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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2001년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

by taeshik.kim 2018.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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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문을 연 무령왕릉>

무령왕릉 발견․발굴이 30년을 맞은 2001년, 나는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을 마련하고, 동년 6월 18일 ‘한성을 등진 어린 왕자’를 시발로 동년 7월 21일 ‘무령왕릉과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총 15회에 걸쳐 관련 기사를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했다. 무령왕릉 발굴 저간의 이야기로는 그 발굴 책임자였던 김원룡의 몇 마디 사죄성 언급과 조사단 일원인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에 의한 간단한 정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써 무령왕릉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에 벼르고 벼르다 이 특집을 생각했던 것이니, 이 특집이 공간된 이래, 이곳저곳 출처도 없이, 무령왕릉 발굴비화라고 해서 이들 기사가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이제는 급기야 그것을 정리한 뿌리조차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풍찬노숙 시절에 공간한 《직설 무령왕릉》(메디치미디어, 2016)은 바로 저 특집이 토대가 되어 완성한 것이거니와, 근자에 보니 이 책을 읽었다는 몇몇 분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랑 비슷한 말이 많다기에, 내가 어이가 없어, “그것이 바로 내가 쓴 것이요”라고 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17년 전 그때 내가 그때로서는 나름 심혈을 기울여 시도한 특집 15회분을 갈무리해 둔다.  


0001 2001-07-21 15:43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⑮무령왕릉과 박정희(完) 

0002 2001-07-18 20:31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⑭"발굴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0003 2001-07-16 14:59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⑬송산리의 밤 

0004 2001-07-14 11:41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⑫유령집 

0005 2001-07-11 15:04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⑪북어 세 마리로 차린 제사상 

0006 2001-07-09 15:24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⑩영문도 모른 발굴단 

0007 2001-07-07 12:36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⑨공주에 간 관장님  김태식 보기  

0008 2001-07-04 12:34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⑧일본출장을 떠난 김정기  

0009 2001-07-02 15:47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 ⑦720만원짜리 배수로 공사  

0010 2001-06-30 10:30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⑥김영배의 돼지꿈 

0011 2001-06-27 11:00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⑤송산리 고분과 가루베 

0012 2001-06-25 09:33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④영동대장군과 갱위강국 

0013 2001-06-23 14:30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③음모와 반란의 시대 

0014 2001-06-20 09:00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②섬에서 태어난 사마왕  

0015 2001-06-18 09:00 일반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①한성을 등진 어린 왕자  


2001.06.18 09:00:11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①한성을 등진 어린 왕자

    ※공주 무령왕릉이 올해 7월로 발견.발굴 3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무령왕릉은 흔히 20세기 한국 고고학 및 역사학에서 최대.최고의 발견으로 꼽히지만  아울러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도 쓰고 있습니다.

    이에 연합뉴스는 당시 발굴단과 취재 기자들의 증언 및 기록, 언론보도 내용 등을 토대로 왕릉 발굴 과정과 거기에 얽힌 일화 및 성과는 물론 무령왕릉 발굴이  촉발한 고고학.역사학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짚어 보는 한편, 무령왕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는 특집을 15회 가량 마련해 매주 월.수.토요일 3회씩 송고할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기 475년 겨울 문턱인 음력 10월, 신라  구원군 1만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문주에게 이끌려 쑥대밭이 된 한성(漢城)을 등지고  남쪽으로 말을 달리는 열 세 살 어린 왕자가 있었다.

    그는 이름을 무령이라 했고 462년 왕도(王都) 한성의 왕궁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른 무령은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언젠가는 이 수모를 복수하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무령은 이 두 가지 다짐을 모두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그가 한성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40년이 걸렸다. 그가 40년만에 한성에 돌아왔을 때는 그 행색이  쫓겨내려갈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판이했다.

    백발이 성성한 62세 노인이기는 했으나 백관(百官)이 호위하는 화려한 귀향길이었다. 어린 왕자로 떠난 그가 왕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장면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왕이 재위 23년 2월에 "한성에  가서 좌평(佐平) 인우(因優)와 달솔(達率) 사오(沙烏) 등에게 한강 이북 주군(州郡) 백성 중 15세 이상 된 자를 뽑아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한 다음 (한달만인) 3월에 (웅진으로) 돌아왔다"고 하고 있다.

    한성에서 귀환한 두 달 뒤인 그해 5월 무령은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 한성 땅을 돌아보고 난 다음에야 눈을 감은 이가 1971년 7월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한 무덤에서 15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었다.

    서기 475년 14세 어린 왕자 무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 해 9월 왕도 한성으로 장수왕이 친히 이끄는 고구려 3만 대군이 들이닥쳤다. 고구려군은 1차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는 멸악산맥과 임진강 전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한 다음 한성으로 들이닥쳤다. 

    개로왕 재위 21년째이던 백제는 당시 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잦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무거운 세금 징발로 민심이 흉흉했다. 이럴 때 고구려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당시 백제 왕도 한성은 북성과 남성이라는 성곽이 한 조(組)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인들은 두 성이 남북으로 나란히 서 있다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 북성과 남성은 대체로 풍납토성과 그 남쪽 1km 떨어져 있는 몽촌토성이 아닐까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왕궁이 있던 왕성은 그 규모나 축조  시기 등으로 보아 풍납토성으로 굳어지고 있다.

    고구려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 강변에 위치한 아차산에 사령부를  마련해 놓고 먼저 북성을 향해 진격했다. 백제는 북성 전투에 총력을 투입하다시피 한 가운데 막강 고구려군의 파상 공격을 근근이 막아냈다.

    하지만 7일 낮 7일 밤만에 북성은 고구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고구려군은 곧바로 남성으로 들이닥쳤다. 개로왕은 남성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북성 전투에서 주력군이 궤멸된 가운데 남성은 맥없이 무너졌다.

    고구려군은 성문에 불을 질렀다. 이에 개로왕은 후일을 도모하고자 군사 수십명만 이끌고 서쪽 성문을 통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포위망에 걸려 포로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왕이 자리를 비운 남성 또한 함락됐다. 

    개로왕은 왕비와 그 자식들과 함께 한강 너머 고구려군 진영으로 압송됐다.  개로왕은 장수왕 앞에 끌려갔고 그 자리서 갖은 모욕을 당하고는 처형됐다. 

    아마도 이 자리서 장수왕은 "네 할아비 되는 근초고와 근구수가 우리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한 책임"을 추궁하며 얼굴에 침을 뱉었으리라.

    이 사건을 「일본서기」는 웅략천황 재위 20년 대목에서  「백제기」(百濟記)라는 지금은 없어진 기록을 인용, "개로왕 을묘년(475년) 겨울 개새끼의  대군(고구려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친 지 7일 낮 7일 밤만에 왕성이 무너지니 마침내 위례(尉禮=한성)를 잃고 말았다. 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적의 손에 몰살했다"고  비장한 어조로 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런 능욕을 당하는 장면을 뒤로 하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14세 어린 왕자 무령은 웅진을 향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모습 드러낸 연도 지붕> 

2001.06.18 09:45:50 

<고침>- 문화(무령왕릉 특집)

    ▲15일 오전 송고한 연합 H1-0173 G1-0173 문화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①한성을 등진 어린 왕자' 제하 기사 중 본문 3째줄 '열 세 살 어린 왕자'를 '열 네 살 어린 왕자'로 바로잡습니다.  (서울=연합뉴스)


2001.06.20 09:00:27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②섬에서 태어난 사마왕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501)  대목을 보면 왕은 휘(諱.생전 이름)가 사마(斯摩)인데 다른 이름은 융(隆)이었으며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재위 23년만인 서기 523년 여름 5월에 왕이 돌아가시자 무령(武寧)이라는  이름을 올렸다고 하고 있다. 무령왕의 아버지라는 모대왕은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라고 나와 있는 동성왕(東城王)을 말한다. 융(隆)은 「양서」(梁書)같은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키가 8척이요,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로워 백성들이 잘 따랐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삼국사기」 기록에는 왕에 대한 많은 정보가 누락돼 있거나 잘못인 듯한 대목도 꽤 있다.

    무령왕의 휘가 사마임은 그의 무덤에서 지석이 발견되고 거기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사실로 판명났다.

    그가 돌아간 때는 「삼국사기」와 지석 모두 523년 5월이라 해서 일치하고 있다. 단,「삼국사기」가 사망일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데 비해 백제인들이 직접 기록한 지석에는 5월하고도 7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점이 차이가 난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에는 무령이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얻었다 했는데 이 또한 지석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언제 태어났고 죽었을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가 누락돼 있다. 또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으나  개로왕의 친아들이자 작은 아버지인 곤지의 양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2) 여름 4월과 같은 책 무열천황 4년(502) 여름 4월 대목에 대단히 흥미롭게 남아 있는 무령왕의 출생 이야기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은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는 도중 한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마'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시마는 현대 한국어 '섬'과 어원이 같은 말로 생각되는데 지금 현대 일본어에서도 섬에 해당하는 단어가 '시마'이다. 

    「일본서기」 두 군데에서 사마왕은 모두 개로왕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아주 묘한 점이 있다. 「일본서기」조차 사마왕의 아버지가 개로왕인지 곤지인지 헷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까닭이 아주 없지도 않다.기록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곤지는 일본으로 떠나는 조건으로 개로왕에게 그 부인을 달라고 해서 허락을 얻는다. 한데 이 부인은 만삭이었다. 그래서 개로왕은 곤지에게 "만약 가는 길에 아이를 낳는다면  배편으로 백제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붙인다.

    사마왕은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에 츠쿠시시마(筑紫島)라는  섬에서 출생한다. 그러자 곤지는 개로왕의 말대로 사마와 그 어미를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낸다. 따라서 이 기록대로라면 사마는 개로왕의 친아들이면서 곤지의  양아들로도 볼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이런 까닭으로 백제인들은 사마가 태어난 섬을 주도(主島), 즉 임금님의 섬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아버지가 두 사람인 것처럼 헷갈리는 경우가 또 있다. 바로 김춘추의  경우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를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라 한다고  했다. 이를 종전에는 춘추의 아버지는 한 명인데 이름이 둘 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김춘추의 친아버지는  용수인데 그가 죽으면서 작은 아버지, 즉 용수의 동생인 용춘에게  맡겨졌음이  밝혀졌다. 즉 김춘추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용수나 용춘이라는 기록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두 이름이 아니라 형제 두 사람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무령(사마)이 개로왕의 친아들이자 곤지의 양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록과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 중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울까?

    아무래도 「일본서기」 쪽이 유리할 듯 하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는「삼국사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무령왕이 태어난 해(서기 462년)가 나와 있는데 무령왕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이 기록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무령왕의 생전 이름도 「일본서기」가 지석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런 근거로 보아 적어도 무령왕에 대한 족보만큼은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록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학계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제25대 무령왕과 제24대 동성왕은 어떤  관계일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을 무령의 이모제(異母弟), 즉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일본서기」 기록을 그대로 따르기에 무리가 많다.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임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두 곳이 모두 일치하고 있어 의심할 나위가 없겠는데 누가 형인지는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서기 462년 사마가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향할 때  태어났다고 하면서 그때 이미 곤지에게는 아들이 5명이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성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기록대로라면 동성왕은 사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나 있었으므로 동생이 아니라 형이 돼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는 13세에 즉위한 삼근왕(문주왕의 아들로 백제 제23대 왕)의 경우처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어린  경우는 특별히 나이가 몇 살이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동성왕의 경우 이런 언급이 없다.

    이렇게 볼 때 동성왕은 이미 즉위 당시에 적어도 20살 안팎은 됐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된다. 동성왕은 서기 479년, 그러니까 462년생인 무령이 만 17살에  즉위했으므로 「일본서기」 기록과는 달리 그가 오히려 무령의 형일 가능성도 있다.

    어떻든 이런 기록들을 통해 무령은 서기 462년에 일본의 어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 즉 섬이라는 이름까지 얻었으며 백제 왕도 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이 밝혀졌다.

    taeshik@yna.co.kr 

(끝)

<무령왕릉 연도 막음시설> 

2001.06.23 14:30:46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③음모와 반란의 시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 3만 대군에 왕도(王都) 한성(漢城)이 함락되면서 시작된 웅진시대(서기 475-538년) 백제는 음모와 반란이라는 두 마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시기 제대로 목숨을 보전하며 천수(天壽)를 누린 왕은 무령왕뿐이었다. 

    그의 아들 성왕이 재위 16년째인 서기 538년 봄에 고마나루,  즉  웅진(熊津)을 버리고 소부리(所夫里)라 일컫던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 또한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기까지 웅진 도읍기 63년간 재위한 왕을 순서대로 보면 문주왕을  필두로 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이다.

