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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김일권 박사의 ‘신라 금석문과 「신라본기」의 천문역법사 고찰’ 토론문

*** 내 기억에는 2013년 7월, 신라사학회 발표문을 토론했는데, 토론 대상인 이 논문은 〈신라 금석문과 「신라본기」의 천문역법사 고찰〉 (Silla Astronomy and Almanac on the Silla-bongi and Epigraphs) 이라는 제목으로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신라문화》 42호에 실렸다. 



김일권 박사의 ‘신라 금석문과 「신라본기」의 천문역법사 고찰’ 토론문


김태식 연합뉴스


발표자는 평소 장대한 논문을 즐기는 편이거니와 이번 논문 또한 그에 해당해 실로 장대하다. 발표문 성격을 보니 신라 천문역법사에 대한 통사를 겨냥한 느낌을 준다. 


글은 세부로 들어가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가 ‘역법’이고 두 번째가 ‘시간’이다. 신라인들이 어떤 역법을 어느 시기에 구체적으로 사용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한편,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라인들이 시간을 어떻게 분절하고자 했는지를 특히 절기에 초점을 두어 해명하고자 했다. 후자를 발표자는 ‘신라의 시간학’이라고 표현한다.


토론자가 알기로 신라의 역법과 시간학에 대해 이만한 총정리는 처음으로 안다. 이번 발표문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나아가 신라가 사용했을 역법의 구체적인 해명을 위해 삼국사기를 필두로 하는 문헌사료 외에도 당대 자료인 금석문을 광범위하게 활용한 점도 발표문의 신뢰성을 높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표자는 신라에서 사용했을 역법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윤달 문제를 포함한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발표문에 충분히 다뤄졌으므로 토론에서는 재론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와중에 천문학을 주된 공부로 삼는 발표자는 이른바 전형적인 문헌사학도들이 간과할 수밖에 없던 오류들을 지적해 내는 성과를 냈다. 예컨대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민애왕 석탑 사리합기’는 신라 당대에 저록됐음에도 그에 보이는 민애왕이 몰한 月을 지칭하는 숫자 앞에 ‘閏’이라는 글자가 탈락했으며, 외려 삼국사기 관련 기록이 타당하다고 지적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 이는 후대의 문헌사료을 경시하면서 당대 금석문을 우선시하는 학계의 흐름에 대한 경종이다. 


또 마운령비에 구사한 역법이 남조의 陳曆이 아니라 北齊曆인 천보력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도 커다란 수확이며, 신라본기 헌강왕 11년 조의 “十月壬子”에서 ‘朔’을 보충한 것도 대단한 관찰력이다. 


발표자가 지적한 역법의 문제는 향후 발표자와 다른 연구자의 더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해 보며 이에서 제시한 견해들은 향후 삼국사기 교감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신라의 역법에서 불가의 범력 사용을 천착한 부분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토론자는 본다.


다음으로 ‘신라의 시간학’과 관련해 우선 발표자는 歲首가 몇 월인지를 착목한다. 이에서 주목한 것이 시조묘와 신궁이 국왕이 친행하는 시기다. 그 결과 발표자는 정월보다 2월 기원례의 빈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신라인들에게서 1년 세수로서의 기원(紀元)이 2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시조묘와 신궁 친행 시기를 세수로 확대한 문제의식은 더없이 좋다. 


하지만 상대에도 신라가 正月을 세수로 간주한 흔적이 있으니, 삼국유사를 보면 혁거세 조에 기록한 신라의 건국시기 細註가 정월15일이고, 소지왕이 천천정이라는 곳에 행차한 시기가 정월15일이며, 나아가 울진 봉평비를 세운 시기가 역시 정월15일이다. 이로 볼 때 토론자는 신라 상대에도 정월이 세수였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그 첫날은 정월 보름이었을 것으로 본다. 한국사회 세시풍속 절대다수가 정월대보름에 몰렸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따라서 신라가 진덕여왕 때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여 정월 초하루에 신년 하례를 받은 기록이 대서특필이 된 것은 어쩌면 정월15일에 새해 첫날이 1월1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다면 신궁과 시조묘 제사 시기가 2월로 기록된 점도 그 이유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월은 태양력으로는 2월이다. 여전히 날씨가 춥다. 2월로 기록된 까닭은 이 달이 세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달이 제사를 지내기에 적당한 시즌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상대 금석문 자료에 중요한 국가의식이 2월8일로 기록된 대목은 이 날이 석가탄신일이라는 점도 고려했으면 한다. 지금은 4월 8일로 고정된 석탄일은 초창기에는 2월 8일과 경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발표자는 ‘삭간지’가 나중에야 등장하며, 자비왕 이전까지 삼국사기 사건 발생 기록에서 날짜는 빠지고 月만 기록된 점 등을 근거로 이 무렵까지는 신라가 曆法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라는 600년간을 日曆 없이 보냈다는 말이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신라 상대는 일력이 없던 시대였던가?


