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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례기(大戴禮記)》

by taeshik.kim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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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戴禮記》는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西漢 대덕(戴德) 撰이다. 공영달(孔穎達) 撰 《예기정의(禮記正義)》 大題下에 인용된 鄭玄의  《六藝論》에서 이르기를 “戴德이 《記》85篇을 전하니 《大戴禮》가 곧 이것이다. 대성(戴聖)이 《禮》49篇을 전하니 이것이 곧 《禮記》라는 것이다”(戴德傳《記》八十五篇,則《大戴禮》是也;戴聖傳《禮》四十九篇,則此《禮記》是也)라고 했다.


또, 육덕명(陸德明)이 撰한 《경전석문(經典釋文)》 ‘敍錄’에 인용된 晉나라 때 사람 동소陳邵의 《주례론서(周禮論序)》에 이르기를 “戴德이 古《禮》二百四篇을 刪하여 八十五篇을 만드니 이를 일러 《大戴禮》라 한다. 戴聖이 《大戴禮》를 산삭하여 四十九篇을 만드니 이것이 《小戴禮》다”(戴德刪古《禮》二百四篇爲八十五篇,謂之《大戴禮》;戴聖刪《大戴禮》爲四十九篇,是爲《小戴禮》)라고 했다.


그 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초학기初學記》卷21에서는 모두 이와 비슷한 언급이 발견된다. 다만 《漢書》 예문지에는 《대대기大禮記》라든가 《소례기小禮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이 책 《유림전儒林傳》에 이르기를 “《禮》에는 대대大戴과 소대小戴와 경씨慶氏의 學이 있다”(《禮》有大戴小戴慶氏之學)고 했을 뿐이며 이마저도 후창后蒼에서 시작하는 《禮》, 즉 《사례士禮》를 지칭했으니 이는 지금의 《의례儀禮》이다. 이처럼 大戴와 小戴의 《禮記》는 傳授 과정에 자못 의문이 많아 적지 않은 사람이 두 책과 두 戴氏의 관계에 대한 회의를 표시했다. 


사정이 이렇지만 今本 《大戴禮記》에는 적지 않은 先秦, 西漢시대 篇章이 많다. 예컨대 1973년 河北 定縣 西漢 중산회왕(中山懷王) 유수묘(劉脩墓)에서 발굴 출토된 竹簡의 《애공문오의(哀公問五義)》와 《보부(保傅)》는 매우 문자가 근접해 있어 서한시대에 이미 《大戴禮記》에 포함된 篇章은 이미 단독으로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大戴禮記》가 함유한 문자는 적지 않은 傳世文獻과 합치되니 예컨대 《상서尙書》 《일주서逸周書》 《상서대전尙書大傳》 《한시외전韓詩外傳》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맹자孟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안자춘추晏子春秋》 《공자가어孔子家語》 《순자荀子》 《신서新序》 《설원說苑》 《고열녀전古列女傳》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서新書》 《회남자淮南子》 《문자文子》 《논형論衡》이 있다. 이 중에서도 《禮記》 《荀子》 《新書》 《說苑》 《孔子家語》와 합치되는 대목이 많다. 


鄭玄이 《周禮》 《儀禮》 《小戴禮記》에 모두 注를 가해 이를 《삼례三禮》라고 합칭한 후에 《소대례기小戴禮記》가 유행하고 《大戴禮記》는 상대적으로 냉대를 받으면서 점하 그 내용 중 상당부분이 散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今本 《大戴禮記》는 겨우 39篇이 남았을 뿐이다. 정현 이후 漢末 유희劉熙와 北周 노변盧辯 두 사람이 주를 달았으니 이 중 전자는 이미 失傳했으나 겨우 그 편린이 《隋書》에 보인다. 후자는 내용이 간략하나 淸代 박학가들인 대진戴震 노문소盧文弨 등이 이를 기준으로 校注를 행했으니, 그 중에서도 공광림孔廣森의 《대대례기보주大戴禮記補注》와 왕빙진王聘珍의 《대대례기해고大戴禮記解詁》, 그리고 王樹枏의 《교정공씨대대례기보주校正孔氏大戴禮記補注》가 가장 유명하다.


王聘珍는 今本 《孔子家語》가 王肅이 두찬하여 《大戴禮記》를 이용해 만들어낸 위서임을 주장했다. 최근에는 각종 출토자료를 근거로 해서 《孔子家語》가 완전한 王肅의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孔子家語》가 《大戴禮記》를 이용해 그것을 교정한 결과물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예컨대 《애공문오의哀公問五義》에서 이르기를 “哀公曰:‘善! 何如則可謂庸人矣?’”라고 했으나 이를 《孔子家語 五儀解》에서는 ‘善’자 뒤에 孔子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人有五儀”,즉, 庸人이 있고 士人 등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뒤에 哀公이 다시 묻기를 “何如斯可謂之庸人”라고 하고 있다. 文理라는 면에서 《孔子家語》는 《大戴禮記》에 비해 낫고 또 이런 말은 《荀子 哀公篇》에도 보인다는 점에서 “人有五儀” 등의 어구가 《大戴禮記》에서 탈문(脫文)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완전본인 대대례기를 보다 원전에 가깝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업들을 세심히 진행해야 할 것이다.


현전하는 《大戴禮記》는 宋 淳熙 연간의 建安郡齋 刊本을 最古로 친다. 明 嘉靖 癸巳(1533)에 吳郡 袁氏嘉趣堂의 刻本은 이 淳熙本을 복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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