    온조왕 건국 이래 660년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기까지 백제 역사 678년간 재위한 왕이 「삼국사기」에는 31명,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34명이라 했는데,  어떻든 30여명을 헤아리는 왕중에서도 웅진시대 왕은 5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중 무령만 빼고는 4명이 비명횡사했으니(성왕 또한 사비로 옮겼다가 553년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한다) 웅진은 백제 왕들에게는 액운이었나  보다. 파란으로 점철된 이런 웅진시대를 개괄해야만 무령왕의 위치가 드러난다. 

    한성 함락 당시 개로왕을 비롯한 일족이 고구려군에  몰살당하다시피한  가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원병을 얻기 위해 신라에 가 있는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문주는 고구려군의 말발굽에 완전히 파괴된 한성을 버리고 화급히 남쪽인 웅진에 정착, 백제 부흥을 꿈꾸었다.

    하지만 재위 불과 4년만인 서기 477년 9월에 사냥을 나갔다가 지금의  국방장관쯤 되는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사주한 자객에게 살해당했고 뒤이어 13살에 즉위한 문주의 맏아들 삼근(三斤)왕 또한 왕 노릇 3년째인 479년 겨울 11월에 뚜렷한 원인을 남기지 않고 급사했다.

    삼근이 원래 병약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후맥락으로 미뤄 암살됐거나 정변 따위로 강제 퇴위됐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해구였다. 

    그는 문주왕을 죽인 역신(逆臣)이었음에도 처단되지 않고 오히려 정권을 전단하다가 삼근왕 재위 2년째인 서기 478년 봄에 은솔(恩率) 연신(燕信)이라는 자와 더불어 대두성(大豆城)이란 곳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세력이 얼마나 컸던지 왕실은 처음에 좌평 진남(眞南)에게  군사  2천명을 주어 토벌하도록 했으나 실패했으며,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00명을 동원하고서야 겨우 반란을 누르고 해구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반란 주모자인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에 백제 왕실은 연신의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자 거리에서 목베는 것으로 앙갚음을 했다.

    해구와 연신이 반란을 일으킨 대두성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으나 한성 함락 이듬해인「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재위 2년(476)조에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북쪽의 민호(民戶.백성)를 이주시켰다"고 하고  이곳에서  반란에 실패한 연신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사실로 보아 고구려와 가까운 한강 일대 어디쯤일 것이다.

    어떻든 이런 악재가 겹치는 가운데 「삼국사기」는 삼근이 재위 3년째인  479년 11월에 죽었다고 하고 있다. 

    음모와 반란의 희생자는 문주와 삼근에서 그치지 않았다. 삼근을 뒤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단명한 앞선 왕들과는 달리 20년 이상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재위하면서 백제 부흥을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재위 23년째인 서기 501년 겨울 11월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에 열중하다 폭설을 만나 마포촌(馬浦村)이라는 곳에서 머물던 중 가림성(加林城)을 지키던 백가라는 자가 보낸 자객에게 칼을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한 달만인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가에 대해 「삼국사기」는 동성왕이 암살되던 바로 그 해 기록에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에게 지키게 했다"하면서 "하지만 백가는  (가림성으로) 가지 않으려 병을 핑계로 사양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백가는 왕을 원망했다"고 암살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동성왕이 암살되기에 앞서 「삼국사기」에는 이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남발하고 있으니, 그해 봄 정월에는 서울(웅진)의 늙은 여자가 여우로 변해  사라지는가 하면 범 두 마리가 남산에서 싸우는 장면이 목격됐고 3월에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으며 5월부터 가을까지는 가뭄이 계속됐다고 하고 있다. 

    더불어 동성왕 개인 또한 바로 전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가운데 백성을 징발해 궁궐 동쪽에다가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 누각을 지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상소까지 궁궐 문을 닫아 막아 버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성왕 암살은 왕 자신의 실정(失政)과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의  합작품이었다. 따라서 동성왕에 뒤이어 마흔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즉위한 무령왕에게는 국내정치 안정과 고구려 침략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가 안겨 있었다.

    taeshik@yna.co.kr 

(끝)

 

2001.06.25 09:33:35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④영동대장군과 갱위강국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7월 8일 장마전선이 동반한 먹구름을 너울처럼 둘러쓰고 실로 1천5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에서는 무려 3천점이나 되는 각종 유물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판석 2장이었다.

    그것은 장마철을 앞두고 송산리 5,6호 고분으로 지하수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분들 주위로 배수로를 파다가 실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의 무덤방으로 향하는 무덤길 입구 한가운데 놓여 있던 매지권(買地券)이었다.

    흔히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는 글이 있다고 해서  지석(誌石)이라고도 하는 이 매지권은 벽돌로 틀어막은 아치형 무덤 방문을 처음으로 열어제낀  발굴단원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그로테스크한 돌짐승'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푸른 빛이 도는 이 매지권 위에는 무령왕 재위 때와 동시대인 중국  양나라에서 통용되던 동전인 오수전 꾸러미가 녹슨 채 자리잡고 있었다. 

    매지권은 무령왕의 것(35.2×41.5cm)과 왕비의 것(35.5×41.3cm)이 따로 있었는데 지신(地神)에게서 무덤을 쓸 땅을 돈을 주고 샀음을 입증하면서 남긴 문서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매지권이 놀라웠던 것은 무덤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임을 밝혀  주는  글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과 왕비의 지석 모두에는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10글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판독됐다.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쪽을 편안하게 한 대장군이신 백제 사마왕'이라는 뜻이다. 

    이런 매지권 내용을 접한 학계를 더욱 경악스럽게 만든 것은 무령왕이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중국 양나라에서 받았음이 「삼국사기」와 양나라 정사인  「양서」(梁書) 두 군데 기록에서 모두 확인된다는 점이었다.

    즉「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재위 21년(521) 12월 대목에는 "(양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면서 이르기를 '사지절도독 백제 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 諸軍士 寧東大將軍)이 가하다'고 했다"고 하고 있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중국이 주변국 왕에게 내리는 이런 작호가 허울이며  명예직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곤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영동대장군과 같은 작호는 중국이 알아서 주는 게 아니라 작호를  받고자  하는 나라가 적당한 작호를 직접 골라 중국 황제에게 추인을 받았다. 다시 말해 영동대장군이라는 말 속에는 백제 혹은 무령왕의 어떤 의지가 개입돼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왜 굳이 '영동대장군'을 요청했을까? 그 코드를  읽어  내야 한다.

    여기서 이런 작호가 내려지기 한 달 전인 무령왕 재위 21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을 주목해야 한다. 기록에 이르기를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여러 차례 패해 여러 해 동안 약해져 있더니 이때에 이르러 글을 보내서 처음으로 우호를  열었는데 이르기를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고 했다"고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무령왕은 이전의 고구려에 대한 일방적 열세를 딛고  일어나 오히려 고구려를 여러 차례 제압한 자신감에서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달라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 대해 이러한 자신감을 표명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무령왕 재위 무렵을 중심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훑어보면 답이 나온다.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에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이 즈음 개로왕조차  살해된 이래 도읍까지 남쪽 웅진(공주)으로 옮긴 이후에도 계속 고구려에 밀리고 있었다.

    이런 열세에다가 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음모와 반란이 끊이지 않아 22대 문주왕과 24대 동성왕은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13살에 즉위한 23대 삼근왕도  재위 3년째에 급사했다.

    무령왕은 이런 정치적 혼란기에, 특히 동성왕이 백가에게 암살당한 비상시국에, 마흔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즉위했다. 앞길이 험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을 무령왕은 대단히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극복해 갔던 듯하다. 

    이런 점에서 무령왕의 활발한 대고구려 정벌 전쟁이 주목을 끈다.

    무령왕은 즉위 무렵 반란자 백가를 처단하자마자 고구려 정벌로 눈을 돌리게 된다. 즉위 원년 11월에는 달솔(達率) 우영(優永)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치게 했으며 이듬해 11월에도 고구려 변경을 침략한다.

    수곡성은 지금의 황해도 신계 지방이다. 따라서 무령왕 때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남쪽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2년 연속 계속된 무령왕의 고구려 침공 시기가 음력 11월 한겨울인 점이 눈길을 끈다. 한겨울에 군사를 동원하는 행위는 일종의 도박이다. 적군에 앞서 혹한이나 폭설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모를 리 없었을 무령은 그럼에도  고구려의 허를 찌르듯 한겨울에 습격을 감행했다.

    어떻든 475년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에 대해 수세 일변도였던 백제는 이때를 고비로 비로소 공세를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듯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더욱  죄는데 재위 7년째인 507년 여름 5월에는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설치하는 한편 장령성을 쌓아 말갈에 대비했고 같은 해 겨울 10월에는 고구려 장군 고로가 말갈과 공모해 한성을 치려고 횡악 아래 주둔하자 이번에는 친히 군사를 끌고 나아가 싸워 물리쳤다. 

    잇따른 전쟁을 통해 무령왕은 상당한 전과를 올린 듯하다.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얻고 난 뒤에도 그는 대고구려 공세를 강화하는데 재위 23년(523) 봄  2월에는 고향 땅 한성에 친히 행차해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해 한성 북부 주군 백성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해 쌍현성을 쌓게 하고 무려 한달을 머물다가  웅진으로 돌아왔다. 

    어떻든 기록을 통해 무령왕이 중국에 요청한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나  '갱위강국'(更爲强國)이라는 선언이 허풍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은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까움이 새삼 입증됐다.

    taeshik@yna.co.kr 

(끝)

<마침내 무덤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2001.06.27 11:00:02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⑤송산리 고분과 가루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27년 1월 20일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정에 서른살 안팎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명문 와세다(早稻田)대학 국한과(國漢科) 출신인 그에게 애초 행선지는 공주가 아니었고, 교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며, 더더군다나 백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이쇼(大正) 14년(1925) 3월 식민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갔다. 거기서 고대사 강좌를 하기로 돼 있었다. 그가 평양행을 결심한  데는 다른 욕심도 있었다. 평양 일대 낙랑이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해 볼 요량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그가 인류학이나 역사학에 관심을 두게 된 데는 인류학자인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의 영향이 컸던 듯하다. 아마도 낙랑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평양을 찾은 그는 이내 실망하고 만다. 이미 이곳에는 도쿄(東京)제국대학에서 파견된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비롯한 대가들이 평양 일대  고적조사 활동을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고 그렇다고 명함을 내밀 만한 경력도 없으니 다른 쪽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나 세키노 등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두고 있던 남부지방 고적조사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숭실전문학교 교수 자리를 버리고 공주보통학교 교원이 되기로 한 것이며 관심 분야 또한 낙랑과 고구려에서 백제로 돌렸다.

    공주는 서기 475년 이래 538년까지 63년 동안 백제 도읍이 있었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백제로서는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공주 일대에는 대형  고분을 비롯한 백제 유적이 꽤 많았다. 

    요즘도 백제사, 특히 웅진 도읍기 백제미술과 백제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싫든 좋든 한번 이상은 언급해야 하는 가루베 지온(輕部滋恩.1897-1970)이라는 '백제 전문가'는 1927년 공주보통학교 교사 취임을 계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루베는 1940년 강경여고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10여년 동안 공주보통학교에 재직하면서 처음에는 국어, 즉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역사, 그중에서도  백제사를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가루베는 교직 활동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처음에 백제 기와에 열중하던 그는 이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지 1930년 초반에 접어들면서 공주 일대 백제 유적, 그중에서도 고분 발굴에 직접 손을 대게  되는데 문제는 그의 이런 행위가 정식 발굴이 아닌 도굴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자료만 보아도 그가 손을 댄 공주 일대 백제 유적은 고분만 해도 교촌리 고분군을 필두로 금학동 고분군, 소학동 고분군 등지의 23기가 확인되는데 그 시기는 1932-33년 두 해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그가 송산리 고분군을 빼놓을 리 만무했다. 이곳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으나 가루베 조사 당시에도 고분 30기 가량이 남아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왕릉급으로 생각되었기에 이름이 꽤 있었다.

    때문에 가루베가 이처럼 중요한 송산리 고분군에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가루베는 1933년에 드디어 송산리 고분군에 도굴의  마수를 뻗치는데 각각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밝혀진 제5, 6호분도 대상이었다.

