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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궁주宮主 원주院主 전주殿主

by taeshik.kim 2018.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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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화랑세기》가 공개되었을 무렵, 저들 용어가 다시금 세간, 엄밀히는 고대사학계에 오르내렸다. 이들 용어는 《화랑세기》 곳곳에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들은 실은 고려사를 무대로 하는 곳에 빈출한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딱 두 군데만 등장하는 것으로 안다. 나아가 《해동고승전》에도 한군데 보이거니와, 그 등장 맥락이 《삼국유사》의 그것과 같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이것이 고려시대 봉작인데, 시대를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에 붙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제법 많았다. 그런 의심이 이런 용어로 넘쳐나는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위작이라는 의심으로 번지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이들이 대표하는 용어 문제로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여 《화랑세기》 가짜론을 설파한 이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석·박사를 하고 지금은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재직 중인 권덕영이다. 


하지만 권덕영은 틀렸다. 《화랑세기》 가짜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 논거가 다 틀렸다는 뜻이다. 저들 봉작은 신라시대에 엄연히 존재했다. 그것도 이미 상고기 이래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데서, 《삼국유사》에 아주 드물게 출현한다 해서, 그런 용어 혹은 개념이 삼국시대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 혹은 확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근자에는 지금 신라사학회장으로 신라사 전공인 박남수가 《화랑세기》에 근대 일본 스포츠 용어가 보인다는 점을 《화랑세기》 가짜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거 아주 허무한 소리다. 그 텍스트에 예컨대 박남수는 '검도劍道'라는 용어인가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삼은 것으로 보이거니와, 이는 이종욱 《화랑세기》 교감본과 그 번역본을 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세기》 원문을 보면 이런 용어 자체가 없다.


<상장돈장>


본론으로 돌아가 궁주宮主 원주院主 전주殿主 따위는 적어도 고려시대 개념을 보면, 후비后妃 봉작들이다. 임금의 여인들인 정비와 후궁들은 궁궐 안에 각기 거처가 있기 마련이다. 이건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신라시대에도 그랬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한데 이런 건물채도 주인따라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시대를 통괄하면 대체로 정궁正宮 주인은 궁주라 했고, 그 아래 등급이 떨어지는 후궁들이 사는 곳을 원주니, 전주 따위로 구별해서 불렀다.


《화랑세기》에는 후비만이 아니라 왕자들에 대해서도 각종 봉작이 있고, 그에 따른 다른 운용 시스템이 보인다. 예컨대 임금의 후궁이 낳은 아들, 곧 조선시대 개념으로 보면 정비 소생인 대군大君에 견주어 그냥 군君으로 일컬은 서자들은 전군殿君이라 했다. 한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 후비와 왕자들의 운용 원리를 보면, 조작 불가능이다. 죽었다 깨나봐라 너희가 만들 수 있는지. 뭐, 그러니깐 박창화 천재론이 나오긴 하더라. 그는 천재라서 못하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내가 《화랑세기》를 정리할 적에, 이런 후비 봉작제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고려시대 관련 연구성과를 검출하니, 형편없었다. 관련 연구는 태부족이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암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궁주만 해도, 시대를 통괄해서 정궁에 내리는 봉작 같지만, 이것도 넘나듦이 있어 소위 몽골간섭기에는 일대 변화를 불러온다. 원주 역시 그랬다. 기존 궁주 원주 따위를 초월하는 원나라 공주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남당 박창화>


한데 이런 변화 양상이 고려사학계에서는 전연 정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변화양상은 고려사 후비열전을 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통독해야만 보인다. 그것도 미친 듯이, 그리고 세심히 봐야 그 실체와 그 변화양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편찬자들이 우리의 구미에 맞게 기록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흘려버린 저층을 파고 들어야 한다. 그렇게 정리 추출한 것 중 일부를 나는 이곳저곳 논문 형태로 정리하기도 했으니, 그 선하先河를 이룬 것이 아마 2002년 혹은 2003년인가 하는데, 국립민속박물관 잡지 《민속학》에다 싸지른 사금갑 설화 분석 논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궁주에 대한 연구성과 몇편이 제출된 것으로 안다. 그런 저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언커니와 모조리 《화랑세기》  영향이다. 아무도 《화랑세기》를 봤다는 말은 안하지만, 아무도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하지만, 설혹 그들 자신이 《화랑세기》를 의식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궁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이유는 《화랑세기》 없이는 설명하지 못한다.


한때는 저런 양태가 몹시도 비도덕이라 생각했지만, 뭐 이제는 그런갑다 한다. 언제나 말하듯이 《화랑세기》는 그것이 진서건 위서건 관계없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핵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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