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현장

"나도 참 많이 고생한 거 같아", 어느 고고학도의 일생

by taeshik.kim 2018. 10. 27.
반응형

어제(October 26, 2017) 하루는 휴가였다. 그런 휴가에 느닷없이 익산 왕궁리로 내가 향한 까닭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때문이었다. 현장 자문회의가 있다 했고, 그 자문위원으로 가신다 해서 서둘러 내려갔다. 


1947년(실제는 1946년 1월) 경북 영주 출생. 아버지는 육군 장교 출신으로 5.16 때 군을 떠났다. 외지 생활을 하는 아버지와는 떨어져 고향 영주 안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안정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있는 부모와 같이 살고자 중앙선 야간 열차를 타고는 홀로 상경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처음엔 영등포 신도림에 살다가 중동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문래동 적산가옥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의 주공아파트마냥 그때 문래동엔 상자로 찍어낸 듯한 적산가옥 500채가 있어 갑·을·병·정의 네 등급으로 구분됐다. 갑 적산가옥은 수도가 실내에 있었고, 병과 정은 공동수도를 사용했다. 윤 전 소장은 을 적산가옥 거주자였다.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입에 거푸 낙방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대신 써준 원서로 단국대 사학과에 1967년 입학하고 그에서 정영호 선생을 만나면서 이후 인생 향로가 정해졌다. 2학년 때인 68년 4월, 군에 들어갔고, 1973년 2월 28일 졸업했다.


졸업 직후 정영호 선생이 김정기 박사라는 분이 있는데 가서 만나보라 했다. 약속한 날 김정기 박사를 찾아가니 그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이 둘이 더 있었다. 숭실대 최병현과 이화여대 소성옥이었다. 이튿날 셋은 괴나리봇짐을 매고 동대문에서 버스를 타고는 경주 팔우정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이들을 반긴 이는 김동현과 지건길. 이들은 이튿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으니 그곳이 바로 훗날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155호 고분이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고고학 파트 팡파르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98호분을 파고, 다시 안압지로 갔다. 그렇게 시작한 경주 생활은 1984년 2월 28일까지 이어졌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서울 문화재연구실 미술공예실로 복귀하자마자 또 일이 터졌다. 그해 4월 초파일, 화순 쌍봉사 대웅전에 불이 났다. 전소됐다. 기단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김기웅, 조희경 선생과 더불어 이번에는 화순으로 내려갔다. 절간에서 조사를 하다보니 고기가 먹고 싶었다. 


화순군청 공보실로 전화를 넣었다. 

"양계장 폐닭 몇 마리 좀 보내"


읍내에서 하루 한 대 오는 버스 편에 실려 시름시름한 닭 다섯 마리가 왔다. 그걸 절에다가 풀어놨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풀 뜯어먹고 하다 보니, 제법 토종닭으로 변했다. 그걸 잡아 먹으니 꿀맛이었다. 


시간이 흘러 서해안 도서 조사에 나섰다가 대천항 다방에서 오만분의일 지도를 펼친 그는 간첩으로 몰려 소총을 들이대는 경찰을 마주했는가 하면, 파주 민통선 안으로는 지뢰밭을 헤치며 고려 벽화고분 조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익산 어느 농촌 고등학생이 칡뿌리 캐다가 무덤 연도가 걸렸다는 신고를 접수하고는 내려가 조사해 보니 니미랄 그것이 바로 입점리 고분이었다.


정계옥, 박윤정을 데리고 나주 복암리 3호분을 한창 발굴 중인데 느닷없이 조선일보 신형준이 와인 한 병을 사들고는 현장을 들이쳤다. 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한 내부 조사. 금동신발이 출현했다. 저 밖에는 신형준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는 줄담배 피워가며 지켜본다. 


"이봐 신형, 특별한 것도 없는데 자전거나 타고 바람이나 쐬고 와."


신형준은 속았다. 마을로 담배 사러 간 사이, 현장은 후다닥 금동신발을 수습하고는 정계옥 차량 트렁크에다가 숨캤다. 그날 저녁 정계옥은 조용히 차를 몰고는 본소 보존과학실로 향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 선 윤근일



풍납토성에서는 매일매일이 전투였다. 능글능글맞은 그를 쏙 빼닮은 신희권이 행동대장. 둘은 매일매일 주민들과 사투를 벌였다. 저 토기 쪼가리가 뭐냐 이곳이 백제 왕성이라는 근거는 뭐냐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고 시위가 빈발했다. 


"김형.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 참 많이 고생도 한 거 같아"


어느덧 칠순을 넘긴 그도 어제 왕궁리 벌판에서 보니 영락없는 할배였다. 


*** 이는 내 페이스북 2017. 10. 27 포스팅이며, 이를 토대로 하는 관련 기고문은 문화재청 발간 월간 《문화재사랑》 2017년 11월에 실렸으니, 참고바란다. 파란 부분 링크하면 기사 본문이 뜬다. 


반응형

'문화재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끓는 청남대서  (0) 2018.10.31
도선비로 둔갑한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  (0) 2018.10.27
까마득히 잊고 지낸 청와대 불상의 추억  (0) 2018.10.17
청와대 미남불상  (0) 2018.10.16
신라왕 김진흥  (0) 2018.10.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