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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기자? 기뤠기?

뉘였다가 세운 부여 군수리절터 목탑 중심기둥

아래 전문 인용하는 기사에서도 드러나고, 내 기억에도 분명 송의정 소장 시절이었다. 철두철미 박물관맨인 송의정이 윤형원 등과 더불어 인사교류 명목으로 2년인가 잠시 문화재청으로 파견나가 근무한 적이 있으니, 여담이나 이때 재미를 붙인 윤형원은 이후 한 번 더 문화재청 근무를 자청해 해양연구소에서 과장 2년인가 해 묵고 부여박물관장으로 튀었다. 


애니웨이, 송의정 소장 시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역점으로 벌인 발굴사업이 부여 군수리절터였다. 2005년 6월 14일자 내 기사가 이를 예고했으니,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군수리사지 출토 백제 납석제 불상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 70년만에 재발굴

1935-1936년 조선총독부 조사 이후 처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 마지막 도읍 부여에 위치한 그 시대 절터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는 군수리(軍守里) 사지(寺址.절터)가 정확히 70년 만에 재발굴에 들어간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문화재청이 군수리 절터 일대에 대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허가함에 따라 조만간 정식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14일 말했다.


연구소 김성범 학예연구실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나 절터 일대에 자라고 있는 해송(海松)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 등으로 착수가 늦어져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내일이라도 조사는 시작된다"고 말했다.


군수리 절터는 부여읍 군수리 95번지 일대에 소재하는 옛 백제 시대 유적으로서 국가 사적 제44호로 지정돼 있다. 궁남지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도 지표면에서는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이번 발굴조사 목적에 대해 김 실장은 "궁남지 일원에 대한 백제시대 도성 유적 조사 일환"이라면서, "군수리 사지는 백제 고고학계나 고건축학계에서 누리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 조사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덧붙였다. 


2005년 발굴조사 돌입 직전 군수리 절터 주변 환경과 절터 분포 추정 범위



군수리 절터는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팀장은 이시다 모사케(石田茂作.1894~1977)였고, 조사원 중 한 명인 사이토 다다시(齋藤忠. 96)는 아직 생존해 있다. 


이 발굴성과는 '부여 군수리 폐사지 발굴조사(扶餘軍守里廢寺址發掘調査) : 쇼와(昭和)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라는 이름으로 1936년에 출간됐다.


하지만 당시 발굴조사는 조사 기간이 한 달가량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 조사 방식 또한 정식 발굴조사가 아니라 시굴조사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이곳을 궁전이 있던 곳으로 생각했으나 탑의 심초석(心礎石)과 불상이 발견됨으로써 절터임을 확인했다. 이 절터는 부여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곳이라는 점과 가람 배치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람 배치는 중문(中門)과 탑(塔)과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연이어 배치되는 이른바 '1탑1금당식'(一塔一金堂式)으로, 이런 양식은 부여  동남리 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 외에 미륵사지 가람배치에서도 확인됨으로써 백제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로 굳혀지게 됐다.


70년 전 조사 결과 탑지 남쪽에서 남문지와 중문지가, 강당지 좌우에서는 방형 기단이 나타나 종루(鐘樓)와 경루(經樓)가 있던 곳으로 추정됐다. 


탑지는 기단 기준으로 방형(方形)으로 한 변 13.9m로 측정됐다. 금당지 기단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27m와 18m였으며 초석 흔적으로 미뤄 정면  9칸  건물이었다고 추정됐다. 강당지는 46×19m였다.


출토 유물로는 많은 기와류와 함께 납석제 석조여래좌상(보물 299호)과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330)이 유명하다. 

taeshik@yna.co.kr 

(끝)


그렇다면 이때 발굴은 성과가 어떠했던가? 발굴 착수 소식을 전한지 대략 1년 남짓 지난 2006년 8월 20일자 내 기사다. 


