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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백제를 팔아먹은 예식진禰寔進, 그 선조 예형禰衡

by Herodopedia taeshik.kim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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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禰寔進 묘지명. 나당연합군 공략에 사비성을 버리고 냅다 웅진성으로 튄 의자왕을 잡아다가 당군에 넘긴 인물이다.  

 

 

예형禰衡이 위魏 무제魏武(조조曹操)한테서 미움을 받아 고리鼓吏로 폄적(강등)되어 정월 보름에 북 연주 시범을 보였다. 예형이 북채를 잡고선 어양참과漁陽摻檛라는 곡을 연주하니[1] 그윽하니 금석金石의 소리가 나니 사방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옷 매무새를 고쳤다. 공융孔融이 말하기를 “예형이 지은 죄는 서미胥靡의 형에 해당하지만 명왕明王의 꿈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이지요”라고 하니[2] 위 무제가 부끄러이 여기고는 그를 사면했다.

 

[1] 《전략典略》에 말했다. “예형은 字자 정평正平이요 평원平原의 반般 땅 사람이다.” 《문사전文士傳》에서 말했다. “예형은 그 선조가 어디 출신인지 모른다.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흔들었다. 어릴 적에는 공융孔融과 여보 자네 하면서 교유했으니 그때 예형은 나이가 스무살도 되지 않았고, 공융은 이미 쉰을 넘었다. 예형이 재주가 뛰어남은 공경하며 진심으로 우정을 맺고는 서로 (뜻이) 어긋남이 없었다. 건안建安 연간 초기에 북방을 유람하는데 어떤 이가 서울의 부유한 사람을 찾아가 보라 하니 예형이 명함 한 장을 들고 가다가 그걸 잃어버려서 결국은 찾아가지 못했다. 공융은 여러 번 무제武帝한테 글[牋]을 올려 그의 재주를 칭찬하니 황제가 마침내 그를 만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지만 예형은 병이 있다고 하고는 가려하지 않은 채 누차 (황제를 비판하는) 언론言論을 펴니 황제가 그걸 분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재주가 있다는 명성 때문에 죽이지는 못하고 그를 욕보이려고 령令을 내려 (북을 치는) 고리鼓吏로 등록토록 했다. 그런 뒤 8월 조회朝會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관람하고자 삼중으로 된 누각을 짓고는 빈객들을 열을 지어 배석케 했다. 비단으로 저고리를 만들고 높다란 모자와 연두색 홑겉옷과 바지를 만들었는데 고리 중에 연주하는 자는 모두 입고 있던 옛옷을 벗고 이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차례가 예형에 이르자 그는 북을 치며 어양참과 곡을 연주했는데 땅을 박차고 그 앞으로 나와 발을 급하게 구르는 모습이 남달랐다. 또한 북소리가 매우 구슬프고 박자가 특히 미묘해 좌객 중에 감동하여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틀림없이 예형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연주를 하면서도 그가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자 관리가 꾸짖어 말하기를 '이봐, 고리. 어찌하여 당신 혼자만 옷을 갈아입지 않지?'라고 했다. 이에 예형은 곧 북치던 것을 멈추고 무제 앞에 서서 먼저 바지를 벗은 다음에 나머지 옷을 벗고 알몸으로 섰다. 그리고 천천히 높다란 모자를 쓰고 다음으로 홑겉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바지를 입었다. 옷 입기를 다 마치자 다시 북을 치면서 참과곡을 다 연주하고 나서 나갔는데 그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이를 본 무제는 웃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본래 예형을 욕보이려 했는데 예형이 도리어 나를 욕보이고 말았군'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어양참과 곡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예형에서 비롯되었다. 예형은 황조한테 죽임을 당했다.” 

 

[2] 황보밀皇甫謐이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殷나라 임금) 무정武丁이 꿈에서 하늘이 현명한 사람을 내려주는 꿈을 꾸고는 온갖 기술자들을 불러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는 천하 구석구석에서 (그 그림을 보여주고는) 그 사람을 찾도록 했다. 그러다가 성을 쌓는 사람들이 서로 묶인 채 일을 하는데, 개중 갈옷을 걸치고는 부암傅巖이라는 들판에서 일하는 이를 찾으니, 그런 까닭에 그를 부열傅說이라 한다.” 장안張晏이 말했다. “서미胥靡란 형벌의 이름이다. 서胥란 서로라는 뜻이요, 미靡란 따른다는 뜻이다. 서로 묶어놓고 따라 다니게 하는 가벼운 형벌을 말한다.”

