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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가장 치열했던 조선의 신분제 법 개정 논쟁..노론은 수구반동, 남인은 진보라는 신화를 깨뜨린다

by taeshik.kim 2020.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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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최상위법인 《경국대전》에서 정한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이며, 양인은 그 자체에 인도의 카스트만큼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양반도 큰 의미에서는 양인의 범주에 든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정해지는 신분은 어떤 기준을 따르는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사조(四祖)가 대단히 중요하여 과거 시험을 볼 때도 반드시 신원조회처럼 사조를 기록했으니,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가 아님]를 이른다.

외할아버지를 기재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신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족보를 만들 때 제출하는 수단(收單)에 사조(四祖)를 기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양인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품관(品官)인 양반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가 임란을 기점으로 품관=양반이라는 개념이 붕괴하여 하나의 세습 신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천인은 군역의 의무는 없었으나 노비의 경우 주인에게 사환(使喚)하지 않고 자유로이 거주할 때는 신공(身貢)을 바쳐야만 했다.

노비의 신분도 역시 종모법을 따르게 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 〈형전(刑典) 공천(公賤)〉에는 아주 특별한 단서 조항이 있었으니,

“모든 천인에 관련되는 자는 어미의 직역을 따른다. 다만, 천인이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식은 아비의 직역을 따른다.[凡賤人所係, 從母役。唯賤人娶良女所生, 從父役。]”

라고 하였다. 즉 아비가 국왕이 아닌 바에는 어미가 천인이라면 그 자녀는 어미의 직역을 따라 천인이었다.

그러나 천인 남자가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녀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어 어미의 직역을 따르지 않고 아비의 직역인 천인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런 법조문이 있는 것은 천인이 양인 여자와 혼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런 조항을 두었을까?




첨부한 그림은 하나의 예시이다. 대사헌 김태식에게는 비(婢)가 넷, 노(奴)가 셋으로 모두 7명의 노비가 있고, 참봉 기호철에게는 비가 셋, 노가 넷으로 모두 7명이다.

가정이므로 노비들의 나이는 20세 전후의 결혼 적령기라고 하자. 농사일 등에서 부릴 때에는 아무래도 남자종이 유리했겠지만, 그 몸값으로는 출산 가능 연령의 계집종이 월등하게 비쌌다. 그것은 첨부한 그림의 사례 1)과 사례 2)로 알 수 있다.

파란색으로 된 노비는 김 대사헌 소유이고, 녹색으로 된 노비는 기 참봉의 소유이다.

사례 1)의 ‘奴 5’는 절륜의 스테미너를 지녀 기 참봉네 ‘婢A’와 결혼하여 4녀 3남 즉 7명을 낳았다.

그렇다면 그 7명의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그 어미 소유주인 기 참봉 재산만 불려준 것이다.

가임 연령의 계집종이 비쌀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낳을수록 주인의 재산이 복리 이자처럼 불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 대사헌과 기 참봉은 일도 잘하고 스테미너도 좋은 남자종으로 재산을 증식할 방법은 없었을까? 있었다.

위에서 소개한 ‘천인이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식은 아비의 직역을 따른다.’는 《경국대전》의 단서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양인 여자에게는 주인이 없고 천인과 양인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천인이므로 김 대사헌과 기 참봉은 거느린 남자종을 양인 여자와 결혼시키면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모두 자신들의 노비가 되어 재산이 증식되었다.

고문서에 천인과 양인처 사이에서 태어난 노비는 반노(班奴) 반비(班婢)로 불렸다.

고문서 특히 분재기(分財記)를 연구한 학자들은 남자종이 양인 여자와 결혼하는 비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중종, 명종, 선조 때에는 80%에 달하므로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이 양인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개가 풀을 뜯어 먹고 트림하는 주장을 내놓곤 하였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분재기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자들이었고, 권력자들은 자신의 재산 증식을 위해 권력을 활용하여 남자종을 양인 여자와 혼인시킨 것이다.

이러다 보니 양인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어 군사력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이는 율곡 이이였다.

그는 노양처소생은 종모법에 따라 양인으로 삼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였고, 십만양병설(실제 십만이라는 구체적 수치는 없으나 대규모 양병을 주장한 것은 사실)로 밀어부친다.

그러나 처음에는 동조하던 김우옹(金宇顒, 1540~1603)과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반대로 돌아서면서 그의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율곡의 이 주장은 그의 문인 이귀(李貴, 1557~1633)가 이어받아 인조반정의 캐치프레이즈로 쓰였고 추진하였으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며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를 실행한 사람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었다. 《대전통편》 〈형전 공천(公賤)〉에 그 시행 과정이 상세히 실려있으니,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양인(良人) 처를 맞아들여 낳은 자녀는 모두 어미의 역(役)을 따른다. 현종(顯宗) 기유년(1669, 현종10)에 최초로 위의 경우에는 그대로 양인(良人)이 되게 한다는 왕명을 내렸다. 숙종(肅宗) 을묘년(1675, 숙종1)에 위의 경우에는 도로 천인이 되게 하였다. 신유년(1681, 숙종7)에는 또 그대로 양인이 되게 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에는 도로 천인이 되게 하였으며 이미 양역(良役)에 소속시킨 자는 논외로 하였다. 영조 경술년(1730, 영조6)에는 또 신해년(1731, 영조7) 정월 초1일 자시(子時)를 기하여 이때부터 태어난 자들은 모두 어미의 역을 따르게 하라는 왕명을 내렸다.[公·私賤娶良妻所生男女, 竝從母役。顯宗己酉, 始命從良。 肅宗乙卯, 還賤。 辛酉, 又從良。 己巳, 還賤, 而已屬良役者, 勿論。 英宗庚戌, 又命辛亥正月初一日子時爲始, 所生竝從母役。]

라고 하였다. 영조가 결단하기 이전까지는 서인,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 천인과 양인 처 사이에서 난 자녀를 양인으로 삼도록 하였고, 남인이나 소론이 정권을 잡으면 천인이 되게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후에도 정조 때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주도하여 이미 증손자까지 양인으로 살던 이들을 도로 천인으로 하도록 했다가, 순조 초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 천인과 양인 처 사이에서 난 자녀를 양인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길고도 긴 싸움이었다.

《경국대전》의 단서 조항 하나 바꾸는데, 200년이 넘게 소요된 것이다. 이 법 조문 하나만으로도 조선의 역사가 환하게 보일 것이다.

***

남인은 개혁, 노론은 수구라는 일반적 등식은 이것만으로도 거짓이다.

"썩어빠진 법 조문 하나 바꾸지 못하는 나라가 나라냐"는 율곡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숙연한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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