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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1절 80주년의 사건> (5) "처음 밝힙니다. 나는 일본군 소위였어요"

by taeshik.kim 2019.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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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쑥한 밤색 정장 차림이었다. 오늘 인터뷰를 의식해서라고도 하겠지만, 천상 할배요 천상 영감인 이 양반은 적어도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생평을 이렇게 살았을 사람 같았다. 흐터러진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 길이 없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아했다. 곱게 늙는다는 말, 이런 사람한테 쓰는 갑다 했다. 


말투 역시 차림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천상 마음씨 좋은 문방구 할배의 그것이었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시종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래 신선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겠구나 했다. 목청은 높아진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이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했다. 만나 보니 현승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판에 박힌 인사를 나누고는 이력 조회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사람이라 해서 그를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했으니, 주로 출생과 식민지시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이른바 족보 조사에서 시작한 셈이다. 그런 물음에 선생은 시계추를 80년 전으로 돌린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묘향산맥과 안주평야가 만나는 평남 개천에서 살았으며, 그 역시 평양의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조부 현희봉(玄熙鳳)은 한말 강원도 일대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던  의암 유인석이 강원도에서 밀려 개천까지 피신하자 그를 도와 의병활동을 함께했다는 말도 한다.


부친 현기정(玄基正)은 조선이 망하자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1929년 그곳에서 객사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에게 3.1운동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정확히 제 생일이 음력으로 1919년 1월 26일인데 양력으로는 며칠인지 몰라요. 그런데 부모님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태어났다고 하셨어요. 보통 음력이 양력보다 한달 가량 빠르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이 대목에서 선생은 느닷없는 얘기를 꺼냈다.  


"때문에 3.1절은 나한테는 남다른 감회 같은 게 있어요. 요컨데 나는 3.1절 태생이면서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선친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와 싸우셨던 중국에서 총칼을 들고 일제를 위해 싸운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죠".


엥? 무슨 말인가 했다. 그래서 내가 더 물으니 비록 자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그는 일본제국주의 군복을 입고 총칼을  중국 팔로군에 겨눈 일본군 소위였다고 했다. 이 대목을 선생은 이렇게 풀어갔다. 


"지금까지 제 이력서에 제가 일제말 학도병이었고, 일본군 소위였다는 대목은 쓰지 않았어요. 우리 조부님이 한말 의병활동에 헌신하셨고 선친께서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이런 집안에서 일본군 소위라니...조상님들께 부끄러워서도 학도병 출신 일본군 소위였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의 이야기인즉슨,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한 그는 3년 과정인 법학과를 2년 6개월만에 조기졸업하고는 1944년 1월 20일 학도지원병으로 소집돼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주로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중동부 지역에 주둔한 그는 처음 현지에 도착해 혹독한 신병훈련을 받고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난징에 있던 일본군 중앙군관학교 예비사관을 지냈다. 


정식 소위 계급장을 달지는 않았으나 그는 일선 소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패전 위기에 처한 일본군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어요. 내가 속한 중대도  40명가량씩 되는 소대 2개로만 구성됐어요. 내가 2소대장이었고 육군 정훈감을  지냈고 와세다대학을 나온 김병률씨가 1소대장이었어요. 그런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선친 생각이 그렇게 날 수 없었어요. 선친이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중국에서 내가 일본군복을 입고 여기서 싸우다니 착찹하기만 했어요".


이런 그가 중국 팔로군을 상대로 실제 전투다운 전투를 치른 일은 딱 한번 밖에 되지 않는다. 묘하게도 처음이자 마지막 실전이 그가 정식 소위 계급장을  달기로 돼 있던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일이었다. 


"제가 해방 소식을 접한 것은 8월 15일이 일주일 가량  지나고서였지요. 아무튼 8월 15일 나와 김병률씨는 소대를 이끌고 상하이 양쯔강 건너편 남통(南通)이라는 곳에서 팔로군 1개 사단과 맞닦뜨렸는데 절대적인 숫적 열세 때문에 완전히 포위됐어요. 이젠 모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 순간 내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땅에 코를 쳐박고 완전히 엎드렸어요. 근데 이상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안들었어요. 전날 한잠을 못잤는데 이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 가슴에 총을 맞아 중상이었던 일본인 대대장이 소리를  질렀어요. 이대로 있다가는 개죽음이니까 소대가 각각 양쪽으로 나뉘어 그대로 돌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이판사판인 기분으로 칼을 휘두려며 냅다 돌파했는데 다행히 살아남아 80살이 되도록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메모하고 이사장실을 나서면서, 이 인터뷰 중 과연 어느 대목을 소위 야마(중심)로 잡아 기사를 작성할 것인지는 실로 자명하게 정해졌다. 그래, 일본군 소위였다는 이 기구한 운명을 토대로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자 했던 것이며 실제 그 기사는 그런 관점에서 작성되어 2월 24일 송고되었다. 


한데 나는 일본군 소위였다는 이 뒤늦은 고백이 그만 여든살 선생을 곤욕으로 내몰고 말았으니, 설혹 내가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때문에 갖은 곤욕을 치르게 했으니, 나는 몹쓸 짓을 선생에게 하고 말았다. 백수 맞은 선생께 20년 만에 다시금 죄송하다는 사죄 말씀 드리고 싶다. 



1999.02.24 15:58:00 송고한 문제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3.1절 특집 인터뷰> ② 전 국무총리 玄勝鍾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암울한 일제 식민통치기에 태어나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지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현승종(玄勝鍾.80)  전국무총리에게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비록 자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그는 일본제국주의 군복을 입고 총칼을  중국 팔로군에 겨눴던 일본군 소위였다.


