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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경애왕(景哀王)

by taeshik.kim 2018.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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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5대 왕의 시호. 재위 924∼927년. 박씨이며 본명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다. 허울만 남은 신라 말기 왕으로 왕건과 궁예의 치열한 패권 다툼에 견훤의 침략을 받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애왕 : 경애왕(景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위응(魏膺)이고 경명왕 친동생이다. 원년(924) 9월에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했다. 겨울 10월에 몸소 신궁에서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했다. 2년(925) 겨울 10월에 고울부(高鬱府)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한테 투항했지만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 보내니, 그 성이 신라 왕도(王都)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로 보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거짓이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렇게 여겼다. 3년(926) 여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이 일부러 죽였다”고 하고는 노해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으로 진군했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해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말라 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은 반드시 돕지 않으리다. 만약 대왕께서 한번 북을 쳐서 위세를 떨친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외다”고 했다. 태조가 사신에게 일렀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악(惡)이 가득 차서 스스로 쓰러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4년(927) 봄 정월에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 2월에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했다. 후당은 장분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라는 관작을 주었고, 부사(副使) 병부랑중(兵部郞中) 박술홍(朴術洪)에게는 어사중승(御史中丞) 관작을 겸하게 했다. 판관(判官)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이충식(李忠式)에게는 시어사(侍御史)라는 관작을 겸하게 했다. 3월에 황룡사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몸소 근암성(近巖城)을 깨뜨렸다.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사신 림언(林彦)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주었다. 강주 관할인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이 태조에게 귀순했다. 가을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장군에게 명해 굳센 군사 1만 명을 내어 구원케 했다.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로 쳐들어갔다.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노닐다가 적군이 닥치는 줄도 깨닫지 못해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해 숨어들었다. 적병에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며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할 수 없었다. 견훤은 또 군사를 풀어 공사(公私)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했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진으로 끌려 왔다. 왕을 윽박질러 자살토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를 풀어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경애왕(景哀王) :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설했다. 아울러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리니 이것이 백좌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은 박씨인데 이름이 위응(魏膺)이다. 경명(景明)의 모제(母弟)다. 어머니는 자성(資成)이다. 갑신년에 즉위해 2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 재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927) 9월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 고울부(高蔚府)에 이르자 경애왕(景哀王)은 우리 고려 태조께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해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노닐며 적병이 오는 줄도 모르다가 삽시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이에 좌우를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케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을 모두 욕보였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927)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成·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질렀다. 이에 신라왕이 태조께 구원을 청하자 태조가 장차 군사를 내었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해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한 기병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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