    이중 백제 고분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제6호분이다. 왜냐하면 백제 고분으로는 아주 드물게 네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무엇보다 그 구조가  무령왕릉과 아주 똑같은 벽돌무덤임이 이때 가루베 조사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5, 6호분을 뒤진 가루베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산등성이에 옆으로  나란히 자리한 이 두 고분 바로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가루베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이 둔덕은 인공으로 쌓아 올린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언덕에 대해 가루베는 결론내리기를 5, 6호분을 뒤에서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주산(主山)이라고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난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는 이런 생각을 글로도 남기고 있다.

    이런 글을 보면서 우리는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루베가 5,  6호분을 보호하기 위한 주산으로 생각한 바로 그 언덕이 실은 무령왕릉이기 때문이다.

    그때 만약 가루베가 이 언덕을 파헤쳤더라면?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아마도 가루베는 무령왕릉에서 빼낸 유물 대부분을 어디론가 빼돌렸을 것이다.

    벽화가 있으면서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쌓은 6호분이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1933년 6호분 발굴에서 가루베가 어떤 유물들을 건져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가루베 자신은 1933년 조사 당시 6호분 유물은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가루베가 6호분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이 고분은 도굴당한 게 아니라 처녀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루베는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골동품상이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가루베는 인공으로 쌓아 올린 주산이라고 여겼던 언덕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직전인 1970년 세상을 떠났다. 

    혹여 가루베가 지하에서 무령왕릉 발굴 소식을 들었다면 "아뿔싸, 그때 내가 대단한 실수를 했어"라며 통분했을지 모를 일이다.

    요컨대 무령왕릉이 누린 최대의 축복은 일제 식민강점 시절 악명높은 일본인 도굴꾼의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도굴의 마수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무령왕릉은 40년 가량이 지난 뒤에  명색이 고고학자라는 사람들에게 불과 12시간만에 부장품을 몽땅 내주는 '능욕'을 당했으니, 곰을 피했다 싶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것과 무엇이 다르랴?

    taeshik@yna.co.kr 

(끝)

 

2001.06.30 10:30:17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⑥김영배의 돼지꿈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7월 4일 밤 국립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이상한 돼지 꿈 하나를 꾼다. 김영배가 공주박물관 정원에서 화목(花木)을 손질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돼지 한 마리가 덤벼드는 게 아닌가. 

    돼지는 김영배를 물어뜯어려 했다. 놀란 김영배는 돼지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진땀을 흘렸다. 

    산돼지에게 물려 죽더라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다급히 집으로 도망쳐 방안에 숨었다. 그런데 이 산돼지란 놈이 집까지 쫓아와서 방문을 부수고는  머리를 방안으로 쑥 밀어넣었다. 

    김영배는 질겁을 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이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옆에서  같이 자던 사람들이 놀라 비몽사몽 헤매는 김영배를 흔들어 깨우고서야 그는 악몽에서 벗어났다. 

    잠을 깬 김영배는 꿈이 하도 이상해서 혹 박물관에 도둑이 들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박물관에 가보았다. 하지만 별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무령왕릉 출현을 예고한 듯한 이 꿈 이야기를 김영배 자신은 글로 남기지는  않았다. 다만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인사들, 예컨대 무령왕릉이 출현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같이 지켜봤던 당시 공주사범대 교수들인 안승주와 박용진 등에게  들려  주곤 했는데,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고 지금은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로  전통조경학을 강의하고 있는 정재훈이 생전에 고인에게서 들은 꿈 이야기를 채록해 놓은 게 있다.

    그런데 돼지꿈이 예고한 것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김영배가  악몽을  꾸고 난 바로 그 이튿날인 7월 5일 마침내 20세기 한국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장마철을 앞둔 공주군 송산리 고분군. 일제 식민강점 시절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백제고분 30기 가량이 밀집해 있었으나 1971년 당시에는 6기만 남아 있었다.

    규모로 보나 구조로 보나, 웅진도읍기 백제(475-538년)의 왕릉 혹은 왕릉급으로 생각되는 이들 무덤은 일제 강점시절 이래 1번부터 6번까지 각기 번호를 차례로  매겨 구분됐다.

    문제의 송산리 고분군중에서도 산등성이 한가운데에 옆으로 나란히 붙은 돌방무덤인 제5호분과 벽돌무덤인 6호분. 본격적인 장마철을 앞두고 이들  고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두 고분 뒤쪽에서는 그 위쪽 산 능선에서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빼돌리기 위한 배수로 공사가 이레째 진행중이었다. 

    이날 공사중에 배수로 준설을 위해 땅을 힘차게 파고 내려가던  인부의  삽끝이 갑자기 둔탁한 소리를 낸다. 돌덩이 비슷한 사각형 물체가 걸린 것이다. 전돌(벽돌)이었다. 이 전돌은 나중에 밝혀졌지만 무령왕릉에서 아치형으로 생긴  무덤방  입구 윗부분, 그러니까 입구 천장을 구성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김영배의 전날밤 산돼지 꿈이 아주 묘했던 것은 무령왕릉이 이렇게 처음으로 고개를 내밀 때 지켜본 주인공이 다름 아닌 김영배요, 벽돌로 쌓아 닫은 무덤방  문을 열어제끼고 처음 발을 디딘 주인공도 김영배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를 정작 더욱 경악스럽게 만든 일은 꿈에서 본 험악한 산돼지를  다른 곳도 아닌 무령왕릉에서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무령왕릉이 7월 5일 처음 발견되고 사흘 뒤인 8일 드디어 아치형  무덤방  문을 위쪽에서 3분의 1 가량 열었을 때, 터널과 같은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던 발굴단원들은 침침한 무덤길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채 바깥쪽을 노려다보는 그로테스크한 돌짐승과 마주쳤다.

    그것은 분명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괴수였다.

    김영배뿐 아니라 갱도를 막아선 이 괴상망칙한 돌짐승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이 무덤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듯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괴동물을  처음 만난 순간을 당시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로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는 지건길의 입을 통해 들어 본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가누면서 하나 둘 벽돌을 뽑아내는 조사원들의 상기된  모습에는 미지의 세계를 열어 가는 엄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눈높이까지  뚫린 연문 틈새를 통해 플래시로 비춰진 희미한 무덤 속, 맨 먼저 시선에 부딪힌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돌로 만든 괴수 한 마리, 앞발 하나가 바닥면에서 들려 약간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맷돼지같기도 하고 쫑긋한 귀가 살찐 토끼처럼 보이고,  뭉뚝한 아가리를 헤벌린 모양이 어쩌면 하마나 코뿔소 같기도 한 그런 해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해괴한 동물이 김영배에게는 영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은 7월 4일 밤 그가 꿈에서 만나 홍역을 치른 바로 그 산돼지였던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2001.07.02 15:47:34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 ⑦ 720만원짜리 배수로 공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1971년 봄, 문화재관리국은 총예산 720만원이 투입될 문화유적 정비계획 하나를 확정한다. 사업 대상은 공주 금성동 송산리 백제 고분군이었으며, 구체 내용은 본격적인 장마철을 앞두고 송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된 제6호분과 5호분이 지하수에 침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 무덤 주위로 배수로를 내고 6호분 내부 실내 조명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두 고분 중에서도 제6호분이 특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 고분은 1933년 8월1일 공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자가 무단  도굴을 하다가 확인된 것인데 무덤 방과 입구를 전부 벽돌로 쌓아올린 이른바 전축분(塼築墳)이었던 데다 무덤방 네 벽면에 각각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사신도(四神圖)를 그려 놓은 벽화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배수로 공사에서 묘한 대목은 장마철 대비가 목적이었음에도 실제 공사에 착수한 시점은 장마전선이 한반도에 상륙해 한창 기승을 부리던 그해  6월29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즈음 장마전선이 동반한 폭우와 장마 막간에 잠깐 잠깐 내리덮친 폭서로 우리나라가 얼마나 몸살을 앓았는지는 당시 신문 보도에서 잘  드러난다.

    예컨대 7월6일자 중앙일간지들은 일제히 장마 및 폭서로 인한 전국 인명 피해를 전하고 있는데 7월4-5일 이틀간 익사자만도 23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장마전선이 상륙했음에도 무더위의 위세는 대단했던 모양인 듯 7월5일  경북 포항의 수은주는 34.7도까지 치고 올라갔고, 한국일보 허영환 기자의 특종보도로 송산리 고분군에서 새 백제왕릉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하루 전인  7월7일에는 제주도 기온이 29년만의 최고인 36.5도를 기록했다.

    배수로 공사가 시작된 지 일주일 동안 공주 송산리 고분군 또한 폭우와  폭염이 오락가락하는 최악의 기상조건이 이어지고 있었다.

    배수로는 기울기가 완만한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5-6호분 바로 뒤쪽을 둘러 파기로 돼 있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위쪽에서  흘러내리는 지하수 맥을 잘라, 배수로를 통해 5,6호분으로 흘러드는 물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배수로 크기에 대해 무령왕릉이 첫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때마침 공주  지방에 출장나가 있다가 문화재관리국의 급보를 받고 송산리 공사 현장에 출동한 당시 문화재관리국 건축기사 윤홍로는 폭 1.5m, 깊이 1m 가량으로 기억하고 있다.

    배수로 공사는 삼남건업이라는 토목업체가 맡았고 당시 현장 소장은 김영일이었다. 지금도 건설현장이나 발굴현장에서 대개 그렇듯이 당시도 공사나  발굴  시작에 앞서 조촐한 제사가 있었다. 이런 제사는 땅의 신에게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기 마련이다. 제사상이 거창할 필요는 없었다. 북어 몇 마리  올려놓고 술 한잔 올리는 게 전부였다.

    어떻든 이렇게 시작된 배수로 공사 꼭 일주일만인 7월5일 수은주 바늘이 가르키는 숫자가 30도을 훌쩍 넘긴 뙤약볕 아래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배수로 건설을 위해 힘차게 내려친 인부의 삽끝에 무령왕릉을 쌓아올린 전돌 중  하나가 우연히 걸림으로써 20세기 한국고고학 가장 위대한 발굴은 서막을 연다.

    이렇게 해서 실로 1500년만에 전모를 드러낸 무령왕릉은 발굴을 하고 보니,  맨처음 인부의 삽끝에 전돌이 걸린 장소가 우연의 장난인지, 아니면 제사상의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배수로 공사에 앞서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 바로 그곳, 즉 아치형으로 벽돌로 틀어막은 무령왕릉 입구의 맨 윗부분이었다.

    taeshik@yna.co.kr 

(끝)

<발굴단원인지 기자인지 짓밟아 부러뜨린 청동숟가락> 

2001.07.04 12:34:01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⑧일본출장을 떠난 김정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0년대 이래 각종 굵직한 국가  주도  고고학 발굴사를 이야기할 때 김정기(金正基)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3년에는 경주 천마총을 발굴했고 이듬해부터는 곧바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대총 발굴에 매달렸으며 그 후 잇따라 진행된 안압지와 월성해자,  황룡사터, 익산 미륵사터 등등의 발굴은 모두 김정기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김정기는 원래 고고학자가 아니라 건축학자였다. 

    일제 식민강점 시절인 1930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1943년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가케가와중학교에 입학했으며 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해  창녕공립중학교를 거쳐 1950년 마산 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56년 메이지(明治)대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해 공학사 학위를 따면서 그해  도쿄(東京)대 공학부 건축사연구실 조교가 됐다.

    조교 생활 4년째인 59년 어느날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한국측 일원이었던  황수영(당시 동국대 교수)이 불쑥 찾아왔다. 황수영은 고려대 교수 이홍직과 함께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날 만남에서 황수영은 김정기에게 한국에 돌아와 일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정기는 일본에서 다른 계획이 있었다.  지바(千葉)현 어떤 사찰의 관음전이 해체 수리중이었는데 그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4-5년 정도 더 일본에서 머물고자 했던 김정기의 계획은 황수영이  한국에 돌아가고 난 뒤 고국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을 받고는 전면 수정됐다.

    그에게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이었다. 김재원은 이 편지에서 귀국해 박물관에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정기는 "국립박물관장이라는 분이 나한테 손수 편지를 써서  요청하셨고,  또 나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1959년 돌아왔다"고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김재원에게 김정기를 추천한 사람은 황수영이었을 것이다.

    돌아온 그해 10월 김정기는 국립중앙박물관 보급과 학예연구관이 되고 61년 1월에는 고고과 학예연구관이 됐으며 64년에는 고고과장에 취임한다.

    이런 그에게 69년은 또 다른 전환기였다. 문화재관리국이 문화공보부 외국(外局)으로 독립하면서 문화재연구실이라는 문화재 조사 전문기관을 창설했는데 그해 11월 초대 실장으로 김정기가 취임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출발과 더불어 국가 주도 발굴을 전담한 문화재연구실은  75년 현재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명패를 바꿔 달게 됐는데, 김정기는  문화재연구실장 6년을 포함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18년을 일하다가 87년 명예퇴직했다.