"지금까지 내 이력서에 내가 일제말 학도병이었고 일본군 소위였다는 대목은 쓰지 않았어요. 우리 조부님이 한말 의병활동에 헌신하셨고 선친께서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이런 집안에서 일본군 소위라니...


조상님들께 부끄러워서도 학도병 출신 일본군 소위였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더라구요".


박정희 군사정권과 줄기찬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고 장준하도,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박사도 학도병 출신이요 일제말 대학을 다닌 그외 허다한 조선  젊은이들 모두 일본제국주의 군복을 입은 학도병이었는데 그가 이런 경력을 특히  부끄럽다고 여겨 "나는 학도병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묘향산맥과 안주평야가 만나는 평남 개천에서 살았으며  현전총리도 평양의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조부 현희봉(玄熙鳳)은 한말 강원도 일대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던  의암 유인석이 강원도에서 밀려 개천까지 피신하자 그를 도와 의병활동을 함께 했다.


또 그의 부친 현기정(玄基正)은 조선이 망하자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1929년 그곳에서 객사하는 등 아버지 3형제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정확히 제 생일이 음력으로 1919년 1월26일인데 양력으로는 며칠인지  몰라요.그런데 부모님이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태어났다고 하셨어요.보통 음력이 양력보다 한달 가량 빠르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때문에 3.1절은 나한테는 남다른 감회 같은게 있어요. 요컨데 나는 3.1절  태생이면서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선친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와 싸우셨던 중국에서 총칼을 들고 일제를 위해 싸운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죠".


그가 3.1만세운동에 대한 역사를 들은 것은 이처럼 부모님과 집안,동네  어른들을 통해서였다.


생일이 같다는 이유로 막연하게 3.1절에 대한 친근함을 느끼던  그에게도  정말 3.1만세운동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929년 1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의거운동의 여파가 그해 겨울  그가 살던 개천지역으로 불어닥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나나 제 친구들 나이가 많으면 몇이겠어요. 겨우 10살 내외였던 우리  가슴속에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뭔가 끓어오르는 게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 때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하루는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인 순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운동장에서 우리가 두 패로 갈라져 눈싸움을 벌였어요.


그런데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두 패 중 한 패가 일부러 밀리는 척 하면서 이 조선인 순사에게까지 다가갔어요.그러자 이를 쫓던 나머지 한 패가 이 순사를  향해 눈덩이를 집중적으로 집어던졌어요.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들 가슴속에도 한맺힌  응어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제에 대한 울분과 응어리를 안고 이렇게 유년시절을 이렇게 보낸 그는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학과는 원래 3년 과정이었으나 변수가 생겼다.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치닫고 패전의 기운이 완연해지자 일제는 이전까지 총구를 거꾸로 일본군을 향해 겨눌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동원하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  대학생들을 학도지원병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군인으로 끌고 갔다.


이런 일제의 강제동원 정책 때문에 3년 과정인 법학과를 2년6개월만에 조기졸업한 현전총리는 1944년 1월20일 학도지원병으로 소집돼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주로 난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중동부지역에 주둔한 그는 처음 현지에 도착해 혹독한 신병훈련을 받고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난징에 있던 일본군 중앙군관학교 예비사관을 지냈다.


정식 소위 계급장을 달지는 않았으나 그는 일선 소대장을 맡았다.


"패전위기에 처한 일본군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어요. 내가 속한 중대도  40명 가량씩 되는 소대 2개로만 구성됐어요.내가 2소대장이었고 육군 정훈감을  지냈고 와세다대학을 나온 김병률씨가 1소대장이었어요.


그런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선친 생각이 그렇게 날 수 없었어요.선친이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중국에서 내가 일본군복을 입고 여기서 싸우다니 착찹하기만 했어요".


그러나 그가 중국 팔로군을 상대로 실제 전투다운 전투를 치른 것은 딱 한번 밖에 되지 않는다.묘하게도 처음이자 마지막 실전이 그가 정식 소위 계급장을  달기로 돼 있던 1945년 8월15일, 일제 패망일이었다.


"제가 해방 소식을 접한 것은 8월15일이 일주일 가량  지나고서  였지요.아무튼 8월15일 나와 김병률씨는 소대를 이끌고 상하이 양쯔강 건너편 남통(南通)이라는 곳에서 팔로군 1개 사단과 맞닦뜨렸는데 절대적인 숫적 열세 때문에 완전히  포위됐어요.


이젠 모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 순간 내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땅에 코를 쳐박고 완전히 엎드렸어요.근데 이상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안들었어요. 전날 한잠을 못잤는데 이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 가슴에 총을 맞아 중상이었던 일본인 대대장이 소리를  질렀어요.이  대로 있다가는 개죽음이니까 소대가 각각 양쪽으로 나뉘어 그대로 돌파하라는 명령이  떨 어졌어요. 이판사판인 기분으로 칼을 휘두려며 냅다 돌파했는데 다행히 살아남아  80살이 되도록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한때 정통성이 없던 노태우 정권 시절 거의 강압에 못이겨 국무총리로 행정부에 뛰어들었지만 학자적인 양심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그는 특히일제식민통치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좋고 발전적인 한.일 관계도 다  좋아요.그러나  과거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이런 것들은 이뤄져야 해요.우리  젊은이들도 이것을 알아야 해요.무턱대고 일본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각이  필요한 거지요".(사진있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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