 

 

예식진 아들 예소사 묘지명

 

 

禰衡被魏武謫為鼓吏,正月半試鼓。衡揚枹為漁陽摻檛,淵淵有金石聲,四坐為之改容。典略曰:「衡字正平,平原般人也。」文士傳曰:「衡不知先所出,逸才飄舉。少與孔融作爾汝之交,時衡未滿二十,融已五十。敬衡才秀,共結殷勤,不能相違。以建安初北游,或勸其詣京師貴游者,衡懷一刺,遂至漫滅,竟無所詣。融數與武帝牋,稱其才,帝傾心欲見。衡稱疾不肯往,而數有言論。帝甚忿之,以其才名不殺,圖欲辱之,乃令錄為鼓吏。後至八月朝會,大閱試鼓節,作三重閣,列坐賓客。以帛絹製衣,作一岑牟,一單絞及小㡓。鼓吏度者,皆當脫其故衣,著此新衣。次傳衡,衡擊鼓為漁陽摻檛,蹋地來前,躡삽〈馬+殳〉腳足,容態不常,鼓聲甚悲,音節殊妙。坐客莫不慷慨,知必衡也。既度,不肯易衣。吏呵之曰:『鼓吏何獨不易服?』衡便止。當武帝前,先脫㡓,次脫餘衣,裸身而立。徐徐乃著岑牟,次著單絞,後乃著㡓。畢,復擊鼓摻槌而去,顏色無怍。武帝笑謂四坐曰:『本欲辱衡,衡反辱孤。』至今有漁陽摻檛,自衡造也。為黃祖所殺。」 孔融曰:「禰衡罪同胥靡,不能發明王之夢。」 皇甫謐帝王世紀曰:「武丁夢天賜己賢人,使百工寫其象,求諸天下。見築者胥靡,衣褐於傅巖之野,是謂傅說。」張晏曰:「胥靡,刑名。胥,相也;靡,從也。謂相從坐輕刑也。」 魏武慚而赦之。

 

 

이상은 [劉宋] 유의경劉義慶(403~444) 찬撰, [梁] 유효표劉孝標(462~521) 주注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편을 출전으로 삼는다. 파란색 고딕 부분이 유의경 본래 문장이고, 붉은색은 후대에 유효표가 첨부한 자료다.

 

옮김은 김장환(살림, 1996)을 대부분 따랐다. 

 

 

 

 

 

 

 

 

 

 

 

 

예소사 묘지명 덮개돌

 

 

 

예형禰衡에 대해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이학휘편理學彙編·문학전文學典 제20권 문학명가열전文學名家列傳 8 후한後漢 4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按《後漢書·文苑列傳》:禰衡,字正平,平原般人也。少有 才辯,而氣尚剛傲,好矯時慢物。興平中,避難荊州。建 安初,來遊許下。始達潁川,乃陰懷一刺,既而無所之 適,至於刺字漫滅。是時許都新建,賢士大夫四方來 集。或問衡曰:盍從陳長文、司馬伯達乎。對曰:吾焉能 從屠沽兒耶。又問:荀文若、趙稚長云何。衡曰:文若可 借面弔喪,稚長可使監廚請客。唯善魯國孔融及弘 農楊脩。常稱曰:大兒孔文舉,小兒楊德祖。餘子碌碌, 莫足數也。融亦深愛其才。衡始弱冠,而融年四十,遂 與為交友。上疏薦之曰:臣聞洪水橫流,帝思俾乂,旁 求四方,以招賢俊。昔孝武繼統,將弘祖業,疇咨熙載, 群士響臻。陛下叡聖,纂承基緒,遭遇戹運,勞謙日昃。 惟岳降神,異人並出。竊見處士平原禰衡,年二十四, 字正平,淑質貞亮,英才卓礫。初涉藝文,升堂睹奧,目 所一見,輒誦於口,耳所瞥聞,不忘於心。性與道合,思 若有神。弘羊潛計,安世默識,以衡準之,誠不足怪。忠 果正直,志懷霜雪,見善若驚,疾惡如讎。任座抗行,史 魚厲節,殆無以過也。鷙鳥累伯,不如一鶚。使衡立朝, 必有可觀。飛辯騁辭,溢氣坌涌,解疑釋結,臨敵有餘。 昔賈誼求試屬國,詭係單于;終軍欲以長纓,牽致勁 越。弱冠慷慨,前世美之。近日路粹、嚴象,亦用異才擢 拜臺郎,衡宜與為比。如得龍躍天衢,振翼雲漢,揚聲 紫微,垂光虹蜺,足以昭近署之多士,增四門之穆穆。 鈞天廣樂,必有奇麗之觀;帝室皇居,必蓄非常之寶。 若衡等輩,不可多得。激楚、揚阿,至妙之容,臺牧者之 所貪;飛兔、騕褭,絕足奔放,良、樂之所急。臣等區區,敢 不以聞。融既愛衡才,數稱述於曹操。操欲見之,而衡 素相輕疾,自稱狂病,不肯往,而數有恣言。操懷忿,而 以其才名,不欲殺之。聞衡善擊鼓,乃召為鼓史,因大 會賓客,閱試音節,諸史過者,皆令脫其故衣,更著岑 牟單絞之服。次至衡,衡方為漁陽參撾,蹀{{?}}而前,容 態有異,聲節悲壯,聽者莫不慷慨。衡進至操前而止, 吏訶之曰:鼓史何不改裝,而輕敢進乎。衡曰:諾。于是 先解袒衣,次釋餘服,裸身而立,徐取岑牟、單絞而著 之,畢,復參撾而去,顏色不怍。操笑曰:本欲辱衡,衡反 辱孤。孔融退而數之曰:正平大雅,固當爾邪。因宣操 區區之意。衡許往。融復見操,說衡狂疾,今求得自謝。 操喜,敕門者有客便通,待之極晏。衡乃著布單衣、疏 巾,手持三尺梲杖,坐大營門,以杖箠地大罵。吏白:外 有狂生,坐於營門,言語悖逆,請收案罪。操怒,謂融曰: 禰衡豎子,孤殺之猶雀鼠耳。顧此人素有虛名,遠近 將謂孤不能容之,今送與劉表,視當何如。於是遣人 騎送之。臨發,眾人為之祖道,先供設於城南,乃更相 戒曰:禰衡勃虐無禮,今因其後到,咸當以不起折之 也。及衡至,眾人莫肯興,衡坐而大號。眾問其故,衡曰: 坐者為冢,臥者為屍,屍冢之間,能不悲乎。劉表及荊 州士大夫先服其才名,甚賓禮之,文章言議,非衡不 定。表嘗與諸文人共草章奏,並極其才思。時衡出,還 見之,開省未周,因毀以抵地。表憮然為駭。衡乃從求 筆札,須臾立成,辭義可觀。表大悅,益重之。後復侮慢 於表,表恥不能容,以江夏太守黃祖性急,故送衡與 之,祖亦善待焉。衡為作書記,輕重疏密,各得體宜。祖 持其手曰:處士,此正得祖意,如祖腹中之所欲言也。 祖長子射為章陵太守,尤善於衡。嘗與衡俱遊,共讀 蔡邕所作碑文,射愛其辭,還恨不繕寫。衡曰:吾雖一 覽,猶能識之,唯其中石缺二字為不明耳。因書出之, 射馳使寫碑還校,如衡所書,莫不歎服。射時大會賓 客,人有獻鸚鵡者,射舉巵于衡曰:願先生賦之,以娛 嘉賓。衡攬筆而作,文無加點,辭采甚麗。後黃祖在蒙 衝船上,大會賓客,而衡言不遜順,祖慚,乃訶之,衡更 熟視曰:死公。云等道。祖大怒,令五百將出,欲加箠,衡 方大罵,祖恚,遂令殺之。祖主簿素疾衡,即時殺焉。射 徒跣來救,不及。祖亦悔之,乃厚加棺斂。衡時年二十 六,其文章多亡云。