이에 대한 예외로 발표자가 거론한 신라본기의 두 가지 기록, 다시 말해 첨해왕 15년(261) 12월 28일에 폭질(暴疾)로 王이 훙했다는 기록과 자비왕이 22년(479) 2월 3일에 훙했다는 기록은 발표자의 생각을 전연 상반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전자는 삼국사기가 날짜까지 밝힌 것은 신라는 舊王이 죽은 바로 그 해가 新王의 즉위 원년으로 쳤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다면 첨해왕을 이은 미추왕은 12월 28일 혹은 29일부터 바로 즉위 원년이 된다. 하지만 이 경우는 이해를 건너 뛰고 그 다음해 정월 1일부터 미추왕 원년을 세어야 하기 때문에 바로 첨해왕이 죽은 날짜를 밝힌 것이다. 이는 신라가 상대에, 이미 첨해왕 시대인 3세기에 日曆을 사용했다는 단적인 근거가 된다. 자비왕 훙년에 대한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나아가 발표자는 신라본기 진흥왕 33년(572) 10월 20일에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서 열어 7일간 개설하였다는 기록이 앞서 든 두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 “사실상의 첫 연월일 연대기”라고 했지만, 이것이 신라가 이 무렵에 날짜까지 표시하기 시작한 증거는 되기 어렵다고 토론자는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라 하대까지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원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날짜를 빼고 월까지만 기록”하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신라본기가 진흥왕 33년 조에서 팔관회 시작 날짜를 기록한 까닭은 그것이 7일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라본기 편찬 원칙은 월까지만 밝히는 것이 통례인 상황에서 그것이 일어난 시점을 단순히 10월이라고만 해 놓으면 자칫 그것이 끝나는 시점은 11월로 넘어갈 공산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시작한 날짜를 20일이라고 함으로써 이런 축제가 벌어진 시점이 10월임을 명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발표자는 중국 기록을 표절한 의혹의 중심점에 선 일식과 관련해 상대의 일식 관련 기록에만 유독 간지일이 죄다 붙어있다는 점은 불가사의하다는 견해를 피력했거니와 일식 관련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날짜가 빠질 수가 없다는 점을 간과한 지적이 아닌가 한다. 이는 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전재했건 않았건 상관없이 그렇다는 뜻이다.


더불어 발표자는 애장왕 2년 특정일에 일식이 있어야 하지만 없었다는 기록을 신라가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했다는 근거로 드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력을 반급받아 사용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 역서에 일식 예보가 붙어 있을 것이므로 이를 근거로 일식을 기다렸지만 발생하지 않았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가 있다. 독자성의 근거가 되려면 일식의 시각이 예보와 다르게 관측되었다든지, 예보와 달리 불식한 때문에 개력을 하려 하였다는 등의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고 지적했거니와 이 기록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발표자는 본다. 


일식이 일어나면 그것은 천재天災로 거론되어 왕이 모든 행동을 삼가는 쇼를 연출했거니와, 그에 더불어 이런 사건을 빙자해 이런 천재가 왕 자신의 부덕의 소치임을 자탄하면서 臣民에게 각종 특전을 베푸는 쇼를 펼친 것은 사례가 부지기로 등장하거니와, 이때 일식이 있어야 함에도 있지 않은 까닭이 기록에 대서특필된 까닭은 왕이 준비한 특전 행사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천문 현상을 정치사의 시각에서도 접근했으면 하는 뜻에서 무리한 발표자의 견해를 피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