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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김흠돌을 논한다(1) 초고속 승진

by taeshik.kim 201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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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가 정리한 화랑 제도 흐름을 보면, 진흥왕 즉위 원년(540)에 풍월주(風月主) 임명으로 시작한 화랑은 이후 극성을 구가하다 진흥왕 말년~진지왕 시대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어, 그 시초가 된 원화(原花)가 부활한 일도 있고, 나아가 그 무렵 그 기풍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어, 붕당이 등장했으니 특히 문노(文弩)가 이끄는 일파는 기존 도교 교리 중심을 내세우며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고 산수간을 노닐며 심신을 수양한 교단 성격에 일대 변혁을 불러와, 군사 기풍을 진작하기도 했다. 이때부터가 실은 신라 화랑 혹은 그가 이끄는 소위 화랑도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인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많다. 다시 말해 '신라 화랑=가미가제 특공대'라는 측면이 부각하는 시점이다. 


군사집단화한 화랑 무리 성격은 김유신 시대에 정점을 구가한다. 김유신의 성향은 익히 알려졌거니와, 대가야계인 문노에 견주어 같은 가야계라 해도 금관가야 혈통인 김유신은 그의 문객(門客)들을 전사(戰士)화했으니, 이에서 이후 전개할 일통삼한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무수한 장군과 사졸이 배출되기에 이른다. 


그 어떤 조직이건 그 초장기는 나름 혁신을 표방하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흐름이 변질하고, 나아가 그것이 주류의 위치를 점하면서, 그런 개혁성을 상실하고 보수 혹은 권력집단화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거니와, 신라 화랑 교단 역시 그러해 이를 발판으로 체제 전복을 꿰하는 일에 동원되는 일도 있었으니, 멀게는 진지왕 폐위에 관여한 6세 세종(稅宗)과 7세 설화랑(薛花郞)과 8세 문노가 그러했다. 이들은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진지왕을 몰아내 궁에 유폐케 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일통삼한기 전쟁을 맞아 화랑 교단 출신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태종무열왕 김춘추(18세)와 김유신(15세)을 필두로, 흠순(欽純·19세)과 양도(良圖·22세)와 군관(軍官·23세)과 진공(眞功·26세)과 흠돌(欽突·27세) 등이 그들이라, 이들은 특히 대(對) 백제, 그리고 대 고구려 정벌전쟁에는 총사령관과 그 예하 군단장 장군, 혹은 외교 전선에서 종횡무진한 활약을 보인다. 


군단화한 화랑 교단은 전쟁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제는 그것으로써 연명하기는 힘이 들었으니, 고구려를 멸하고, 곧이은 소위 나당전쟁에서도 신라가 승리를 구가하자, 새로운 변혁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색기에 흠돌의 반란이 터진 것이다. 


681년 음력 7월 1일, 일세의 영걸(英傑) 문무왕이 붕하자 왕위는 그의 아들 정명(政明)에게 가니, 이가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다. 이것이 흠돌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上에 의하면, 김정명은 문무왕 재위 5년(665) 가을 8월에 태자가 되었다가 16년 뒤 마침내 대권을 움켜쥔다.  《삼국사기》 신문왕본기 그의 즉위년조에는 신문왕 김정명이 "문무대왕 맏아들로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라고 하면서, 그의 왕비에 대해서는 이상한 흔적을 남기거니와, 이에 의하면 "왕비 김씨는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니,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그를 맞아들였지만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궁중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어떤 목적에서 누락한 새로운 사실들을 왕창 들고나온다. 우선 흠돌은 김유신과 흠순의 조카이며, 나아가 신문왕에게는 할머니인 문명태후(文明太后), 곧 문희(文姬)의 조카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는 네 자녀가 확인된다. 아들로는 유신과 흠순이 있고, 딸로는 보희(寶姬)와 문희가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의 막내가 있으니 정희(政姬)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진평왕의 서자인 보로(寶路)에게 시집가서 남매를 두니, 위가 흠신(欽信)이라는 딸이고, 그 아래 남동생이 흠돌이다. 김흠돌이 출세가도를 달린 힘은 바로 이런 든든한 백에서 말미암았다. 특히 문무왕비인 문명에게 갖은 총애를 받은 듯하다. 


이를 발판으로 진평왕 49년(627)에 태어난 흠돌은 서른살이 된 무열왕 3년(656)에 27세 풍월주가 되고, 7년간 재위하다가 문무왕 2년(662), 오기(吳起)에게 지위를 물려주니, 이가 《화랑세기》 저자 김대문의 아버지다. 흠돌은 풍월주 재임기간 장군으로 고구려 정벌 전쟁에 나선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上을 보면, 백제를 멸한 신라는 문무왕은 원년(661) 가을 7월 17일,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군에 호응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킨다. 이때 신라군 진용이 나열되거니와, 총사령관인 대장군은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이었다. 그 휘하에 각 군단을 지휘한 장군들이 등장하거니와, 흠돌(欽突)은 대당(大幢) 장군으로 출전했다. 이에 참여한 다른 장군들을 보면 문무왕 친제인 김인문을 필두로 진주·천존·죽지·천품(天品)·품일·충상·의복(義服)·진흠·중신(衆臣)·자간·군관(軍官)·수세(藪世)·고순(高純)·술실(述實)·달관(達官)·문영·문훈(文訓)·진순(眞純)·진복(眞福)·의광·위지(慰知)가 그들이다. 


이는 흠돌이 그 쟁쟁한 선배들 뒤가 아니라, 이제는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인 장군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 신호탄이었다. 이때 그는 서른다섯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문무왕 8년(668) 6월 21일, 마침내 고구려에 최후 일격을 가한 전쟁에 다시 흠돌은 고개를 내밀거니와, 이때 신라군은 이미 고령에 따른 건강 문제로 현장에 출동은 하지 못하고, 금성에 머문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아 동원 가능한 군사력을 총징발한다. 이에는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을 필두로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이 대당 총관으로 포진했다. 


이제는 마흔둘 인생 정점에 치닫기 시작한 흠돌은 관위가 이미 재상급인 대아찬으로 승진해 있었다. 초고속 승진이었으니, 이 역시 그 막강한 김유신 가(家)의 후원 없이는 설명이 곤란한 측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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