    김정기가 천마총 이래 여러 대형 발굴에 관여한 것도 이런 경력때문이었다.

    그런데 후세가 김정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그가 한국 고고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 가운데 비록 건축학 전공이긴 했으나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남한  최초의 고고학자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는 없다.

    59년 귀국하기까지 김정기는 일본을 대표한다는 유서깊은 사찰인  오카사(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를 비롯한 일본 고대 절터 발굴에 직접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고고학 발굴은 실측(實測)을 비롯한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가 귀국할 당시 남한 고고학은 명색이 고고학이었지 그 수준은 그냥 파헤치는데 불과했고 실측이란 개념은 더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불모지인 남한 고고학은 김정기가 귀국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유물과 유적에 대한 실측이라는 개념이 도입됐고 나아가  사찰  혹은 사찰 터와 같은 고대 건축물에 대한 발굴 및 해체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정기의 약력, 그중에서도 그가 문화재연구실장 및 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재임했던 69-87년을 살펴볼 때 특이한 점은 71년 7월 대목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공주 무령왕릉 발굴조사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71년 7월에 있었다. 이때 발굴조사기관은 문화재연구실이었다. 물론 발굴을 실제 쥐락펴락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룡과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였으나 서류상으로 보면 김원룡과 김영배는 문화재연구실 조사를 자문하고 지도하는 말 그대로 '자문위원'에 불과했다.

    발굴단장은 당연히 문화재연구실장인 김정기여야 했다. 그러나 김정기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71년 7월부터 10월까지 모두 4차에 걸친 조사가 있었으나 무덤에서 유물 3천점을 몽땅 들어낸 1차  발굴이 가장 중요하고 그 이후 추가 발굴은 수습 혹은 뒷정리에 불과했다.

    김정기는 왜 무령왕릉 1차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는가? 

    그해 7월 초순 어느날 오전 김정기에게 보고서 하나가 올라온다.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석회 흙과 전돌(=벽돌)이 발견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날 김정기는 일본 출장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때문에 그 보고를 뒤로 하고 예정대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전돌을 출토한 곳이 무령왕릉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김정기는 이 보고를 받은 정확한 날짜와 당시 일본 출장 목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전돌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보고를 받은 날짜는 틀림없이 7월 5일이었을 것이며 그때 김정기는 박정희의 지시로 불국사  복원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자료 수집이 일본 출장 목적이 아니었던가 싶다. 

    김정기가 귀국한 것은 무령왕릉 2차 발굴이 시작되기 전이었다고 한다. 2차  조사위원 명단에 김정기라는 이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든 김정기가 무령왕릉 1차 발굴조사에 참여하고 못하고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많은 고고학계 인사가 "김정기 박사가 있었더라면 무령왕릉을 그처럼 졸속 발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고고학 종사자 가운데 발굴은 어떻게 해야 하며 또 그 과정에서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실측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 김정기였다.

    물론 이런 가정에 대해 김정기 자신은 "그때 현장에 없었고 또  현장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도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또 설사 내가 있었다 한들 하룻밤만에 발굴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기는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주도했다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살다가 93년 먼저 세상을 뜬 김원룡이 생전에 자기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했다.

    "삼불(김원룡의 호) 선생이 어느날 나한테 그럽디다. '내가 잘못해서  무령왕릉을 저렇게 만들고 말았노라'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때 누가 발굴했어도 그랬을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물론 김정기가 있었다고 해서 졸속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김정기가 하필 송산리 고분군에서 전돌이 출토되던 날 일본 출장을 떠난 것은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위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할지언정 필요조건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taeshik@yna.co.kr 

(끝)

 

2001.07.07 12:36:09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⑨공주에 간 관장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7월 7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허영환은 매일처럼 이날도 오전 10시쯤 서울시청 옆 덕수궁 석조전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다.

    당시 문화공보부를 출입처로 하면서 그 산하 문화재관리국과  국립중앙박물관도 아울러 취재했던 허영환이 회상하는 30년 전 이 무렵 그의 오전 취재코스 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경복궁 안 문화공보부  본부와 역시 경복궁 안에 있던 문화재관리국을 들른 다음 오전 10시쯤 걸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그날 취재 거리를 챙긴 뒤 낮 12시쯤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로 오곤 했다.

    박물관에서는 대체로 김원룡 관장실이나 한병삼 고고과장실이 허영환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김원룡과 한병삼은 허영환의 주요 취재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7월 7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이런 일정을 그대로 따라  문화재관리국에 들른 허영환은 문화재과장 장인기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국장실로 간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허련. 나중에 전남지사를 역임한 허련에게 허영환은 "장 과장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느냐"고 물어 봤다. 이 질문에 허련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환은 덕수궁 석조전 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장실에 들른 그는 여비서에게 "관장님 계시느냐"고 물었다.

    여비서는 "관장님은 공주에 내려가셨다"고 대답한다. 순간  허영환은  관장까지 내려갈 정도면 공주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허영환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도 자리를 떴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허련 문화재관리국장을 다시 찾아가 "공주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다그치게  된다. 그제야 허영환은 "송산리 6호분 방수공사가 있는데 그때문일 것"이라는 대답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정보를 캐낼 수 없던 허영환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 계장에게 "공주 송산리 6호분 방수공사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캐물었다. 계장은 깜짝 놀라면서 "별 일 아니다"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공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으나 허영환은 기자의 직감으로 큰 일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는 이원홍 편집국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공주로 내려가 보아야겠다"는 보고를 해서 취재  허가를 받는다.

    허영환은 사진기자 1명과 함께 무작정 공주로 향했다. 허영환의 기억에  따르면 이날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그의 기억은 당시 신문보도를 확인해 볼 때  정확하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7월 7일 충청지방 일대에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어떻든 폭우를 뚫고 이날 오후 겨우 공주에 도착한 허영환 일행은 물어물어  김원룡이 머물고 있던 한 여관을 찾아내게 된다.

    허영환이 여관에 들이닥쳤을 때 그곳에는 김원룡과 당시 동국대  교수  황수영, 문화재과장 장인기 등이 있었다. 이 순간을 허영환은 "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니까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여관은 어디인가? 허영환 자신도 여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조사연구실 김정기 실장이 때마침 7월 5일 일본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엉겹결에 발굴조사 팀장이 된 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관 이호관은 "금강여관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금강여관은 무령왕릉이 20세기 한국고고학 최대 최고의 발굴이면서 동시에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어떻든 금강여관에서 김원룡 일행은 무슨 '공작'을 벌이고 있었을까?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발견돼 입구를 겨우 드러낸 한 전축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난데없이 기자가  나타난 것이다. 전축분 발견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있던 김원룡 일행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영환이 공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전축분이 무령왕릉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떻든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조사단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속된  말로 더 이상 숨기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허영환이 다른 경쟁지 기자들의 견제없이  그 다음날, 그러니까 1971년 7월 8일자 한국일보에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제목의 대형 특종기사를 쓸 수 있었고, 나아가 무령왕릉 관련 보도에서 한국일보가 다른 경쟁지들을 제치고 내내 선두를 유지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모두 허영환 한 개인의 진술이고, 더구나 30년 전의 회상이라 그의 증언이 얼마나 객관적이며 정확한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이 때 일을 제대로 증언해 줄 주요 인사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생존해 있다 해도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고, 허영환  자신도  무령왕릉 발굴 특종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으므로 그의 증언을 채록해 둔다.

    김원룡은 1993년에 작고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글 이상의 증언을 들을 수는  없고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던 윤주영이나 당시 문화재관리국장 허련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만 할 뿐이다.

    허영환이 기억하는 당시 금강여관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여 두고자 한다. 허영환 일행이 공주로 내려간 바로 그날 저녁, 김원룡 일행이 머물고 있던 금강여관에 도둑이 들어 발굴조사단의 물건을 몽땅 털어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taeshik@yna.co.kr 

(끝)

<무령왕이 지하신에게 바친 돈꾸러미 "잘 봐주이소"> 

001.07.09 15:24:13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⑩영문도 모른 발굴단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윤홍로가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현장에서 수상한 전돌이 출토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출동한 것은 7월 6일 오후였다.

    홍익대 건축학과 출신의 윤홍로는 문화재관리국 7급 건축기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송산리 배수로 공사현장 감독관이기도 했다. 7월 6일 부여에 있던 그에게  와달라는 급보를 보낸 사람은 공사 현장소장인 삼남건업 김영일이었다.

    윤홍로가 달려갔을 때 공사현장에는 김영일을 비롯한 공사 관계자 및 인부들 말고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와 공주사범대 교수들인 안승주, 박용진이었다. 

    안승주와 박용진은 김영배가 대단히 아끼는 후배였고, 이들 셋은  공주박물관에서 자주 모였다. 현장소장 김영일은 윤홍로 말고도 김영배에게도 연락을 취했던  것인데 김영배가 박용진과 안승주를 송산리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윤홍로가 현장에 닿았을 때 벽돌로 쌓아 올려 만든 송산리 6호분 뒤쪽,  그러니까 산쪽으로 3m 가량 올라간 북쪽 배수로 현장에는 전돌을 쌓아올린 무슨  단  같은 시설이 드러나 있었다. 이때 상황을 윤홍로는 "아마 전돌이 세 겹 정도 확인되지 않았나 한다"고 기억하고 있다.

    새로운 고분이거나 6호분과 관련있는 어떤 시설물일 가능성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전돌이 나온 주변을 더 파내려갈 필요가 있었다.

    김영배의 지휘 아래 작업이 계속됐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전돌을 몇 겹  쌓아 올린 단이 끝나고 그 아래로 아치 모양의 문같은 시설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문같은 아치 모양 시설에는 또다른 전돌이 마치 입막음을 한 듯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제 더이상 의문이 필요없어졌다. 새로운 고분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백제 왕릉임이 분명한 송산리 6호분과 똑같은 구조로 점점 밝혀짐에 따라 이 또한 새로운 백제 왕릉일 가능성에 현장은 아연 흥분의 도가니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윤홍로서는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작업중지'라고 외쳤던  것이다. 말하자면 직권 명령과도 같았다.

    아무리 문화재관리국 소속이라 하더라도 7급 건축기사에 불과한 윤홍로의 이 난데없는 선언에 김영배와 안승주, 박용진이 반발했다. 무슨 소리냐? 계속 더 파고 내려가자고 윤홍로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홍로는 단호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일단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고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작업을 중단시킨 윤홍로는 절대 추가 발굴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신신당부하고 그 길로 공주우체국으로 쏜살같이 내달았다. 수화기를 든 윤홍로는 서울 경복궁  안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관리과장 장인기에게 직보를 했다. 

    이 대목을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직을 잠시 휴직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었고 무령왕릉 발굴을 지휘한 김원룡은 "또 하나의  전축분의  출현이라고 판단한 김영배는 공사를 그 시점에서 중지시키고 7월 6일 공사  주관청인  공주군청 문화공보실로 하여금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고 작업 방향에 대한 새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착오이다.

    공사를 중지시킨 것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한 것도 윤홍로였다.

    어떻든 윤홍로는 "송산리 6호분 배수로 현장에서 백제 왕릉으로 판단되는  전돌 열이 확인되고 있다. 현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을 내려 달라"는 요지의  보고를 장인기에게 했다.

    장인기는 즉각 허련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현재의  경복궁 안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무실에 본부가 있던 문화공보부에도 알렸다.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윤주영.

    보고를 접한 문화공보부는 윤주영 주재 아래 허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서 윤주영은 현장에 누굴 보내면 좋을까 하고 허련과 의논한  결과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 직원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발굴단장을 맡아야 할 문화재연구실장 김정기가 새로운 왕릉  출현 소식이 전해진 6일 공교롭게도 일본 출장을 떠나고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고심하던 윤주영은 김원룡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허련이 김원룡을 추천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을 김원룡은 나중에 쓴 회고록에서  윤주영이  "김 아무개"라는 이름을 세 번 부르며 자신을 찾았다고 쓰고 있다.

    문화공보부와 문화재관리국 상황이 이렇게 급박히 돌아가던 무렵  다시  송산리 현장.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를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온 윤홍로를 다시 김영배와 박용진, 안승주 등은 계속 발굴을 하자고 윽박질렀다. 

    이에 대해 박용진도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즉 그는 "윤홍로씨에게  '당신이 문화재관리국 대표이니까 우리는 당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굴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이에 윤홍로씨는 '나는 건축쟁이일 뿐 발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라며 거부했다"고 말하고 있다.

