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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국립박물관 온녕군 석곽 이야기

by 응도당 2020.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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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산책로에 전시되어 있는 "온녕군 석곽" 이야기 입니다. 


박물관 산책로에 전시된 태종의 일곱째 아들인 온녕군 (1407-1454) 석곽의 덮개돌은 쪼갠 흔적이 있는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석곽을 무덤에 쓰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계속 내려온 전통인데 회곽묘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러한 제도가 고수되었습니다. 다만 석곽 개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 태종은 개석을 반으로 쪼개어 쓰라는 명을 내립니다.

"상왕이 지병조사(知兵曹事) 곽존중(郭存中)을 보내어 임금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산릉의 석실(石室) 덮개가 넓고 두터워서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두 쪽으로 쪼개어 운반하기 쉽게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법을 세워서 뒷날의 규례가 되도록 하라. 또 들으니,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 하는데, 지석(誌石)은 가하거니와 비(碑)는 나의 백 세(白歲) 뒤를 기다려서 세우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전석(全石)을 쓰지 않는 것은 심히 경편(輕便)하기는 하나, 깨뜨려 쓰는 것이 전석(全石)으로 쓰는 것 같이 견고하지 못하고, 또는 우리 나라의 구례(舊例)도 아니니 지극히 민망할 일이옵니다." 하고, 원숙을 명하여 상왕에게 달려가서 계(啓)하게 하였더니, 숙이 도착하기 전에 상왕은 이미 안암동(安巖洞) 돌[石]일하는 현장에 거둥하여 말[馬]을 멈추고, 석공(石工)을 시켜 철퇴(鐵椎)로 덮개 돌을 쪼개어 둘로 만들었다. 숙이 갖추어 계(啓)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의 오는 편에 이미 주상의 뜻을 알았으나, 돌이 넓고 커서 운반하기가 곤란하여, 혹 군인들이 다쳐 죽을까를 염려한 것이니, 만일 법을 세우지 아니하면 뒷사람들이 무엇을 본받을 것이냐. 하물며 옛날에는 석실(石室)이란 글만 있었고 전석(全石)을 쓰라는 예문은 없으니, 비록 쪼개어 둘로 만들어도 튼튼하기가 전석(全石)과 다름이 없으니, 주상은 염려할 것이 없다." 하고... (중략).... , 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두어 가지 법을 세웠노라. 대강 말하면, 능(陵) 옆에 절[寺]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과 법석(法席)을 개혁시킨 것이며, 덮개 돌을 쪼개서 두 개로 하는 일들이다." 하였다. (왕조실록 세종 2년)

이 사건이 1420년에 있었던 사건이니 저 흔적이 뚜껑돌 쪼개기 흔적이 맞다면 온녕군이 돌아가신 1454년까지도 계속 태종의 유시가 준행되고 있던 셈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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