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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관재貫齋선생, 증조부 시를 부채에 옮겨적다

by taeshik.kim 20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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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관재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란 어른이 계셨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제자지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같은 다른 제자하고는 나이 차도 상당했고, 그 위상이 달랐다. 심전을 교수라고 하고, 다른 제자를 학부생이라 치면, 관재는 조교였달까. 

어떤 면에서는 진짜 근대 한국화 큰형님은 심전이라기보다는 관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도영은 그림이 뛰어났고, 한층 진보한 사상을 지녔으며, 사회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전통회화를 주로 손댔지만, 그에 머물지 않아 여러 교과서와 소설책, 잡지 삽화를 맡았고, 한국 최초의 신문만평을 그려 시사만화가로도 활약한 인물이 바로 이도영이다. 

그렇지만 한국미술사에서 그는 좀 야박하게 평가받는데,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당시 미술계에서 이도영의 위상이나 영향력을 생각하면 분명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도영은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회화를 보면 그림보다 화제畵題가 더 유려하게 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도영이 죽던 해, 1933년에 부채에 쓴 글씨가 최근 인사동 경매에 나왔다. 그 글씨도 글씨려니와, 그 내용과 사연이 꽤나 흥미로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내 나이는 여든 하나요 / 네 나이는 예순 하나 / 꿈 속에서 옥기린 보았더니 / 갑신년 이월 어느 날 ... "로 시작하는 장편 오언시다. 퍽 특이한 내용인데, 그 사연은 시 뒤쪽 관지款識에 상세하다. 

"이상은 곧 나의 증조 우석공友石公이 할아버지 연북공蓮北公의 회갑잔치에서 지은 시다. 오당五堂 형이 비 오는 날 동촌東邨의 내 집으로 나를 찾아와 서로 대화하다, 무료해지니 책상 위 육완당집六玩堂集을 끌어당겨 읽다가 이 시에 이르러 기뻐 감탄함을 깨닫지 못하고, 나에게 써줄 것을 요청하니 어찌 필력이 졸렬하다 사양하겠는가. 오직 바라는 바는 노사백老詞伯의 눈으로 아껴 감상하는 것뿐이다. 계유년 속불일俗佛日 관재 이도영."

이도영 증조부는 이풍익(李豊翼, 1804~1887)이란 분이다. 이조와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 관료였지만, 한편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긴 풍류객 면모도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고 만든 기행서화첩 《동유첩》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실경산수전에 나와 있다. 또 그가 집 뜰에 서 있던 오동나무를 잘라 만들었다는 거문고 '오공금'은 안목 높던 흥선대원군도 탐내어 관찰사 자리와 바꾸자고 제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 이풍익이 여든넷을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장수를 누렸다. 그러니 아들 환갑잔치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성대한 잔치로부터 50여 년이 흘러, 병으로 누운 지 오래인 증손자 이도영에게 사월 초파일, 손님이 찾아온다. '오당'이란 분인데, 이 시기 '오당'이라는 호를 쓴 인물로는 강동희(姜東曦, 1886~1964)란 인물을 확인한다. 

그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군서기와 도평의회 의원, 동진수리조합장,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친일 인사였지만, 근세 호남의 거물 문인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한테서 시서화를 배워 능했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같은 당대 명사와도 교류했다. 관재와는 두 살 차이라 허교許交할 법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날 따라 오당이 빈 부채를 가져왔던가 보다. 

접힌 자국이 넓은 점으로 보아 가느다란 부챗살이 띄엄띄엄 있는 일본식 부채였다. 한참 이야기하다 뭔가 무료해진 오당이 관재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집어든다. 집주인의 증조부 문집 육완당집이다. 한참 읽다가 어느 시에 멈춘다. 그리고 오당이 관재한테 부탁한다. 마침 빈 부채가 있으니 여디가가 이 시를 적어주시오. ㅡ 이처럼 그 날 풍경이 그려진다. 

다만, 이 작품을 진품이라고 확정하기에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대목도 없지 않다. 우선, 강동희를 '노사백'이라 한 점이 걸린다. 이때 이도영은 쉰이고 강동희는 마흔여덟이다. 물론 정조는 마흔아홉에 자신을 翁이라 일컫기도 했지만, 지금 정서로는 사실 이해가 쉽지 않다. 

또, 《육완당집》은 이도영이 죽고 나서인 1936년에야 간행된다. 오당이 본 것은 혹 간행 전 초고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이도영이 낙관에 초파일을 俗佛日속불일이라 한 점도 주시한다. '속불일'이란 표현은 없다. 浴佛日욕불일이 아닐까 싶어도, 사람 인 변은 틀림없다. 관재가 이때 정신이 약간 혼미해서 헷갈리거나 잘못 쓴 것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라도 더욱 매우 재미있는 작품임엔 틀림없다.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교유를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제법 높아 보이는데, 최근 경매에서 형편없는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점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낙찰가는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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