    윤홍로는 1939년생이니까 당시 32살이었다. '애송이'에 불과했던  그가  여하튼 공주박물관장과 현지 교수들의 발굴 욕구를 중지시킨 것은 여하튼 대단한  뚝심이라고 봐야 한다. 

    어떻든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에서 조사단이 파견된다. 조사는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의 미술공예계 담당이었다. 이 부서 담당 계장이 학예연구관인 이호관이었다. 우리 나라 학예사 1호임을 자부하는 이호관은 연세대 사학과 출신으로 당시 전도출납금 담당 공무원이기도 했다.

    전도출납금이란 돌발상황 발생 때 긴급히 쓸 수 있도록 배당된 돈을 말한다.

    현지에 내려갈 발굴단으로는 이호관을 팀장으로 하고 학예사인 손병헌,  그  한 등급 아래인 학예사보들인 조유전, 지건길이 가기로 돼 있었다. 이들을 지도할 사람으로는 윤주영이 세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는 김원룡으로 결정됐으며 행정지원을  위해 장인기 문화재관리과장도 포함됐다.

    이런 결정 과정을 거쳐 발굴단은 7월 7일 공주로 급파된다. 장인기를 비롯해 이호관,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5명은 이날 오전 일찍 발굴장비를 챙겨 서울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공주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호관은  "우리는 공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본부에서 가라고 하니까 무작정  갔다"고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원룡은 오전 팀에 합류하지 않고 오후  3시경에야 공주에 도착했다.

    이 사이 공주에 내려갔던 이호관은 공주에 도착한 그날 오전 다시 서울행  직행버스에 올라야 하는 촌극을 벌이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이호관은 "전도출납금으로 가지고 내려간 돈이 너무 적어 발굴에 소요될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호관은 서울로 떠나면서 지건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절대 내가 다시  내려올 때까지 더이상 발굴하지 말라"

    하지만 이날 오후 늦게 서울에서 돈을 들고 내려온 이호관을 송산리 발굴현장에서 맞은 것은 전면이 완연히 드러난 무덤 입구였다. 서울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 윗부분 일부만 드러난 아치형 무덤방 문은 이호관이 다시 현장에 돌아왔을 때는  전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주인공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인 줄 꿈에도  몰랐던  이 능은 세계 고고학사상 유례가 없는 12시간 야간 졸속 발굴이라는 선로를 따라  서서히 굉음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2001.07.11 15:04:42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⑪북어 세 마리로 차린 제사상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7월 7일 오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와 이호관을 팀장으로 하는 문화재연구실 조사단 4명이 도착한데 이어 이날 오후  3시쯤에는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룡이 현지에서 합류함으로써 발굴단 진용은  갖춰졌다.

    공주 현지에서는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와 공주사범대 교수들인 안승주, 박용진이 합세했다. 김원룡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무령왕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알기 어렵다.

    다만 김원룡이 남긴 글 한 대목을 보면 이날 오후 도착하자마자  "우선  문제의 전벽(塼壁-전돌로 쌓은 벽)과 아-치형 구조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전벽 앞에 방형(方形. 사각형)의 수광(竪壙)을 파 내려가기로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방침에 따라 본격 발굴은 이날 오후 4시쯤 시작됐는데 이때 상황을 김원룡은 "전벽 정상으로부터 약 1m 밑에서부터 아-치형 입구를 횡적(橫積.옆으로 쌓기)한 전(塼)으로 폐색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증언이 정확하다면 김원룡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령왕릉은 전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위쪽 벽면 일부와 그 한가운데서 아치형으로 생긴 무덤방 입구 윗 부분이 겨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원룡에 따르면 무덤 전면만큼은 완전히 노출시킨 다음 본격 발굴은 다음날 들어가기로 이날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첫날 발굴작업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8일 자정 30분 전까지 계속됐다. 무령왕릉 입구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 때쯤 이날 오전 공주 발굴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발굴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려 서울로 되돌아갔던 이호관이 다시 도착했다.

    이때 작업 진척상황에 대해 김원룡은 매우 더뎠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전축분 입구 쪽 땅이 대단히 단단했고  둘째는 저녁 무렵 내리기 시작한 비가 갑자기 폭우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때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는 "양동이처럼 쏟아붓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엄청난 비는 난생 처음이었다"는 이호관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폭우로 돌변한 비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다. 아치형 무덤방 입구가 있는 무덤 앞면을 완전히 노출시키기는 했으나 이를 위해 마치 구덩이식으로 땅을  파내려간  게 문제였다. 빗물을 빼낼 곳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는 장마철이었는데도  혹여 있을지 모를 비 생각을 아무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빗물은 점점 고이고 있었고 자칫 무덤 안쪽으로 역류해 들어갈  염려가 생겼다. 놀란 발굴단은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허겁지겁 구덩이 한쪽  귀퉁이를 파헤쳐 배수로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이 7일 밤 11시 30분쯤이었다고 한다. 칠흑 같은 밤을 뚫고 배수로 개설 작업을 한 것이다.

    폭우다, 배수로 작업이다 하면서 발굴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폭우를 뚫고 홀연히 나타난 한 인물이 김원룡을 비롯한 발굴단을 경악하게 한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허영환이 사진기자 1명을 대동하고 난데없이 이날  저녁 무렵 김원룡이 머물고 있던 동명여관에 나타난 것이다.

    허영환은 분명 공주에 도착한 첫날인 7일에는 송산리 발굴 현장에는 가보지  못했고 이날 오후 6시쯤 김원룡을 여관에서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자신이  이날 자정 무렵까지 마치 무령왕릉 발굴현장에서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 개설 작업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김원룡의 증언과 배치되는 듯하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있는 조유전은 "내 기억으로도 7일은 그렇게 늦게까지 작업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하고 있다.

    혹시 김원룡을 비롯한 발굴단은 현장에서 철수하고 인부들만 남아 이날  자정께까지 배수로 공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원룡은 또한 "이 무렵부터 전축분 출현의 뉴스를 들은 서울의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김원룡의 착각이 아닌가 싶다.  첫날  현장에 나타난 기자는 허영환 정도였고 다른 언론사 취재단이 물밀듯이 밀려든 것은 허영환이 '공주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기사를 조간(지방판) 1면에 보도한  8일이었기 때문이다.

    발굴단이 철수하고 난 다음 밤새 현장을 지킨 것은 공주경찰서였다. 

    발굴단 숙소는 두 곳이었는데 김원룡을 비롯한 이른바  수뇌급은  동명여관이란 곳에 묵었고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과 같은 '졸병'들은 금강여관에 투숙했다. 

    그러면 허영환은 어떻게 했을까? 고급 정보를 캐내려면 수뇌급에 붙어야  한다. 그래서 허영환은 동명여관을 골랐다. 그것도 김원룡 바로 옆방을 잡았다. 

    날이 밝자 억수같던 폭우도 씻은 듯 사라졌다. 8일 새벽 5시쯤 현장을 다시  찾은 발굴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히도 걱정했던 빗물은  말끔히  빠져 었었다. 

    이 대목을 김원룡은 "8일 아침 5시에 발굴단 간부들은 보도진과 함께  현장으로 가 보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때 동행한 기자로는 허영환에 따르면 그를 포함해 지방지 및 중앙지 지방주재 기자 몇 명이 있었다고 한다.

    발굴은 이날 오전 8시에 인부 12명을 투입한 가운데 재개됐다. 전날 채 파지 못한 무덤 입구 쪽을 완전히 노출시켜야 했다.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로 작업은 미적댔다. 왜냐하면 무덤 입구 쪽 땅이 석회가 섞여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날 오후 3시쯤에는 무덤 입구 바닥까지 완전히 모습이 드러났다. 수많은 전돌을 가로눕혀 차곡차곡 쌓은 벽면 한가운데로 누가 봐도 무덤 방  입구로 생각할 수 있는 아치형 문이 완연해진 것이다. 이 무덤이 그 바로 앞쪽 송산리  6호분과 거의 똑같은 전축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벽돌로 덕지덕지 쌓아놓은 아치형 문을 뚫고 들어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무령왕릉은 공개적으로 발굴된 최초이자 마지막 유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의 모든 발굴 장면과 현장이 고스란히 일반인에게도 공개됐기  때문이다.  발굴단이 현장을 공개하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오전 전축분 발견 뉴스를 듣고 각 언론사 취재단은 물론이고 공주 현지 주민들까지도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당시 발굴 장면 사진들을 보면 발굴단이나 취재진은 물론이고 아이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할 현지 경찰관들조차 경비는 뒷전인 채 발굴 현장을 보겠다고 서로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웅성대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최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분위기는 돌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보다 취재진이 김원룡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빨리 무덤을 열어 보라고 아우성쳤다. 덩달아 공주 주민들도 가세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닫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과 아우성을 뒤로 하고 발굴단은 무덤 문을 열기에 앞서 제사상을  차렸다. 이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 줄도 모르고 발굴단이 제사를 올리는  장면이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데 제사상에는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덩이가 올라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는 잘 판독되지 않으나 제사에 빠질 수 없는 술로는 막걸리가 동원됐다고 한다. 제사상을 물린 뒤 드디어 김원룡과 김영배가 1500년 동안이나  막혀  있던 무덤방 입구 전돌을 걷어내기 시작하니 이 때가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15분이었다.

    taeshik@yna.co.kr 

(끝)

<널부러진 관재와 유물> 

2001.07.14 11:41:52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⑫유령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 줄도 모르고 지낸  위령제를 끝낸 다음 김원룡과 김영배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치형으로 생긴 무덤방 입구를 채우고 있던 벽돌 무더기 중 가장 위쪽 두 장을 걷어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무덤방 입구 벽돌무지는 맨 아래쪽,  그러니까  방으로 치면 문지방에 해당하는 3단만 석회 다짐을 했을 뿐 그 위쪽으로는 이른바 공돌쌓기라고 해서 벽돌을 그냥 포개놓은 데 불과했다. 따라서 벽돌을 걷어낼 때 별다른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김영배와 김원룡이 한 개 두 개, 벽돌을 빼내자 갑자기 30도를  웃도는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할 만한 찬공기가 "쏴"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덤 안쪽에서 새어 나왔다. 1500년 동안 꽉 닫혔던 무령왕릉이 드디어 속살을 드러내는 이 장면을 김원룡은 "안에 있던 찬공기가 스며나오면서 따뜻한 바깥 공기에 일순간의 결로(結露)현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자동차의 에어컨을 틀었을 때 흰 수증기를 내뿜는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때가 오후 4시15분쯤이었다. 

    어쨌든 벽돌 몇 장을 들어냈을 때 어두컴컴한 무덤 안쪽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원룡의 회상에 따르면 이것과 비슷한 벽돌무지 입구 시설이  하나 더 있거나 문짝 같은 시설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벽돌을 들어낸 구멍 뒤를 가로막고 선 것은 어두침침함뿐이었다. 결로현상이 이윽고 가라앉았자 뚫린 입구 너머로 고개를 들이민 김원룡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깊이가 얼마인지 확실치 않은 아치형 터널이었다. 이 터널이 곧  무령왕  부부를 안치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무덤길이었던 것이다.

    당시 무덤길 모습이 어떠했는지 몇 장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천장에서는 마치 양파뿌리 모양 같은 나무뿌리가 치렁치렁 뻗어내려 있었다.

    무덤방을 김영배와 김원룡이 맨처음 들어갔다 나온 바로 뒤 들어간 발굴단원 조유전(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마치 유령집과 같았다"고 첫발을 디딘 소감을 회상하고 있다. 뿌리의 나무는 아카시아였다. 

    그런데 무덤방 한가운데로 아주 괴상망측하게 생긴 물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이는 발굴자들을 모두 놀라게 했고 지건길(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그로스테크'라고 묘사한 이 물체는 곧 무령왕 부부 무덤을 지키는 외뿔 돌짐승으로 밝혀졌다. 말하자면 이 돌짐승은 중국 고분에서 흔한 진묘수(鎭墓獸)였고  무령왕릉의 유니콘이었던 것이다. 

    김원룡은 이 때 돌짐승 앞에 가로 놓인 지석 두 장을 알아보았다고 했으나 이는 나중에 확인한 사실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석인 줄도 몰랐거니와 거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도 나중에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벽돌을 더 걷어내자 무덤 안쪽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덤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무덤방의 흔적도 보였고,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검은 물체도 널부러져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알아 볼 수 있었다.

