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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울진 봉평비 ‘吉先길선’과 아도비 ‘吉升길승’

**** 첨부 글은 金台植, 2004, 「자료소개- 울진봉평비 吉先과 아도비 吉升」『新羅史學報』 창간호, 신라사학회 전문이다. 문단은 블로그 게재임을 고려해 적당히 분절했다. 


<자료소개>

울진 봉평비 ‘吉先’과 아도비 ‘吉升’


김태식

 

울진 봉평비 뒷면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 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염촉滅身) 조에는 법흥왕 즉위 14년(527)에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게끔 한 이차돈(異次頓)에 대해 두 가지 전거를 인용하면서 상이한 계보를 소개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 원화(元和) 연간에 남간사(南澗寺) 승려 일념(一念)이란 사람이 쓴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라는 글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부(祖父)는 아진종(阿珍宗)이니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둘째는 이에 대한 분주(分注)에서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인용하면서 사인(舍人), 즉, 이차돈은 순교할 때 나이 26세였으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계보를 선대 이후 이차돈에 이르기까지 간략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습보 → 아진종→ ? → 이차돈(촉향분례불결사문)

2. 걸해대왕 → 공한 → 길승 → 이차돈(아도비)


이 둘은 어느 한 곳에서도 합치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혀 상이하다. 그러니 안이하게 촉향분례결사문에서 탈락된 이차돈 아버지를 아도비를 참조해 길승(吉升)이라고 보충해 넣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러한 계보 차이가 혹시 하나는 부계(父系), 다른 하나는 모계(母系)로 따진 데서 초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 진실이야 무엇이건 위 두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 중에서도 아도비가 이차돈 아버지라고 지목하고 있는 길승(吉升)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길승(吉先)이란 이름이 다름 아닌 울진 봉평 신라비에서 보이고 있어 비록 알려진 자료이기는 하나, 이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에 필자는 여기서 이들 두 이름이 표기나 발음 및 활동 시기가 거의 완벽하게 합치된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이 두 이름이 같은 인물일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봉평비 전면 일부



봉평비는 1988년 1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에서 이 마을 한 농부가 논에서 객토(客土) 작업 중에 발견해서 4월에 공개된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10행에 걸쳐 모두 398자 안팎의 글을 새기고 있다. 이 비는 판독이 정확치 않은 대목이 많아 그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첫째, 비는 갑신년(甲申年), 즉, 서기 524년(법흥왕 11) 정월 15일에 건립되었으며, 둘째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男彌只村)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에 대해 신라 조정이 결정한 포고문(혹은 법령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문에는 이 때 공포된 판결(혹은 결정문)에 관여한 신라 조정 군신(君臣) 14명을 다음과 같이 실명으로 나열하고 있거니와 이들에게는 각기 그 주거지와 당시 관위(官位. 혹은 직책)가 붙어 있다.

 

甲辰年 正月十五日 喙部 牟卽智 寐錦王 沙喙部 徙夫智葛文王 本波部 □夫智干支 岑喙部 昕智 干支 沙喙部 而粘智 太阿干支 吉先智 阿干支 一毒夫智 一吉干支 喙 勿力智 一吉干支 愼智 居伐干支 一夫智 太奈麻 一小智 太奈麻 牟心智奈麻 沙喙部 十斯智 奈麻 悉智奈麻 等 所敎事 


이 중에서 이차돈 계보와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과 사부지(徙夫智) 갈문왕(葛文王)을 필두로 14명 중 6번째로 등장하는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이다. 길선지 앞에는 그가 당시 거주하던 지역이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이는 그에 바로 앞서 등장하는 사탁부(沙喙部) 이점지(而粘智) 태아간지(太阿干支)와 거주지가 같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 생략된 것이다. 


그러니 이 비문에 등장하는 길선지(吉先智)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추출할 수 있는 정보는 첫째, 거주지는 사탁부이며, 둘째 봉평비가 건립될 무렵 그 관위가 아간지(阿干支)였다는 사실이다. 아간지(阿干支)는 후대 금석문이나 문헌에는 아찬(阿湌)이나 아척간(阿尺干) 등으로 표기되는 것으로,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 체계에서 제6등이다. 관위로 보아 길선지는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로 볼 때 길선지(吉先智)는 524년, 법흥왕 11년 무렵에 장년층이었으며 이 때가 신라 조정에서 한창 활동할 무렵이라고 보아도 그다지 대과가 없을 것이다. 