엠바고 1차 : 2006.08.20 06:00:00


"고대목탑 중심기둥 세우기 비밀 마침내 풀렸다"

군수리 절터 목탑지 '뉘었다가 세우기' 최초 확인

경주 나정 "우물 아닌 기둥구멍" 판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사찰에서 목탑을 세울 때 그 가운데 불탑 건축물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 심주(心柱)라고 하는 나무 기둥을 세운다. 최소 10m 이상 되는 거대한 나무기둥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세웠을까?


그 오래된 의문이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1번지 일대 소재 군수리절터(사적 44호)의 백제시대 목탑이 있던 곳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마침내 풀렸다. 


군수리사지 목탑터와 그 심초석 있던 곳



아울러 이를 통해 신라건국시조 박혁거세가 탄강한 곳이라는 전설이 서린 경주 나정(羅井)의 이른바 '우물'이란 곳 또한 우물이 아니라 팔각형(혹은 원형) 건물의 중심기둥이 섰던 자리였음이 판명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4-6월 군수리절터 중 현재의 목탑지 정중앙 지하에 자리잡은 심초석(心礎石. 중심기둥 받침돌)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중심기둥을 일단 수평으로 뉜 다음, 기둥 밑둥을 지하에 위치한 심초석으로 밀어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들어간 흔적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조사 결과 심초석은 현재의 지표면 기준으로 194㎝ 지점에서 윗면을 드러냈다. 화강암재 대리석을 이용한 심초석은 아래는 둥글고 상면은 사각형인 상방하원(上方下圓) 형태였으며, 상단과 하단은 약 5㎝ 가량 되는 높이 차이가 났다. 크기는 상단이 한변 94㎝인 정사각형이며, 하단은 동서 130㎝, 남북 138㎝였다.


백제인들은 이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해 사각형 모양으로 2m 이상 되는 깊이로 땅을 팠다. 


심주 세우기 원리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수직으로 파고 내려간 심초석 구덩이 중 서쪽 측면 맨 아래쪽에서 시작해 비스듬히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올라가다가 마침내 지표면과 연결되는 긴 고랑과 같은 시설(길이 474, 너비 180㎝)이 확인됐다.


조사단은 바로 이 '고랑시설'이 거대한 목탑 중심 나무기둥을 심초석 위에 안치하기 위한 고안임을 발견했다.


송의정 소장은 "수 십m가 되었을 거대한 나무기둥을 지하 2m 지점에 위치한 심초석 위에 그대로 세우기는 기술적으로 매우 곤란했을 것이므로, 이런 난제에 봉착한 백제인들이 심초석 지점까지 땅을 비스듬하게 파고 들어간 다음, 여기에 기둥을 뉘어 놓고서 반대편 기둥 끝을 잡아당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군수리 목탑지 중심기둥 안치 복원도 참조)


이와 같은 '뉘었다가 세우기' 방식은 일본에서 호류지(法隆寺) 오층목탑에서 확인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중국 고대 목탑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고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목탑 심주 세우기 방식이 확인된 것은 군수리 절터가 처음이다.


경주 나정 팔각형 건물지



군수리 절터 목탑에서 이 방식이 구명됨에 따라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최근 연차 발굴조사를 벌인 경주 나정 유적의 이른바 '우물' 흔적 또한, 우물이 아니라 기둥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해 마련된 시설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나정 유적 또한 지하 2m 가량 되는 지점에 심초 시설과 같은 흔적이 발견된 것은 물론, 그 한쪽 면에서 지상으로 비스듬히 연결되는 도랑과 같은 시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taeshik@yna.co.kr

(끝)  


이 기사를 보면 엠바고 1차 : 2006.08.20 06:00:00라고 설정됐으니, 이는 결국 이 기사가 이른바 연합뉴스 김태식 단독이라는 뜻이다. 


이 군수리절터 발굴은 목탑 심주를 세우기 위한 방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 사건의 현장이다. 나아가 이를 통해 그 직전 경주에서 발굴된 나정 발굴의 미스터터리 역시 만천하게 폭로되었으니, 더한 중대성을 지닌다. 


당시 실제 발굴은 내 기억에 정자영이가 했다. 내가 요청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애를 먹인 기억이 있어 특별히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