    발굴단원은 말할 것 없고 발굴 장면을 바로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던 취재진이나 공주주민, 심지어 현장 경비를 맡은 공주경찰서 소속 경찰관들도 흥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덤입구를 열어제끼고 그 안쪽을 김원룡과 김영배가 '탐사'하고 나오기까지 발굴단원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정체불명의 이 벽돌무덤이 도굴이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백제 고분은 무령왕릉이나 그 바로 앞쪽 송산리 6호분과  같은 전축분은 말할 것도 없고 돌방무덤 또한 엄청난 돌과 흙을 쏟아부어 만든  신라무덤에 비해서는 구조적으로 아주 손쉽게 도굴할 수 있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무덤입구에 뚫린 흔적이 없다고 해서 이 무덤이 도굴분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함으로 발굴단원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입구를 통하지  않더라도  벽쪽이나 천장 쪽으로 얼마든지 구멍을 뚫어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덤입구를 막고 있던 벽돌은 앞서 말했듯이 어떤 접착제 없이 그냥 포개놓았기 때문에 걷어내는 작업은 매우 수월해 5분 가량이 지났을 때 이미 벽돌은 무릎  높이 정도까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김원룡과 김영배는 벽돌을 걷어내면서 서로에게 흥분하지 말자고 속삭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발굴단이 흥분한다면  주위에서 숨죽인 듯 지켜보던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칠 태세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릎높이로 남은 입구 벽돌을 드디어 넘고 들어간 김원룡과 김영배를 맨처음 맞은 것은 무덤방 오른쪽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네 귀가 달린 청자와 그  반대쪽에 역시 넘어져 있는 또다른 네귀 달린 청자, 동잔 등이었다.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간 무덤길 한가운데쯤에서 바깥에서 눈여겨보았던 돌짐승을 살폈으며 이 괴상망측한 동물 앞발에 가로놓인 돌판 두 장도 눈에 띄었다.

    김원룡은 돌판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글자를 읽었다고 하는데 김영배와 아주 가까웠고 발굴에 참여한 전 공주사범대 교수 박용진은 "무덤방을 다 돌아보고 난 다음 바깥으로 나오면서 김영배가 돌판 글자를 알아보았다"고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다.

    돌판, 즉 지석에 적힌 사마왕이 무령왕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사람이 김영배이니 아무래도 박용진의 증언이 좀더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지석 판독이야 언제 했건 무덤길을 지나 무덤방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이  무덤이 도굴피해를 보지 않은 백제고분, 그것도 왕릉임이 확실하다고 보고 크게  흥분했다. 

    허리를 구부린 채 무덤길을 지난 두 사람은 드디어 무덤방안으로 들어섰다.  무덤방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넓고 높았다. 커다란  아치형 방이었다. 전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구조였다. 벽돌은 각양 각색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무덤방 군데군데에는 봉창처럼 파 놓은 공간 몇 개가 있었고 거기에는 등잔이 놓여 있었다. 아마 무덤 주인공을 지키던 등잔이리라.

    바닥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시커먼 나무널이 폭삭 내려앉아  있었는데 바닥은 푹신푹신했다. 나무뿌리가 얼기설기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장면을 김원룡은 회고록에서 발굴 보고서를 쓰듯이 무덤방 어느 어느 곳에는 어떤 어떤  유물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나중에 밝혀진 사실들을 취합한데 불과하다. 무덤방에 들어갔다 나온 20분 가량 본 것이라곤 무덤 구조와 널부러진 나무 관재 정도였다. 왜냐하면 무덤방이 어두웠던 탓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  중요한 유물 대부분은 관재에 파묻혀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덤길에 들어설 때였는지, 아니면 무덤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었는지  김원룡과 김영배의 흥분은 돌짐승 앞에 가로놓인 지석 두 장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글귀를 희미하게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경악하고 만다.

    사마왕이 백제 제25대 무령왕임을 맨 먼저 알아차린 것은 김영배였다는  증언에는 엇갈림이 없다. 일제 식민강점기에 공주박물관 전신인 공주분관에  일하기도  한 김영배는 뚜렷한 학력은 없으나 백제사에 관한 각종 기록을 꿰뚫고 있던 재야사학자였다.

    이런 그가 지석의 사마왕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사마왕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김원룡에게 "무령왕입니다"고 외친 것이다. 지석은 무령왕 것뿐 아니라 왕비의 것도 함께 확인됐다.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 부부임이 확실해졌다.

    당시의 감격에 대해 김원룡은 "손 하나 대지 않은 완전한 백제 왕릉, 그것도 백제 중흥의 대왕 무령왕의 능이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고학 하는 사람으로서 누가 가슴 떨리지 않겠는가"고 회상한다. 

    하지만 어쩌랴. 흥분과 감격이 지나치면 때로는 '환장'으로 치닫고 머리가 돌아버리기도 한다. 속된 말이라고 할 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김원룡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고고학자라면 평생 한 번도 맞기 힘든 이 엄청난 발견은 세계고고학 사상  유례가 없는 졸속 발굴을 불러오고 말았으니 이미 무덤에 간 김원룡에게 "당신은 그  때 왜 그랬소?"라고 따질 수도 없는, 그저 통탄스러울 일일뿐이다. 

    taeshik@yna.co.kr 

(끝)

 

2001.07.16 14:59:10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⑬송산리의 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김원룡과 김영배가 무덤방을 둘러보고 20분만에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과 다른 발굴단원 및 공주 주민들이 웅성웅성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빨리 결과를 발표하라는 독촉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무령왕릉임을 확인한 흥분이 가실 줄 몰랐던 김원룡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이 무덤은 백제 사마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지석을 갖춘 완전분(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입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사마왕이 누구냐는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문화재관리국 소속 건축기사 윤홍로가 겉장이 빨갛고 손바닥에 들어올만큼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김원룡에게 보였는데 그것은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동양연표」였다.

    윤홍로는 부랴부랴 서기 501년이 무령왕 즉위년이라는 대목을  찾아내고는  "이 분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제야 김원룡은 "맞았어, 맞았어.  이    분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이때가 오후 4시 35분쯤이었다.

    이 무렵 발굴현장의 긴장을 깬 요란한 사건이 터진다. 뒤늦게 왕릉 발견 소식을 듣고 나타난 중앙일보 기자 이종석이 현장에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를 보자마자 그의 뺨을 냅다 갈겨 버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 나한테만 알리지 않았느냐"는 분풀이였다. 언론계 속어로 이종석은 '물을 먹었다'. 하지만 '물먹은' 언론사가 중앙일보뿐만은 아니었다. 한국일보 말고는 7월 8일까지 왕릉 출현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뺨 사건'은 무령왕릉 발굴을 졸속으로 만드는데 나름대로 일조한 측면이 있다. 왜냐햐면 가뜩이나 발굴작업이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던데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무령왕 부부 무덤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초흥분 상태에서 이 사건은 발굴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은 요인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짚고 넘어갈 대목은 발굴단장격인 김원룡의 성격이다. 그는 급한  성미로 아주 유명하다. 대체로 이런 성격은 고집불통과 동의어가 되기 일쑤인데  유감스럽게도 김원룡은 그렇지 않았다.

    급하면서도 김원룡은 우유부단했고 여리다고 해야 할 만큼 강단이 부족했다. 이런 성격 또한 무령왕릉 졸속 발굴의 한 구실이 된다.

    간단한 발표가 끝난 다음 취재진을 위한 사진촬영이 허용됐다. 발굴 전  사진촬영은 우리 나라 고고학사상 무령왕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어느  나라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이 발굴이 얼마나 졸속이었는지 여기서도 확인한다.

    물론 취재진이 사진촬영을 끈질기게 요구했기 때문에,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취재진이 협박에 가까운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성사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취재기자 1명당 2-3장의 사진촬영이 허용됐으나 이 과정에서도 옥신각신이 많았다.

    무엇보다 촬영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1번은 KBS로 자동  결정됐다. 공영방송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언론사는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고 하는데 2등으로 한국일보가  되고 3등은 중앙일보로 돌아갔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각사당 사진 2-3장이라는  약속을 사진기자들이 지킬 리 만무했다는 점이다.

    일단 무덤에 들어간 사진기자들은 막무가내로 찍어댔다. 이 과정에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부 유물은 파괴되기도 했다. 혹자는 이 과정에서 청동숟가락이  부러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부러뜨린 장본인이 취재진인지, 아니면 발굴단원인지 명확한 증거는 없다. 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취재진을 지목하고 있으나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증언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사진촬영이 끝나자 김원룡은 조유전을 가리키며 "미스터 조, 무덤 안으로 들어가 실측해"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조유전은 실측 전문인 김세현과 함께 돌짐승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무덤길을 지나 무덤방에서 실측을 벌인다.

    조유전은 실측에 들어간 시간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어둑어둑해져 실측이 시작됐으며 아마 2시간 가량 작업을 하지 않았나 하면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저녁 10시쯤 되었던 것 같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측은 저녁 8시쯤 시작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4년 1월에 나온 무령왕릉 발굴보고서에는 발견 당시 출토 유물 위치와 크기 등에 대한 실측도가 실려 있는데, 무령왕릉 발굴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 도면은 바로 이때 조유전과 김세현이 작성한 것이다.

    조유전이 손전등에 의지하며 한여름 바깥 공기와는 달리 싸늘한 기운까지  도는 무덤 안에서 실측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무령왕릉 발견에 대한 발표를 마친 김원룡 일행은 취재진이 사진촬영을 하는 사이에 현장을 떠나 김원룡이 머물고 있던 동명여관으로 옮겨 회의를 열었다.  왕릉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동명여관 회의에 누가 참석했는지는 증언자마다 엇갈리고  있으나  김원룡과 김영배는 물론 포함돼 있었고 장인기와 이호관이 참석한 것만은 틀림없으며  공주사범대 교수들인 안승주와 박용진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회의는 실제 김원룡과 김영배, 장인기 3인이 주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머지 인사들은 정식 발굴단원이 아니므로 발언권이 없었고, 명색이  발굴팀장격인 이호관은 27세 밖에 되지 않아 의견을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김원룡과 김영배, 장인기는 논의 끝에 '즉시 발굴'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김원룡을 비롯한 당시 발굴단이 지적하는 즉시 발굴 결정에 대한 이유는 한결같은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발굴단장격인 김원룡의 증언에 무게감이 간다.

    "거기서 나온 결론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발굴을 끝내는 것이 보도진이나  구경꾼들과의 마찰과 사고 방지에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송산리 고분군 한밤중을 밝힌 무령왕릉 발굴은 이렇게 실행이 결정된 것이다.

    이 시간 다시 무령왕릉 무덤 안. 실측 2시간여만인 밤 10시쯤 무덤방에서  겨우 나온 조유전을 맞은 것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스승이기도 한  김원룡이었다.  그는 냅다 조유전을 향해 "무얼 그렇게 꾸물거리느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김원룡의 성미가 얼마나 불같은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측이 끝났으므로(사실 이 실측은 엉망이었다) 이제 무덤 안에서 유물을  들어내는 일만 남았다. 유물 반출 및 이에 대한 기록작성을 위해 2개조 4명이 무덤 안으로 투입됐는데 김원룡과 지건길이 한 조가 되어 왕쪽을, 김영배와 손병헌은  왕비쪽을 맡았다. 

    발굴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공주군청에 도움을 청해 발전기  시설을  가져왔다. 당시 사진을 보면 유물을 바깥으로 들어내는 가운데 무덤 입구를 밝히고 있는  희미한 백열전등 몇 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발전기를 돌려 얻은 전력으로 켠 300와트짜리 전등이었다. 

    그런데 이 발전기가 돌아가는 속도에 따라 전등이 희미해졌다가 밝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아예 꺼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발굴을 위한 '인프라' 또한  최악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런 가운데 마침내 왕릉 유물로는 처음으로 입구 쪽에 있던 청자가  모습을 드러내니 이때가 8일 밤 12시쯤이었다. 이어 가장 중요한 지석과  '그로테스크한' 돌짐승이 나오고, 다음은 무덤방으로 자리를 옮겨 관재를 비롯한 유물들이 1천500년만에 세상 구경을 했다.

    무령왕릉은 이렇게 해서 청자가 처음으로 반출된지 8시간만인 9일 오전 8시쯤에는 더 이상 바깥에 내줄 만한 게 없었다. 왕릉 안은 텅 비어 버린 것이다. 

    전날 저녁 10시에 무덤에 들어가 꼬박 10시간만에 나온 발굴단원들에게 이 10시간이 너무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는지 모르나, 30년이 지난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너무나 짧은 찰나중의 찰나였다. 

    taeshik@yna.co.kr 

(끝)

<뭐 환장한 일도 이해는 하겠는데...> 

2001.07.18 20:31:11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⑭"발굴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누가 뭐라 해도  무령왕릉 발굴은 세계 고고학사상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졸속의 극치였다. 

