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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호의호식은 곽자의처럼,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by taeshik.kim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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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너간 조선후기 회화 '곽분양행락도', 한국서 보존처리
박상현  / 2022-05-30 16:00:08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시카고미술관, 7월 2일부터 전시

 

 

미국 건너간 조선후기 회화 ′곽분양행락도′, 한국서 보존처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미국 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후기 회화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가 고국에서 보존처리를 마쳤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를 통해

k-odyssey.com

 

 

영웅은 난세 없이 탄생할 수 없는 까닭에 난세를 필요조건으로 삼는 영웅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가 많다. 하지만 오직 난세만이 기성 establishment 을 붕괴한다. 강고한 기성 질서를 무너뜨리는 힘은 난세가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영웅이 되고자 난세가 도래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도 많다. 대한민국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를 기준으로 대략 4~5년 단위로 권력이 뒤집힌다.

당 현종 이륭기도 난세의 포말이 빚어낸 영웅이라, BTS보다 화려하게 역사의 중심으로 등극한 그는 이른바 개원지치開元之治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하지만 이 태평성대를 증오한 이도 많았으니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 했고 그렇게 가진 것을 놓을 생각이 없었으니 그에 더불어 저 바닥에서는 기성이 정착할 것을 두려워한 이도 많았거니와, 이 둘이 결합해 마침내 쿠데타를 감행하니 그 주축이 안록산과 사사명이라, 놀랍게도 다 가진 듯 하나 항상 2프로가 부족한 서역 출신 뜨내기 혹은 고구려 후예 듣보잡이 세상은 흔들었다.

평온 혹은 태평은 알고 보니 짓누름이 빚어낸 환상이었다. 그를 시발로 전국이 들고 일어났다.

천하는 말발굽 먼지로 뒤덮혔으니 아! 마침내 반세기를 억누른 난세가 도래하고 잠시 뒤켠에 물러나 이제나저제나 틈을 엿보던 이들이 영웅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 진영, 그러니깐 반란과 이를 통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이들을 허무하게 짓밟은 신주류도 등장했으니 이광필李光弼(708~764)과 곽자의郭子儀(697~781)가 그 쌍두마차였다.

 

곽분양행락도 보존처리 전(위)과 보존처리 후(아래)



이들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 반란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들은 승리의 보증수표라 가는 곳마다 승첩을 구가했다.

난세에서 태어난 이들의 비대한 권력을 황제가 두려워했지만, 또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보신탕으로 요리해 처치해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황제는 그런 힘이 없었다.

마침내 난이 평정하고선 저 둘은 다른 길을 걸었으니, 이광필이 칙명을 여러 번 거부해 인망을 잃은 데 견주어 곽자의는 안온한 삶을 살며 여생을 보냈으니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봉지로 받고는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되어 기록적인 장수를 누리다 눈을 감는다.

이런 그를 천년 뒤 조선왕조가 열렬히 소환한다. 권력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그런 인물상이라 특히 왕으로서는 황실에 절대 충성하면서도 반란하지 아니한 곽자의만한 소재가 없었다.

신하들로서도 오직 말년에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절대적인 지지 속에 호의호식한 곽자의가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 왜난과 두 차례 호난은 곽자의를 재발견케 한 자양분이다. 마침 그에 걸맞을 이순신은 본인이 알아서 일찌감치 죽어줬고 권율은 행주치마로 전과를 한 번 올리기는 했지만 흠결이 너무 많았다.

삼십년 뒤 임경업이 조선의 곽자의를 꿈꿨지만 백마산성 옹성하며 덤벼 하는 그를 만주 팔기군은 내가 미쳤어? 돌아갈 때 보자 빠이빠이할 뿐이었으니 놀랍게도 그 전란을 거치고도 조선엔 그런 영웅이 없었다.

그런 조선후기, 있는 집안에서 유행한 그림으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라는 요상한 소재들이 있다. 패턴은 거의 같아서 한 사람이 그린 것을 카피하거나, 혹은 애초 누가 이런 그림을 그렸더니 후배들이 우후죽순으로 따라해서 그리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현상이다.

곽분양郭汾陽이란 곧 곽자의니, 그가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까닭에 이렇게 부른다.  그의 행적은 《신당서新唐書》 기준으로 보면  권 제137이 저록한 열전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일생을 소재로 삼은 저 그림이 유행하는 배경이야 앞서 간략히 본 대로이며 나는 그런 그림을 곽분양 행락도郭汾陽行樂圖 라 한다 해서 이 명칭에서 어디에서 유래했는지가 궁금했거니와, 한국고전번역원 고전DB를 검색해 보니 이 명칭이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배접지로 쓴 《증산현갑자식남정안甑山縣甲子式男正案》, (1864, 고종1년)

 

 

조선후기 때 문인 김정중이라는 사람이 정조 15년, 1791~92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김이소金履素와 부사 이조원李祖源, 서장관 심능익沈能翼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기행한 일을 정리한 기유록奇遊錄에 보이거니와 그 임자년(1792, 정조 16) 1월 4일 일을 이리 적었다. 

 

맑음. 바람이 매우 사나왔다.
성 밖에 나가지 못하고, 송원松園을 따라 담을 사이에 둔 임성林姓인 사람 집을 찾았는데, 이 집은 가장 좋은 저택으로 장안에서 이름났다. 건물이 모두 200여 칸에 중루重樓와 복도複道가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동쪽으로 나갔다가 서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돌아오는 길을 잃을 지경이니, 비록 황제의 궁궐과 제후諸侯 저택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다. 가운데에 한 정실靜室이 있는데, 좌우에 향나무 탑榻을 두었고, 사면 벽이 다 옛사람 글씨와 그림이며, 유리창과 수놓은 문이 광채가 찬란하고 윤택이 흐르는 가운데에 곽분양 행락도郭汾陽行樂圖를 걸었으니, 그 뜻은 주인 스스로의 환락을 견주어 보려는 마음이 스며있다. 

