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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김삼대자(金三代子), 목가구에 온몸을 던지다

by taeshik.kim 2019.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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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와 메모를 풀어야겠지만 기억에 의존해 우선 정리한다. 문화재관리국 초창기 역사에서 흔치 않은 여성 전문 학예직인 김삼대자(金三代子) 선생을 오늘 마포 상수역 인근 자택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고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가며 세 시간가량 인터뷰했다.
 
이상하게도 나랑은 직접 인연이 거의 없으나 명성은 익히 들었으니, 같은 직장 후배였던 정계옥 선생이 선생과 친한 데다 마침 홍익대를 사이에 두고 그 정문과 후문에 사는 까닭에 정 선생을 통해 인터뷰 주선을 부탁해서 성사한 자리였다.
 
 

 
 
1943년 양력 1월, 음력으론 전해 12월, 뜻밖에도 중국 북경北京에서 태어나 해방 이듬해 1월 귀국했다. 주민등록엔 양력으로 올랐단다.
 
1919년생인 선친은 삼청동을 근거지로 하는 갑부 집안 자식이었던 듯, 고등학교를 이미 일본서 다니고 그곳 일본대학을 나와 태평양전쟁기엔 군수물자를 대는 사업을 했다 한다.
 
"아버지가 요새 기준으로 말하면 친일을 한 셈인데, 북경에서 일본 군대에 타올 같은 걸 납품한 모양이다"고 한다. 그 북경 생활기간에 작은오빠, 선생, 그리고 바로 밑 여동생이 태어났단다. 
 
 

 
 
선생은 2남6녀 중 딸로는 장녀고 위로 네살 두살 터울인 오빠 둘이 있단다. 
 
우선 그의 이름 삼대자(三代子)가 수상쩍어, 왜 이름이 이 모양이냐 여쭈었더니 집안에 삼대째 여자가 없어 딸 낳자 해서 저리 지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는 3대째 아들만이라는 뜻이니, 아들 말고 딸을 달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언뜻 일본 냄새 완연한 저 이름으로 놀림을 하도 많이 당해 개명하고자 했지만 선친이 완강히 반대해 좌절했단다.

이름이 좋아 그랬는지 선친은 내리 딸만 여섯을 두었으니 효과를 톡톡히 본 모양이다.
 
선생은 삼청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25 일사후퇴 때 피난갔다 돌아와서는 진학률이 좋다는 재동국민학교로 전학해 마치고는 숙명여중고를 나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에 61학번으로 입학했다. 
 
 

석주선(왼) 선생과 함께. 가운데가 김삼대자, 오른쪽이 최은수. 이 사진에서 놀라운 점은 최은수 선생 미모다.

 
 
65년 졸업하고는 그해 하반기에 같은 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가 《이조시대 등촉대 연구(李朝時代燈燭臺硏究)》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가 따로 있지만 실제 선생은 당시 국박 미술과장 최순우였다.  
 
67년 결혼하고 69년 학위를 딴 선생은 70년 무남독녀를 얻었으니, 이가 지금 미국 어느 주립대 수학과 부교수를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손주도 없단다.  최순우는 수업을 새문안교회 임순희 라는 여자 집에서 했단다. 
 
석사 마치고 집안 생활하는데 교수 시켜준단 말에 속아 조교생활을 하며 책도 대신 써주고 했단다. 뭐 국물만 빼먹었겠지 이런 교수놈 요새도 한둘이 아니니깐. 
 
이랬던 그가 국립민속박물관 개관 직후 최순우가 당시 군발이 출신 문화재관리국장 이치순에게 추천해 거기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가 3개월 뒤에 시험을 쳐서 정식 학예연구사시보가 되었단다. 추천 당시 최순우는 관장이 되어 있었다. 
 
 

최순우

 
 
"최순우 선생이 오래서 지금 민박이 쓰는 국박 관장실로 갔어요. 선생님이 이치순 국장을 부르더라구요. 저랑 셋이 앉아 있는데 최 선생님이 국장한테 절 소개하시면서 김선생 쓰면 좋을 거요 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 전엔 절더러 맨날 미스김이라고 부르셨거든요. 그때 국장이 최운우 선생한테 꼼짝도 못했어요. 군발이 출신이라 전문성도 없었으니깐 그랬겠지요." 
 
학부 시절인가 대학원 시절인가 자료 조사한다고 민속관을 가본 적 있는데 그때 민속관 장주근과 이종철 둘이서 한겨울에 추워서 오돌오돌 떨면서 햇빛을 쬐고 있더란다.
 
