? 저 담대한 사업을 식민 모국 일본도 아닌 그 찌꺼기 조선총독부가 해냈다는 사실이? 저걸 왜 했을까?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도 아닌 판국에 저들은 왜 굳이 저런 사업에다 예산 퍼부었을까? 저 사업 결과물은 보고서가 나올 때마다 해외로도 배포됐다. 그 지향점이 조선 국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총독부는 무슨 생각으로 전례 없는 호화양장으로 저걸 찍어냈을까? 식민통치의 정당성 홍보를 위해? 그래? 저런거 찍어냄 홍보가 되니? 말 ..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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