    최근 이 발굴 참여자중 생존자들이 하나같이 각종 기고문을 통해 새삼스럽게  '참회록'을 써야 했던 까닭이란 다른 게 없다. 어느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이 발굴이 졸속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회록 집필자로 최근 단골손님처럼 이런저런 지면에 불려다닌 대표적인 인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장 지건길과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30년 전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졸속에  대한  책임을 질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조유전과 지건길은 당시 문화재관리국 부설 문화재연구실 학예사보였다. 학예사보다도 한 등급 낮은 7급이었다. 당시 발굴현장 실질 책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던 김원룡과 공주박물관장인 김영배 및 행정처리를 도맡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장인기 정도였다.

    30년 전 발굴단에서 조유전과 지건길은 윗사람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아랫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것은 첫째  엄연히 졸속발굴 멤버이며 둘째 그들의 현직이 지니는 상징성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건길과 조유전은 마치 나치에 의한 학살 책임을 히틀러  대신  지는 전후 독일 세대처럼 죽고 없는 책임자(급)를 대신해 '살아남은 자의 애환과 참회'를 도맡아야 하는 것이다.

    김원룡을 넘어 당시 발굴의 명령계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문화재관리국장 허련과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을 거쳐 최고 통치권자인 박정희에 이른다.

    하지만 김원룡 이상 올라가는 명령계통에서 어느 누구도 졸속발굴에 대한  반성의 말을 하지 않았다. 김원룡 또한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는 식으로 온갖  책임을 스스로 쓰고 세상을 떠났다.

    30년이 흐른 지금 박정희도, 김영배도, 장인기도 세상을 떠났다. 88세가 된  허련과 73세가 된 윤주영은 당시 발굴 상황에 대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정도로만 말하고 있다.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 30분,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전축분이 무령왕릉임이 확인된 이상, 분명 이런 급보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공보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올라갔을 것이며 그에 따른 어떤 지침이 내려졌을 법도 한데 이를 증명해 줄만한 어떠한 문건도 남아 있지 않다. 혹은 있는데 공개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무령왕릉 발굴에서 아주 특이한 대목의 하나는 누가 봐도 이 발굴은  졸속이었는데도 이를 추궁하는 '외부충격'이 지난 30년 동안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언론이 무령왕릉 발굴에 대해서는 최고 최대의  발굴이라면서 발굴 성과와 발굴단원을 칭찬하기에 급급했을 뿐 발굴 방법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이 수상쩍기 그지없다.

    당시 무령왕릉 관련 언론보도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고작 비판성 지적이라고 해봐야 발굴 과정 혹은 유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돌짐승 뿔과  청동숟가락이  부러졌다는 정도밖에 없다.

    언론은 왜 졸속발굴이라는 점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닫았을까?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을 당시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들의 증언에서 확인한다. 두 가지 사례를  보자.

    첫째 증언자는 현재 문화재위원인 세계일보 논설주간 신찬균. 

    71년 당시 합동통신 문화부 기자였던 그가 무령왕릉 발굴현장에 도착한 것은  7월 9일이었다. 발굴은 이날 오전 8시쯤 종료됐다. 따라서 신찬균은 발굴이 이뤄지는 상황은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물어보았다. 무령왕릉 발굴은 누가 봐도 졸속인데 그때 왜 언론은  이런 지적을 하지 못했는가?

    그의 답변.

    우리는 발굴을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신찬균의 말.

    그때까지 우리 나라에 발굴같은 발굴이 있었어야지. 문화재 담당  기자라고  해 봐야 제대로 된 발굴 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어야지. 그러니 발굴을 그렇게 하는 줄로 알 수밖에.

    취재진이 남긴 두번째 증언은 무령왕릉 발굴이 끝난 지 나흘 뒤인  7월  14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무령왕릉 발굴 취재기자 좌담' 발언록. 무령왕릉 발굴 관련  보도를 내내 선도하다시피 한 한국일보는 문화부장 이하 무려 7명으로 특별취재단을  구성했던 모양이다.

    전날 오전 10시 한국일보 편집국 회의실에서 열린 이 좌담회에는 취재단  7명이 모두 참석했다. 발언자 이름은 사회자(문화부장)만 빼고는 각 발언자는 영문자  A부터 E로만 표기돼 있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좌담 한 토막.

    B = 발굴을 시작한 것은 7일 하오 3시 30분부터이고 우리가 김박사(=김원룡) 일행과 같이 왕릉에 간 것은 8일 새벽 5시입니다.

    C = 발굴진행은 참으로 순조로왔습니다. 예정은 3-4일이 걸려야  갱문(=무덤문)이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날 하오 4시에 뚫렸거든요.

    3-4일 걸려야 했을 것으로 예상되던 무덤문이 단 몇 분만에 열린 것을 두고 "발굴이 참으로 순조로왔다"고 하는 대목을 접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것이 졸속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몰랐을망정 그것을 잘했다고 박수를 하고 있으니.  "우리는 발굴을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는 신찬균의 증언과 더불어 왜 언론이 졸속발굴을 막는 견제장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부화뇌동하고 말았는지 그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 졸속 발굴에 대한 책임 일부가 언론에 있다는 지적은 이래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언론의 견제장치 상실, 혹은 비판의식 부재는 무령왕릉  졸속발굴이라는 장작더미를 불태우는데 장작 하나를 제공했을지언정 그것을 불태운 불씨는 어디까지나 김원룡으로 대표되는 발굴단 혹은 그 상위 명령계통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taeshik@yna.co.kr 

(끝)

 

2001.07.21 15:43:45 

주    석  매핑있음 N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⑮무령왕릉과 박정희(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3년 7월 26일 오전 '미추왕릉지구'라는 신라인의 공동묘지 한 켠. 높은 담을 둘러친 천막 안 고분 발굴현장에서는 한 무덤의 바닥 흙을 긁어 내던 젊은 조사원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굴단 부단장 김동현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귓속말로 김동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관이 나왔습니다"

    이 조사원은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 연구관으로 있는  윤근일이었다. 금관 출현을 확인한 발굴단은 이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청와대와 바로  연결되는 핫라인이었다.

    고고학 발굴현장에 무슨 청와대 핫라인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직통전화가 설치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현장을 통제했다.

    청와대의 통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발굴 진척상황에 대한 언론발표에 앞서 발굴단은 반드시 청와대에 먼저 보고를 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을 권력 핵심인 청와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개입한 시초는  1973년에 있었던 바로 이 천마총 발굴이었다. 이런 관행은 천마총 발굴이 끝날 즈음에 시작된 황남대총과 황룡사 터 등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기까지 계속된다.

    박정희 혹은 유신정권은 이런 사실을 볼 때도 분명 여론 호도를 위해  고고학을 이용했다. 정권 기반이 취약했고 집권 7년 내내 '타도' 대상이 됐던 전두환  정권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영화(screen), 프로야구 출범으로 대표되는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이른바 3S 정책을 썼다고 하듯이 박정희는  반(反)유신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긴급조치 발동으로 대표되는 강압적 진압방식과 함께  신라와 경주를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고고학과 고고학자들을 어용화했다. 

    다시 천마총 얘기로 돌아가자. 1천500년 가량을 육중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안에서 잠자던 금관이 출현하자마자, 쾌청하기 이를 데 없던  하늘에  갑자기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쏟아부었다.

    이 갑작스런 기상변화에 작업 인부와 조사원은 아연 긴장했다. 혹 신라  왕릉을 파헤치고 금관을 빼내 하늘이 노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기야 천마총 발굴을 바라보는 당시 경주의 여론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마침 경주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경주 시민은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마른 하늘을 덮친 천둥번개와 폭우는 조사원들에게도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조사원중에서도 특히 놀란 인물이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 학예사 지건길이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그는 경주 하늘을 시커멓게 덮친  하늘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꼭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1971년 7월 6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건설 현장. 이날 오전 지건길은  영문도 모르고 문화재연구실 연구관 이호관과 학예사 손병헌, 같은 학예사보로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동기인 조유전과 함께 무작정 송산리에 내려왔던 것이다.

    와서 보니 온통 벽돌로 쌓아 올린 전축분이 앞 모습만 수줍은 색시마냥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지건길은 동료 및 작업인부들과 더불어 이날 무덤 앞 부분을 열심히 파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날 저녁이 다 돼 갈 무렵 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를 쏟아내리던  공주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그야말로  양동이 물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건길이 73년 7월 천마총 발굴 현장에 내리친 천둥번개를 보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2년 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의 무령왕릉 발굴 때도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총과 무령왕릉은 같은 왕릉(급) 대형 고분이라는 점 등 공통분모가 꽤 있으나 여기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천둥번개와 폭우는 자연의 조화가 내뿜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정작 우리는 두 고분 뒤를 도도히 관통하는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무령왕릉을 떠난 이 흐름은 천마총을 뚫고 황남대총을 지난 다음, 다시  황룡사 터로 향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일단은  끝맺음한다. 이 흐름은 전두환 정권에서 모습을 바꾼 유령의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공주 무령왕릉을 떠나 경주 여러 곳을 떠돈 이 흐름은 바로 박정희와  유신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고고학과 결합한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한 가지 구호 아래 같은 둥지를 틀었다.

    1971년 7월 9일, 사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 끝에 무령왕릉 무덤 부장 유물을  몽땅 드러낸지 며칠 지난 어느날 저녁, 이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김영배를 찾는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청와대로 생각되는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각하께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남기고는 끊었다.

    이에 놀란 김영배는 다음날 새벽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은으로 만든  왕비의 팔찌를 비롯한 금속제 장신구들을 상자 안에 서둘러 챙겨서는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와 대통령이라는 말에 황급해졌는지, 아니면 너무 놀라 경황이 없어 그랬는지, 김영배는 동행자 하나없이 혼자서 공주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기다리고 있던 국립박물관장 김원룡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아마도 이 방문에는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과 문화재관리국장  허련  정도는 틀림없이 동행했을 법한데 정작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이 없다"고 하고 있다.  다만 김원룡이 남긴 글에는 윤주영이 동행했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이때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김원룡이  회고록에서  잠깐 남겨놓은 대목이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에서 드러나듯 이때 그 유명한  박정희의 '무령왕릉비 팔찌 휘었다 펴기' 사건이 나온다.

    "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결정하는 데 있어 청와대나 문화공보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령왕릉이 발굴 완료된 시점과 이곳 출토유물이 청와대로 나들이를 한 시점이다.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게 무령왕릉 발견.발굴 직전인 7월 1일이었다.

    소설적 상상력을 좀 확장하자면 무령왕릉 발굴은 박 대통령 취임식에 올린 선물이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결과는 분명 그랬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무령왕릉 이후 73년 천마총을 시작으로 국가 주도  대규모 발굴에 청와대와 박정희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앞서 얘기한 천마총 발굴단과 청와대간 핫라인 설치이지만 좀더 극명한 연결고리로는 박정희 자신의 잦은 경주 방문을 들 수 있다.

    발굴현장에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973년 7월 3일 천마총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는 1975년 6월 30일에는 무덤 두 개가 쌍둥이처럼 붙은 황남대총의  남쪽  고분 발굴현장을 또 방문한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서 발굴현장을 찾은 것은 박정희가 유일무이하다. 좋게  보면 우리 문화유적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의 고고학 발굴에 대한 이런 유별난 관심이 경주를 이만큼이나마 부각시킨 공로가 적지 않음은 분명 인정해야 겠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박정희의 이런 관심 뒤에 여론을 호도하자는  의도성과 조국근대화, 민족주체성 확립, 화랑 순국정신 부활과 같은 고도의 정치 이데올로기성이 농후하게 내재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어느 지도자도 주목하지 못하던 고고학을 통치에 이용했으니 박정희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시대를 앞선 독재자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고고학과 정치를 결합한 시초는 1973년 천마총 발굴이었으나 이를 가능하게 한 원천은 아무리 봐도  1971년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 때맞춰 터진 무령왕릉 발굴이었던 것 같다.

    taeshik@yna.co.kr 

(끝)


2001.07.21 15:43:45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⑮무령왕릉과 박정희(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3년 7월 26일 오전 '미추왕릉지구'라는 신라인의 공동묘지 한 켠. 높은 담을 둘러친 천막 안 고분 발굴현장에서는 한 무덤의 바닥 흙을 긁어 내던 젊은 조사원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굴단 부단장 김동현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귓속말로 김동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관이 나왔습니다"

    이 조사원은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 연구관으로 있는  윤근일이었다. 금관 출현을 확인한 발굴단은 이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청와대와 바로  연결되는 핫라인이었다.