이렇게 해서 정년 2년을 남겨둔 2000년 명예퇴직하기까지 정부미 생활을 한다. "금수저 아닌가"라는 말에는 "금수저까진 아니고 은수저는 된다"고 너털웃음 짓는다. 
 
 

고가구 조사 중인 김삼대자

 
 
6.25땐 피난을 못가고 일사후퇴 때 피난을 가는데 돈을 전대에 쌓아서 갔단다. 부럽다. 똑같은 아버진데 왜 이리 다른지?
 
그런 그가 왜 공직으로 갔을까? 
 
솔직하다. 시집살이 고되서 도망쳤단다. 시어머니 등살에 못살겠다 싶어 도망쳤단다. 
 
남편은 독자다. 시어머니가 그랬단다.
 
"김삼대자는 받아들이겠는데 며느리 김삼대자는 못 받아들인다"고 말이다.
 
공부도 좋았단다. 
 
하지만 민속박물관과 중앙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오간 그의 공직생활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단다.

왕따였단다. 뭐 금수저 은수저지 석사학위 소지자지 무엇보다 있는 집 자식이라 해서 그 자신도 꽤나 뻐긴 모양이다.

자기도 자기가 그리 비치는줄은 몰랐단다. 

뭐 알 만하다.
 
하지만 부자인 까닭에 꽤 많은 물자를 댄 모양이다. 양주며 포도주 같은걸 기관 행사에 댄 모양이다. 
 
그는 목가구 전문가다.
 
 
*** 이상은 July 8, 2017, 그를 인터뷰하고 난 직후 페이스북 내 포스팅이다. 

그의 정식 인터뷰 기사는 아래에 실렸으니 참고 바란다. 

 
한국의 목가구 연구를 개척해나간 김삼대자
 
이 즈음, 그와 관련한 증언들을 덧보탠다. 
 
저 인터뷰 당시 선생은 루비 반지를 끼고 나왔으니, 말하기를 그 반지는 김 선생 어머니가 당신을 낳았을 적에 할머니가 당신한테 선물로 주신 거란다. 그걸 다시 선생이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민속박물관 생활은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으며, 민속박물관을 본인 자체와 동일시하는 이 분야 거물 이종철 전 민속박물관장과 겹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니, 두 사람 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나 분명한 점은 언제나 이종철 관장이 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관장 뒷담화는 좀 많이 하면서 웃었다. 
 
숭실대를 정년퇴직한 최병현 선생 증언에도 일부 김삼대자 선생 관련 언급이 있다. 
 
최 선생에 따르면, 8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을 떠나 한남대로 자리를 옮긴 최 선생은 1996년에는 모교 사학과로 다시 옮겼다.

그가 비운 황룡사 발굴 현장 책임은 신창수 선생한테 넘어갔고, 한남대 후임은 구석기 전공인 연세대 출신 한창균 선생이 채웠다.

관리국을 떠날 당시 그는 학예연구사였다. 왜 연구관으로 진급하지 못했느냐 물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떠나기) 그 1년 전에 연구관 심사가 있었는데 나는 미끄러졌어. 당시 문화재관리국시절인데 (산하) 문화재연구소에는 연구관 티오(TO)가 없었어. 그래서 당시에는 국립박물관에서 데려가면서 연구관으로 승진을 시켜주곤 했어. 연구소에서는 나하고 박영복 씨 하고 두 사람이 대상이었어. 결국 연구소에서는 박영복 씨가 (박물관으로) 갔어. 당시 연구관 승진 대상자가 6명이었어. 면접시험만으로 4명을 선발했는데, 이건무·이강승·한영희·박영복 씨가 되고, 나하고 김삼대자 선생하고 둘이 떨어진 거야.”

 
***
 
이런 김삼대자 선생이 마침내 아래와 같은 상훈으로 그간의 노력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다. 

내가 그간 이와 같은 분들 발굴 인터뷰에 공을 들인 것도 어쩌면 조그마한 힘을 보탰노라 자평해 본다.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한 김삼대자·김현곤 씨 은관문화훈장
송고시간 2023-12-07 09:51 
문화재청, 올해 문화유산 유공자 7명·단체 4곳 선정…8일 시상

https://www.yna.co.kr/view/AKR20231207047400005?section=culture/scholarship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한 김삼대자·김현곤 씨 은관문화훈장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우리 문화유산을 연구해온 전문가와 전통 악기의 명맥을 이어온 장인 등이 훈장을 받는다.

www.yna.co.kr

(2023. 12. 7 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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