《文士傳》:衡不知先所出逸才飄舉少與孔融作爾,汝之交時,衡未滿二十,融已五十。敬衡才秀共結,殷勤不能相違,以建安初北游,或觀其詣,京師貴游者,衡懷一剌遂至,漫滅竟無所詣,融數與武帝牋稱其才,帝傾心欲見,衡稱疾不肯往,而數有言論,帝甚忿之,以其才名不殺,圖欲辱之,乃令錄為鼓史。後至正月,朝會大閱,試鼓節作三重閣,列坐賓客,以帛絹製作衣一岑,牟一單,絞及小㡓鼓史度者,皆當脫其,故衣著此新衣,次傳衡,衡擊鼓為漁陽摻搥,蹋地來前,躡馺足腳,容態不常,鼓聲甚悲,音節殊妙,坐客莫不慷慨,知必衡也。既度不肯易衣,吏訶之曰:鼓史何獨不易服。衡便止,當武帝前先脫㡓,次脫餘衣,裸身而立,徐徐乃著岑牟,次著單絞,後乃著㡓畢,復擊鼓摻搥而去,顏色無怍。武帝笑謂四坐曰:本欲辱衡,衡反辱孤。至今有漁陽摻搥,自衡造也。為黃祖所殺。

按《世說新語》:禰衡被魏武謫為鼓史,正月半試鼓,衡 揚枹為漁陽摻撾,淵淵有金石聲,四坐為之改容。孔 融曰:禰衡罪同胥靡不能發明王之夢。魏武慚而赦 之。

 

 

예군禰軍 묘지명 덮개돌. 예식진 형이다. 

 

 

이 예형禰衡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그 후손이 훗날 백제에 정착하고, 그렇게 뿌리를 내린 그의 후손이 나중에는 백제 멸망과 더불어 당에 투항해 그쪽에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후손 중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공 작전에서 웅진성으로 피난한 의자왕을 잡아다가 당군에 팔아넘기고, 그 공로로 당에 들어가 출세한 예식진禰寔進이 있음을 유념해도 좋다. 

 

이 예식진에 얽힌 이야기는 두어 차례 지면을 할애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댓글3

  • 四叶草 2020.06.09 08:15

    적극적으로 팔아먹은 건지, 마지못해 팔아먹은 건지 모른다 카던데요.
    답글

    • 四叶草 2020.06.09 08:16

      귀화했다가 다시 역이민을? 오늘날 미국시민권 마지막 관문에서 곤혹스런 질문이 바로 "너의 이전 조국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총구를 어디로 돌리겠냐?"는 질문입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박근혜 때 초기 과기부장관 후보자도 미국시민권반납 직전까지 갔다가 포기했다고 하지요. 빙상인 빅토르안, 한일 귀화 중국탁구선수 등등, 양자택일상황에서 본의 아닌 선택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 어차피 망하게 되어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