 

晴。風甚惡。不得出城。隨松園。訪隔墻林姓人家。此家以甲第名於都下。室凡二百餘間。重樓複道。極其奢麗。東出西入。歸路還迷。雖帝闕,侯第。無以加此。中有一靜室。左右置香木榻。四壁皆古人書畫。琉窓繡戶。玲瓏㶞漾之中。掛郭汾陽行樂圖。其意隱然有自比之心也。


이로써 보건대 곽분양행락도라는 명칭이 그때 있었고, 더구나 그것을 제작하고 걸어놓은 데가 청이었음을 본다. 이는 아무래도 소위 곽분양행락도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명칭이 고정하지 않았으며 베리에이션 variation 이 많았음은 아래 성호전집 제4권 / 시詩를 보건대 명백하다. 

 

〈곽 영공 가경도〉〔郭令公家慶圖〕

여덟 아들 일곱 사위 모두 공에 오른 건 / 八子升公七壻均
곽 분양 제외하고 다시 또 누가 있나 / 郭汾陽外更何人
한 조정의 작위 공훈 대적할 자 없었고 / 同朝列爵勳無敵
이성으로 왕에 봉해졌고 최고 자리 올랐네 / 異姓封王位極臣
나이와 덕 다 높은 건 세상에 드문 일이고 / 齒德兼尊稀世有
부부 모두 장수한 건 천복을 받은 거지 / 夫妻並壽自天申
그림에 상서로운 구름 햇빛 더해지니 / 祥雲瑞旭添光景
세심한 유랑의 붓 묘사가 진실하네 / 細意劉郞筆寫眞
ⓒ 한국고전번역원 | 이기찬 (역) | 2015

 

이에서는 곽영공가경도라 했음을 본다. 영공은 그 중서령인가 하는 관직을 역임한 데서 비롯한다. 

근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미국으로 반출되어 그곳 어느 박물관에 소장한 조선후기 저 그림을 들여와서 국내에서 단돈 땡전 한 푼도 안받고 쏵 개비 고쳐주어 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단다. 아래는 그 한글보도자료 전문이다. 요새 미국 애들이 재미붙여 한국에 가면 공짜로 쏵 성형수술해 준다는 소문이 돌아 자꾸자꾸 고쳐달라 가져온다. 

 

배접지로 쓴 《정묘사월군색소식丁卯四月軍色消息》, (1867, 고종4년)

 



국외소재문화재 보존처리 지원사업 성과 공개회
모국에서 되살아난 조선시대 <곽분양행락도> 병풍
-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품, 7월부터 현지에서 일반 공개 예정 -

국외소재문화재재단(사무총장 김계식, 이하 재단)은 미국 시카고미술관(관장 제임스 론도, James Rondeau) 소장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30일 그 성과를 언론에 공개한다.(장소: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이번 공개회는 재단의 ‘국외문화재 보존・복원 및 활용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2021년 8월 착수 된 이래 지난 10개월 간 성과를 정리해 소개하는 것이다.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노년의 분양왕 곽자의(郭子儀, 697-781)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회화이다. 그는 무장으로서 성공했고, 무병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세속에서의 복을 마음껏 누린 인물로 꼽힌다. 조선시대 사대부층과 왕실에서 이 같은 부귀와 다복을 소망하며 <곽분양행락도>를 만들어 소장했는데, 특히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시카고미술관의 <곽분양행락도>는 1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현존 <곽분양행락도> 가운데 필치가 고르고 매우 우수하며, 색채도 잘 남아 있는 편에 속한다. 화면의 전체적인 구도, 제재를 화면에 구성하는 방식, 채색의 색감, 인물 묘법, 각종 장식적인 요소들의 표현 등을 보면 이 작품은 왕실에서 사용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격식과 수준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한편 보존처리 과정에서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다양한 조선시대 행정문서들이 <곽분양행락도>의 배접지로 사용된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중 《증산현갑자식남정안(甑山縣甲子式男正案)》(1864), 《정묘사월군색소식(丁卯四月軍色消息)》(1867) 등 문서 일부가 배접지로 쓰였는데, 《증산현갑자식남정안》은 1864년 평안남도 증산현에 거주하는 남정들의 군역을 조사한 호구 단자로 품관, 성명, 나이, 출생년 등이 수록된 지방 공식문서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곽분양행락도>의 제작시기가 1867년 이후라는 사실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재단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국외문화재 보존・복원 및 활용 지원 사업’을 통해 총 9개국 26개 기관을 대상으로 105점의 국외소재문화재를 보존처리하여 현지에서 전시되거나 활용되도록 했다. 재단은 앞으로도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보다 온전히 보존되고 현지에서 널리 소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다.

○ 유 물 명 :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 소 장 처 : 미국 시카고미술관
○ 유물번호 : 1940.4
○ 크 기 : 187.1×430.8cm(화면 156.5×427.6cm) / 8폭 병풍
○ 재 질 : 비단에 채색
○ 제작시기 : 19세기 후반
○ 입수경위 : 1940년 4월 26일 William J.Calhoun 기증

【시카고박물관 기증자】
William J. Calhoun(1848-1916) / 미국의 저명한 기업변호사, 공무원(중국 특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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