봉평비 전면 윗부분



또 한 가지, 신라인 이름 끝에 흔히 붙은 󰡐智󰡑는 본래 이름의 일부라고 하기 보다는, 남자에게는 으레 붙는 접미어 같은 구실을 하는 부호임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거니와, 필자 또한 별다른 이의가 없으므로, 길선지(吉先智)라는 이름에서 중핵(中核)은 길선(吉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고찰을 발판으로 이제 봉평비에 나오는 吉先이 아도비에 등장하는 이차돈 아버지 길승(吉升)인지를 본격적으로 궁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필자가 선행 연구 성과 조사에서 혹 빠뜨렸는지는 자신이 없으나, 봉평비 吉先을 吉升과 연결시킨 이는 없다. 


필자가 두 이름을 같은 인물로 보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표기 혹은 발음상 유사성이요, 둘째, 활동 연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먼저 표기 혹은 발음 문제를 보건대, 吉先과 吉升이 법흥왕 당대 발음이 상통, 혹은 일치했다. 先과 升은 현재 한국어 발음에서 모음에서 󰡐ㅓ󰡑와 󰡐ㅡ󰡑로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필자는 신라 당대에 이 두 모음이 구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경상도 말에서 두 모음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정확히 말해서 현재의 경상도 말에서 󰡐ㅡ󰡑는 거의 예외없이 󰡐ㅓ󰡑라는 하나의 모음으로 수렴된다).


先과 升의 발음과 관련해 다음으로 해결할 것은 현재는 각각 음가상으로 󰡐n󰡑(ㄴ)과 󰡐ng󰡑(ㅇ)로 발음되는 끝 글자 발음 문제가 대두한다. 하지만 󰡐n󰡑과 󰡐ng󰡑는 󰡐m󰡑(ㅁ)과 함께 음성학상 같은 비음(鼻音. nasal sound)에 속한다는 점에서 흔히 통용되곤 했으며 현재 한국어에서도 그런 경향은 농후하게 관찰된다. 이로 보아 󰡐先󰡑과 󰡐升󰡑 두 말은 말음이 같은 계열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n󰡑과 󰡐ng󰡑가 신라 당대에 같은 발음이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각각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와, 열전 김흠운(金歆運) 전 두 군데서 성덕왕 4년(704)에 한산주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에 대해 언급한 말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있거니와,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이것은 시가를 방불하는 4구체 운문(韻文)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운자(韻字)가 활용되고 있으니 첫 구 끝자 󰡐臣󰡑과 4구 끝 글자 󰡐生󰡑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이 두 한자어󰡐臣󰡑과 󰡐生󰡑은 끝 자음이 각각 󰡐n󰡑과 󰡐ng󰡑로 발음되지만, 신라 당대에는 같은 음가였으며, 그렇기에 같은 운자로 활용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봉평비 전면



발음은 차치하고라도 표기상에서도 󰡐先󰡑과 󰡐升󰡑은 혼용을 초래할 여지가 아주 많거니와, 보다시피 글자 모양이 대단한 닮음꼴을 보인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로 볼 때 봉평비에 나오는 󰡐吉先󰡑과 아도비에 이차돈 아버지로 등장하는 󰡐吉升󰡑은 발음이나 표기로 보아 동일한 발음을 약간 다르게 표기한 결과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이 두 이름이 활동 연대가 겹친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 의하건대 이차돈은 법흥왕 14년(527)에 순교할 때 나이가 26세라 했다. 이를 존중한다면 이차돈은 503년(지증왕 4) 무렵에 출생한 셈이 된다. 이런 이차돈의 아버지가 아도비에서는󰡐길승(吉升)󰡑이라 하고 있으니, 길승이 실제 이차돈 아버지인가 아닌가는 젖혀 두고라도 그의 활동 연대가 지증~법흥왕 대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봉평비 󰡐吉先󰡑과 아도비 󰡐吉升󰡑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고려말에 작성된 《삼국유사》라는 후대 문헌과, 거기에 인용된 통일신라시대 금석문인 아도비, 두 군데서 각기 이차돈 아버지로 등장하는 󰡐吉升󰡑을 그의 살아 생전 당대에 작성된 울진 봉평비라는 중고시대 신라 금석문에서도 확인함으로써 이 인물이 실존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