    고고학 발굴현장에 무슨 청와대 핫라인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직통전화가 설치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현장을 통제했다.

    청와대의 통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발굴 진척상황에 대한 언론발표에 앞서 발굴단은 반드시 청와대에 먼저 보고를 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을 권력 핵심인 청와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개입한 시초는  1973년에 있었던 바로 이 천마총 발굴이었다. 이런 관행은 천마총 발굴이 끝날 즈음에 시작된 황남대총과 황룡사 터 등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기까지 계속된다.

    박정희 혹은 유신정권은 이런 사실을 볼 때도 분명 여론 호도를 위해  고고학을 이용했다. 정권 기반이 취약했고 집권 7년 내내 '타도' 대상이 됐던 전두환  정권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영화(screen), 프로야구 출범으로 대표되는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이른바 3S 정책을 썼다고 하듯이 박정희는  반(反)유신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긴급조치 발동으로 대표되는 강압적 진압방식과 함께  신라와 경주를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고고학과 고고학자들을 어용화했다. 

    다시 천마총 얘기로 돌아가자. 1천500년 가량을 육중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안에서 잠자던 금관이 출현하자마자, 쾌청하기 이를 데 없던  하늘에  갑자기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쏟아부었다.

    이 갑작스런 기상변화에 작업 인부와 조사원은 아연 긴장했다. 혹 신라  왕릉을 파헤치고 금관을 빼내 하늘이 노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기야 천마총 발굴을 바라보는 당시 경주의 여론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마침 경주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경주 시민은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마른 하늘을 덮친 천둥번개와 폭우는 조사원들에게도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조사원중에서도 특히 놀란 인물이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 학예사 지건길이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그는 경주 하늘을 시커멓게 덮친  하늘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꼭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1971년 7월 6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건설 현장. 이날 오전 지건길은  영문도 모르고 문화재연구실 연구관 이호관과 학예사 손병헌, 같은 학예사보로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동기인 조유전과 함께 무작정 송산리에 내려왔던 것이다.

    와서 보니 온통 벽돌로 쌓아 올린 전축분이 앞 모습만 수줍은 색시마냥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지건길은 동료 및 작업인부들과 더불어 이날 무덤 앞 부분을 열심히 파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날 저녁이 다 돼 갈 무렵 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를 쏟아내리던  공주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그야말로  양동이 물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건길이 73년 7월 천마총 발굴 현장에 내리친 천둥번개를 보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2년 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의 무령왕릉 발굴 때도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총과 무령왕릉은 같은 왕릉(급) 대형 고분이라는 점 등 공통분모가 꽤 있으나 여기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천둥번개와 폭우는 자연의 조화가 내뿜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정작 우리는 두 고분 뒤를 도도히 관통하는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무령왕릉을 떠난 이 흐름은 천마총을 뚫고 황남대총을 지난 다음, 다시  황룡사 터로 향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일단은  끝맺음한다. 이 흐름은 전두환 정권에서 모습을 바꾼 유령의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공주 무령왕릉을 떠나 경주 여러 곳을 떠돈 이 흐름은 바로 박정희와  유신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고고학과 결합한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한 가지 구호 아래 같은 둥지를 틀었다.

    1971년 7월 9일, 사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 끝에 무령왕릉 무덤 부장 유물을  몽땅 드러낸지 며칠 지난 어느날 저녁, 이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김영배를 찾는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청와대로 생각되는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각하께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남기고는 끊었다.

    이에 놀란 김영배는 다음날 새벽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은으로 만든  왕비의 팔찌를 비롯한 금속제 장신구들을 상자 안에 서둘러 챙겨서는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와 대통령이라는 말에 황급해졌는지, 아니면 너무 놀라 경황이 없어 그랬는지, 김영배는 동행자 하나없이 혼자서 공주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기다리고 있던 국립박물관장 김원룡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아마도 이 방문에는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과 문화재관리국장  허련  정도는 틀림없이 동행했을 법한데 정작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이 없다"고 하고 있다.  다만 김원룡이 남긴 글에는 윤주영이 동행했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이때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김원룡이  회고록에서  잠깐 남겨놓은 대목이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에서 드러나듯 이때 그 유명한  박정희의 '무령왕릉비 팔찌 휘었다 펴기' 사건이 나온다.

    "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결정하는 데 있어 청와대나 문화공보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령왕릉이 발굴 완료된 시점과 이곳 출토유물이 청와대로 나들이를 한 시점이다.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게 무령왕릉 발견.발굴 직전인 7월 1일이었다.

    소설적 상상력을 좀 확장하자면 무령왕릉 발굴은 박 대통령 취임식에 올린 선물이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결과는 분명 그랬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무령왕릉 이후 73년 천마총을 시작으로 국가 주도  대규모 발굴에 청와대와 박정희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앞서 얘기한 천마총 발굴단과 청와대간 핫라인 설치이지만 좀더 극명한 연결고리로는 박정희 자신의 잦은 경주 방문을 들 수 있다.

    발굴현장에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973년 7월 3일 천마총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는 1975년 6월 30일에는 무덤 두 개가 쌍둥이처럼 붙은 황남대총의  남쪽  고분 발굴현장을 또 방문한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서 발굴현장을 찾은 것은 박정희가 유일무이하다. 좋게  보면 우리 문화유적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의 고고학 발굴에 대한 이런 유별난 관심이 경주를 이만큼이나마 부각시킨 공로가 적지 않음은 분명 인정해야 겠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박정희의 이런 관심 뒤에 여론을 호도하자는  의도성과 조국근대화, 민족주체성 확립, 화랑 순국정신 부활과 같은 고도의 정치 이데올로기성이 농후하게 내재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어느 지도자도 주목하지 못하던 고고학을 통치에 이용했으니 박정희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시대를 앞선 독재자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고고학과 정치를 결합한 시초는 1973년 천마총 발굴이었으나 이를 가능하게 한 원천은 아무리 봐도  1971년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 때맞춰 터진 무령왕릉 발굴이었던 것 같다.

    taeshik@yna.co.kr 

(끝)

<"내 머리가 돌았다">

2001.07.21 15:43:45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⑮무령왕릉과 박정희(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3년 7월 26일 오전 '미추왕릉지구'라는 신라인의 공동묘지 한 켠. 높은 담을 둘러친 천막 안 고분 발굴현장에서는 한 무덤의 바닥 흙을 긁어 내던 젊은 조사원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굴단 부단장 김동현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귓속말로 김동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관이 나왔습니다"

    이 조사원은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 연구관으로 있는  윤근일이었다. 금관 출현을 확인한 발굴단은 이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청와대와 바로  연결되는 핫라인이었다.

    고고학 발굴현장에 무슨 청와대 핫라인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직통전화가 설치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현장을 통제했다.

    청와대의 통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발굴 진척상황에 대한 언론발표에 앞서 발굴단은 반드시 청와대에 먼저 보고를 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을 권력 핵심인 청와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개입한 시초는  1973년에 있었던 바로 이 천마총 발굴이었다. 이런 관행은 천마총 발굴이 끝날 즈음에 시작된 황남대총과 황룡사 터 등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기까지 계속된다.

    박정희 혹은 유신정권은 이런 사실을 볼 때도 분명 여론 호도를 위해  고고학을 이용했다. 정권 기반이 취약했고 집권 7년 내내 '타도' 대상이 됐던 전두환  정권이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영화(screen), 프로야구 출범으로 대표되는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이른바 3S 정책을 썼다고 하듯이 박정희는  반(反)유신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한편으로는 긴급조치 발동으로 대표되는 강압적 진압방식과 함께  신라와 경주를 주목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고고학과 고고학자들을 어용화했다. 

    다시 천마총 얘기로 돌아가자. 1천500년 가량을 육중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안에서 잠자던 금관이 출현하자마자, 쾌청하기 이를 데 없던  하늘에  갑자기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쏟아부었다.

    이 갑작스런 기상변화에 작업 인부와 조사원은 아연 긴장했다. 혹 신라  왕릉을 파헤치고 금관을 빼내 하늘이 노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기야 천마총 발굴을 바라보는 당시 경주의 여론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마침 경주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경주 시민은 "왕릉을  파헤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마른 하늘을 덮친 천둥번개와 폭우는 조사원들에게도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조사원중에서도 특히 놀란 인물이 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 학예사 지건길이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그는 경주 하늘을 시커멓게 덮친  하늘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꼭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1971년 7월 6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건설 현장. 이날 오전 지건길은  영문도 모르고 문화재연구실 연구관 이호관과 학예사 손병헌, 같은 학예사보로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동기인 조유전과 함께 무작정 송산리에 내려왔던 것이다.

    와서 보니 온통 벽돌로 쌓아 올린 전축분이 앞 모습만 수줍은 색시마냥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지건길은 동료 및 작업인부들과 더불어 이날 무덤 앞 부분을 열심히 파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날 저녁이 다 돼 갈 무렵 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를 쏟아내리던  공주의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그야말로  양동이 물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건길이 73년 7월 천마총 발굴 현장에 내리친 천둥번개를 보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2년 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의 무령왕릉 발굴 때도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총과 무령왕릉은 같은 왕릉(급) 대형 고분이라는 점 등 공통분모가 꽤 있으나 여기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천둥번개와 폭우는 자연의 조화가 내뿜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정작 우리는 두 고분 뒤를 도도히 관통하는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무령왕릉을 떠난 이 흐름은 천마총을 뚫고 황남대총을 지난 다음, 다시  황룡사 터로 향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일단은  끝맺음한다. 이 흐름은 전두환 정권에서 모습을 바꾼 유령의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공주 무령왕릉을 떠나 경주 여러 곳을 떠돈 이 흐름은 바로 박정희와  유신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고고학과 결합한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한 가지 구호 아래 같은 둥지를 틀었다.

    1971년 7월 9일, 사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 끝에 무령왕릉 무덤 부장 유물을  몽땅 드러낸지 며칠 지난 어느날 저녁, 이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김영배를 찾는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청와대로 생각되는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각하께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남기고는 끊었다.

    이에 놀란 김영배는 다음날 새벽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은으로 만든  왕비의 팔찌를 비롯한 금속제 장신구들을 상자 안에 서둘러 챙겨서는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와 대통령이라는 말에 황급해졌는지, 아니면 너무 놀라 경황이 없어 그랬는지, 김영배는 동행자 하나없이 혼자서 공주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기다리고 있던 국립박물관장 김원룡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아마도 이 방문에는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과 문화재관리국장  허련  정도는 틀림없이 동행했을 법한데 정작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이 없다"고 하고 있다.  다만 김원룡이 남긴 글에는 윤주영이 동행했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이때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김원룡이  회고록에서  잠깐 남겨놓은 대목이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에서 드러나듯 이때 그 유명한  박정희의 '무령왕릉비 팔찌 휘었다 펴기' 사건이 나온다.

    "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무령왕릉 졸속 발굴을 결정하는 데 있어 청와대나 문화공보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령왕릉이 발굴 완료된 시점과 이곳 출토유물이 청와대로 나들이를 한 시점이다.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게 무령왕릉 발견.발굴 직전인 7월 1일이었다.

    소설적 상상력을 좀 확장하자면 무령왕릉 발굴은 박 대통령 취임식에 올린 선물이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결과는 분명 그랬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무령왕릉 이후 73년 천마총을 시작으로 국가 주도  대규모 발굴에 청와대와 박정희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앞서 얘기한 천마총 발굴단과 청와대간 핫라인 설치이지만 좀더 극명한 연결고리로는 박정희 자신의 잦은 경주 방문을 들 수 있다.

    발굴현장에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973년 7월 3일 천마총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는 1975년 6월 30일에는 무덤 두 개가 쌍둥이처럼 붙은 황남대총의  남쪽  고분 발굴현장을 또 방문한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서 발굴현장을 찾은 것은 박정희가 유일무이하다. 좋게  보면 우리 문화유적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의 고고학 발굴에 대한 이런 유별난 관심이 경주를 이만큼이나마 부각시킨 공로가 적지 않음은 분명 인정해야 겠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박정희의 이런 관심 뒤에 여론을 호도하자는  의도성과 조국근대화, 민족주체성 확립, 화랑 순국정신 부활과 같은 고도의 정치 이데올로기성이 농후하게 내재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어느 지도자도 주목하지 못하던 고고학을 통치에 이용했으니 박정희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시대를 앞선 독재자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고고학과 정치를 결합한 시초는 1973년 천마총 발굴이었으나 이를 가능하게 한 원천은 아무리 봐도  1971년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 때맞춰 터진 무령왕릉 발굴이었던 것 같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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