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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606

나말여초 문단 거물 최언위와 그의 네 아들(1) 나말여초 문단을 호령한 인물로 최치원崔致遠(857~?), 그리고 견훤을 섬긴 최승우崔承祐(?~?)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같은 경주최씨로 그보다는 열한 살 어린 최언위崔彦撝(868~944)다. 치원과 언위 둘은 당나라 유학파로 그에서 급제한 인생 행로가 아주 비슷한데, 또 세트로 움직이기도 했으니, 다만, 최치원은 나말에 해인사로 은거한 뒤에는 행적이 묘연한 데 견주어, 최언위는 달라서 오래산 까닭도 있지마는 고려가 건국한 다음에는 아예 주거지를 경주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고려 조정에서 문한을 담당한다. 고려사 열전이 정리한 그의 행적을 보면 초명初名이 신지愼之라 했으니, 이는 삼가고 삼갈지니라 하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라, 다만 그 바꾼 이름 언위彦撝는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내가 아직 추적하.. 2024. 2. 4.
Best of best, 수선전도首善全圖의 수선首善 조선시대 도성都城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성곽으로 두른 도읍을 의미했으니, 구체로는 현재 우리가 한양도성이라 일컫는 나성羅城이 둘러친 공간 구역 안쪽을 말한다. 이곳이 서울이라 지금의 서울 종로구와 중구 일대가 본래는 엄격한 의미의 도성이며, 이곳이 바로 서울이다. 이 도성은 조선 왕조 건국 직후에 이미 둘러치기 시작해 후대에 끊임없는 보수가 있었지만, 그 공간 구역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 오백년 내내 저 구역은 그대로였다. 물론 도시 구역이 성밖으로 계속 확장해가기는 했지만, 한양도성은 죽죽 그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제작한 도성지도란 곧 저 한양도성 안쪽 지도를 말한다. 실제 그런가는 차치하고 생긴 모양은 천상 자궁 딱 그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그 후기 도성을 .. 2024. 2. 4.
바닥부터 재상으로 수직 상승한 왕자지王字之 이름 듣고는 대뜸 대물열전 등판 인물 아닌가 하겠지만, 또 그 후속타를 기대한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니다. 고려 중기 때 인물이다. 그는 이미 궁예 정권 시절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해서 출사해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동궁기실東宮記室까지 이르렀지만 궁예가 포악하게 변하자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가 훗날 세상이 격변하고 왕건이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하자 다시 나와 국가 기밀을 관장하게 된 박유朴儒라는 사람 현손이다. 박씨 집안 직계 후손임에도 왕씨 성을 쓴 까닭은 이미 저 박유가 하도 고려 왕조가 자리 잡는 데 공이 크다 해서 그 할아버지 박유한테 아예 왕실 성인 왕씨를 하사해 왕유王儒로 창씨개명한 데 따른다. 고려사 왕유 열전에 부기된 왕자지王字之 열전에 의하면 그는 자字가 원장元長이고, 어릴 적 이름은 소중紹.. 2024. 2. 3.
뜯어먹다 남은 고려사 목종 이전 실록, 황주량의 고군분투 고려는 왕건 이래 사관을 두었으며, 각 왕대별로 실록을 편찬했다. 즉,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곧바로 전대 왕 실록 찬수에 착수해 왕대별 실록을 찬진해 나갔다. 하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다 보면, 왕건 이래 제7대 목종穆宗(재위 997~1009)까지 기록은 빈한하기 짝이 없어 뜯어먹다 버린 다랑어 같다. 이리 된 까닭은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 개경이 함락당하면서 궁궐이 불타버리고 전대 실록 역시 모조리 소실된 까닭이라, 그런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서 목종 이전과 목종 이후 고려사는 질과 양 모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기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목종시대까지 실록을 흔히 7대실록이라 이름하니,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 전 시대 통사를 통칭하는 것이다. 실록을 편찬하려면 그를 위한 임시기구라 출범하는데,.. 2024. 2. 3.
최충과 경쟁한 사설학원들, 모조리 재상이 재단이사장 한민족 특징 중 하나는 사돈이 땅을 사면 내 배가 아프다는 증상이라, 최충이 연 사립학교가 성공하자, 그 꼴을 딴 사람들이 보고둘 리 만무했다. 더구나 쪽집게 강사로 소문나서 떼돈까지 벌어가는 명문입시학원이라는데 그것을 어찌 눈뜨고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각자 찌라시 만들어 돌리며 학생 유치에 혈안이었으니 그때라고 허위과장광고가 왜 없었겠는가? 그 찌라시엔 이런 구절이 빠지지 않았다. 과거 합격 백퍼 보장 앞서 소개한 고려사 권74 지志 권 제28 선거選擧2 학교學校 사학私學 편에는 최충과 경쟁한 다른 사립학원들이 소개되어 있다. 또 (최충 말고도) 유신儒臣으로서 도徒를 세운 이가 11명이었다. 고 하면서 그 명단을 나열하기를 1. 홍문공도弘文公徒 by 시중侍中 정배걸鄭倍傑, 일명 웅천도熊川徒. 이름으로.. 2024. 2. 3.
쌍기가 일으키고 최섬이 붙인 혁명, 사설학원 난립시대를 낳다 중국 귀화인 쌍기 건의로 고려 광종 시대에 과거제가 개막할 때만 해도, 그것을 승인 추진한 광종과 그 실무를 밀어부친 쌍기조차도 이후 고려사회가 어찌 변할지 몰랐다. 그만큼 이 조치는 단군조선 이래 볼 수 없던 혁명이었다. 이른바 호족이라 일컬은 권문세가 자신들과 그 음덕으로 출사한 그 후손들이 관료들이 지배하던 사회가 급속도로 행정고시로 무장한 관료제 사회로 변화해갔기 때문이다. 이런 성공 신화 이면에는 그것이 배출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영웅으로 추앙되기 시작한 시대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랬다. 구국영웅 서희는 비록 아버지 음덕이 크긴 했겠지만, 그는 황금방 출신으로 일찍 출사해 고속승진을 거듭하다 제1차 고려거란전쟁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과를 냈고 강감찬은 비록 출사는 늦은 편인 것으로 보..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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