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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당탕 서현이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이야기

by 서현99 202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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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1층 탑신의 높이를 크게 설정하여 전체적으로 시선이 1층에 머물도록 되어 있고, 13층이란 보기드문 층수를 갖고 있어 신라의 대표적인 이형석탑으로 꼽힌다


특이한 조형이지만,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문화권 곳곳에서 같은 양식을 찾을 수 있어 정혜사지 석탑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인 치석 수법과 결구 방식은 백제석탑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8세기 후반~9세기 초부터 신라지역에서도 백제양식 석탑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에 대해서는 2012慶州 淨惠寺址十三層石塔樣式特徵이란 제목으로 東岳美術史學』 13호에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2014년)



<한때는 기단이 없는 이런 형태로 정비된 적이 있었다(2009년)>


 

<정혜사지 13층 석탑, 도굴로 11~13층 옥개석이 내려와 있다(1911년)>


 

<중국 四川省 石塔寺 釋迦如來眞身寶塔, 정혜사지 석탑과 매우 유사하다, 1169년>



<일본鹿谷寺址 13層石塔은 일본 최초의 다층석탑으로 1층부터 13층까지 한돌로 제작되었다, 8세기 후반> 


당시 논문을 쓸 때 찾았던 자료를 정리하다가, 재밌게 생각했던 대목이 동경통지(東京通誌)에 나오는 정혜사 창건 기록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선덕왕대(780~785)에 당()의 첨의사(僉議使) 백우경(白宇經)이 참소를 입어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고, 그가 절경의 터를 골라 영월당과 만세암을 건립하였는데 선덕왕도 행차한 적이 있으며, 이곳을 고쳐 세운 것이 정혜사라는 것이다. (淨惠寺址在紫玉山下 新羅宣德王庚申 唐朝僉議使白宇經被讒來寓紫玉山下 建迎月堂萬歲庵 宣德王幸行改庵爲淨惠寺堂爲景春云”)


백우경이란 사람은 수원백씨 시조다. 수원백씨 족보에서 동경통지와 거의 유사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백우경이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 소주에도 정혜사(定慧寺, Ding Hui Si)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찰은 동한(東漢) 흥평(興平) 연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며 이때 이름은 보제사(普济寺)라고 한다


()대에 초산사(焦山寺)로 바꾸고, () 강희 연간에 정혜사로 바꿨다고 한다. 문득 백우경이 중국에서 신라로 넘어오면서 이 정혜사 이름을 갖고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사찰 이름이 바뀐 시기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쑤저우와 경주 두 지역에 정혜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재밌는 부분이다.



<중국 쑤저우에 있는 정혜사(Ding Hui Si)>



그런데, 한반도에도 소주(蘇州)’라는 지명으로 불린 곳이 있었다. 바로 충청남도 태안이다. 태안은 원래 백제의 성대호현(省大號縣,또는 省大兮縣)으로 경덕왕 대에 소태현(蘇泰縣)’으로 고쳤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소태현(蘇泰縣)’소주(蘇州)’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十九 泰安郡 郡名條. “省大兮 蘇泰或云蘇州”)


혹시 백우경이란 사람이 중국 소주가 아닌 백제의 태안에서 건너온 백제인은 아니었을까 잠시 상상해본다.(심지어 백씨는 백제의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로 대표적인 귀족가문이었다.)


정혜사지 석탑이 백제양식 석탑이라는 점, 백제지역인 태안의 옛 지명으로 소주라고도 불렸다는 점, 정혜사를 창건한 백우경이 소주에서 건너왔다는 점, 이 모든 것이 어떤 하나로 연결될 듯 하면서도 연결되지 않는다. 


신라 땅에서 백제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만든 석공은 과연 신라인일까, 아니면 정말 백제땅에서 건너온 백제인이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그저 상상하는 수 밖에.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전북 김제 귀신사 3층석탑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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