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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껍데기 에리로 세운 대원각사비

by taeshik.kim 201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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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민족해방운동 성지 중 한 곳이라는 서울 종로통 한복판 이 공원이 근자엔 다른 상징을 탑재했으니, 고령화 사회 지표와도 같은 곳이라, 갈 곳 없는 노인들과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 집결지로 통용한다. 


이곳이 그보다 더 유서 깊은 역사 흔적이란 사실은 경내 십삼층석탑과 더불어 그 한 켠 비각이 둘러친 이 석물이 우뚝히 증언하거니와, 이를 일러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라 한다.


그 이름은 비석 자체에 보이거니와 머릿돌 전면에 전서체로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 적어놓았다. 그러니 이 비는 볼짝없이 대원각사라는 사찰이 어떤 내력으로 창건 혹은 중수되었는지를 적은 족보다. '대大'는 똥폼 낸다 붙인 수식어니, 그냥 원각사라 보면 대과가 없다. 


그 구체적인 내력이야 거북 등을 뚫고서 고추 선 대리석제 직사각형 몸돌 앞면과 뒷면에 새겼지만 글자는 거의 다 마멸되어 육안으로 판별할 만한 흔적이 거의 없다.


이 비는 받침돌인 귀부, 본문을 새기는 몸돌, 그리고 머리에 해당하는 이수 삼박자를 다 갖춘 완성체라, 더불어 원각사를 창건한 시대와 주체가 독실한 불교신자로 저명한 조선 세조이며 저 비석이 건립된 시기 역시 그에서 아주 가차운 성종 연간 초반기라, 여타 동시대 비석에 견주어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내가 이 원각사비 중에서도 거북 받침돌 뒷면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거니와, 저를 보면 조또나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도 울고 가리라. 저 생생한 꼬리, 특히나 껍데기를 에리로 말아올린 저 표현이야말로 최고의 예술 경지를 말해준다. 

자세히 보면 거북이가 응가하고자 괄약근에 힘을 주는 듯하나, 그보단 섹스 중 힘쓰는 모습 아닌가 못내 의심한다. 저 세 갈래는 꼬리임이 분명한데, 한데 거북 꼬리가 세 줄기던가? 


현장에 선 안내판 전부를 옮기되, 조사만 약간 손질한다. 영문은 일단 현지 안내판 그대로 옮긴다. 

대원각사비
Monument of Wongaksa Temple
大圆觉寺碑 | 大円覚寺碑
지정번호 : 보물 제3호 , 시대 : 1471년(성종 2)
소재지 : 서을특별시 종로구 종로 2 38-8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에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희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俱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었다. 거북이 모양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을 자리를 만들었다. 몸들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 전체 높이는 494센티미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각각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은(金守溫)이 앞면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이 뒷면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Designation : Treasure No. 3/ Period : 1471 (2n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Location:38-3, Jongno 2-ga, Jongno-gu Seoul

Monument of Wongaksa (Temple) was erected in 1471(2n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to record the particulars of the foundation of Wongaksa on this monument. King Sejo, who was a devout believer of Buddhism, built Wongaksa at the site of Heungboksa(Temple) in 1465 (11th year of King Sejo's reign), after being amazed by the incarnated sarira at Hwoeamsa in Yangju. 

When a thirteen-story stone pagoda was completed in 1467(13th year of King Sejo's reign), King Sejo held a dedication ceremony together with Yeondeunghoe (Lantem Festival) and directed subjects to erect a stone monument recording the circumstances. A turtle shaped stone prop was made, and lotus leaves were carved on the back of the turtle to create a space for the body stone of the monument. The body stone and the head stone 'isu' were made with a single stone. The height of the monument is 494cm. 

The turtle was made of granite, and the body and head stone was made of marble. Master writers and calligraphers at the time were in charge of the inscription. Kim Suon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front and Seong Im wrote it in a calligraphic style. Seo Geojeong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back and Jeong Nanjong wrote it in a calligraphic style. Wongaksa became an empty temple as private houses near the royal palace were pulled down during the period of King Yeonsangun. In modern times, the area was turned into a park. Only a Ten-story Stone Pagoda (National Treasure No. 2) and this monument remain today, showing traces of Wong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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