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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겸지왕(鉗知王)

by taeshik.kim 201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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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9대 왕. 질지왕과 방원 사이에 났다. 재위 492∼521년.  

화랑세기 15세 유신공(庾信公) :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 각간이고 증조는 구충대왕이며 고조는 겸지대왕(鉗知大王)이다. 겸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신라] 골품(骨品)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우리나라 조정에 복종하며 따랐다. 겸지왕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공(納水公)이 우리 덕지공(德知公)의 딸 계황(桂凰)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나라 여자를 원했지만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 질지대왕(銍知大王)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푸니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白欣公)의 손아래 누이인 통리(通里)를 왕후로 삼으니 곧 미해공(美海公)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 장녀인 청아(靑我)다. 서로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 딸인 하희(河喜)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지만 또 딸만 낳고 아들을 나을 수 없었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인 선통(善通)을 낳았다.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沙干) 김상(金相) 집에 들어갔다. 김상은 좌지왕(坐知王)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했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았다.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와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앞서 방원이 질지와 밀통하다가 이때가 되어 아들 겸지(鉗知)를 낳았다. 그러므로 질지는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을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하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겸지가 우리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겸지 10년(501)에 방원이 죽었다[崩]. 겸지왕이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했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여 보냈다. 겸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아 구충(仇衝)을 낳았다. 구충은 계봉의 딸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아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 모두 우리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의 딸인 만명을 아내로 맞아 (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眞骨)·대원(大元)·가야(加耶) 3파의 자손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9대 겸지왕(鉗知王)은 아버지가 질지왕(銍知王)이며 어머니는 방원(邦媛)이다. 임신년(492)에 즉위해 29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0대 구충왕(仇衝王)은 겸지(鉗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딸이다. 신축년에 즉위해 43년을 다스렸다.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들어 신라에 바쳤다. 수로왕(首露王) 임인년에서 임자에 이르기까지 총 490년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 :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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