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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가 만난 사람] 역사학도 이기동

by taeshik.kim 201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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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식장에서의 이기동


이 생활하며 이래저래 만난 사람들로 내 손으로 그들의 행적을 문서화하기도 했으니, 동국대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거친 역사학도 이기동 선생도 그런 양반 중 한 명이다. 이 양반에 대해서는 몇번 언급하기도 했으니, 정리하자면, 그의 역사학에는 나는 찬동하지 않는 부분이 많으나, 인간적으로는 묘한 매력이 많다고 본다. 


아래 재인용하는 내 두 기사는 그의 정년퇴임과 관련한 논급이다. 이 중에서도 그의 정년퇴임식 관련 기사는 나 자신한테 잘 썼다고 기특해 한다.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재직시설 구설에 올랐다. 이른바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사건과 "새파란 것들" 사건이 그것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야 뭐 저런 사람 있냐 하겠지만, 그를 좀 아는 나로서는 참말로 이기동 답다고 당시에 파안대소했더랬다. 



2009.05.31 14:26:26

<사람들> 정년퇴직 이기동 동국대 교수

"출발은 야심만만했으나 결실 없어 회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언제나 그랬듯이 이날도 그는 마치 위경련이라도 겪는듯이 시종 눈을 감고 얼굴은 찡그린 모습이었으며, 머리 방향은  12시5분 전을 가리키는 분침처럼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젖힌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축사 중간중간에 간간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정년퇴임식장에서의 이기동. 뒤쪽 사회 보는 양반이 고 김상현 선생



4살 연상인 신형식(70) 이화여대 명예교수 겸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이 "여기 앉은 이기동 교수는 참으로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랬던 그가 "6학년(60대)이 되고 나더니 이제 사람이 좀 되간다는 느낌을 준다. 나처럼 7학년(70대)이 되고 나면 더 좋아질 것이다"고 축사를 했을 때도 파안대소했다. 


마지막 축사자인 일본 규슈대학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조선사 전공) 교수는 유창한 한국말로 이날 정년퇴임식의 주인공인 이기동(李基東.66) 동국대 사학과 석좌교수의 주된 연구분야가 신라사이며 아호가 석문(石門)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석문은 신라 속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본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어 등단한 이 교수는  "하마다 선생이 문학가적 기질이 다분하다. 석문이라는 호에는 거창한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선생님과 선친 또한 돌 석(石)자가 들어간 호를 사용하셨기에 별 뜻 없이 나도 이 글자를 넣어 내가 직접 만들어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년퇴임식장에서의 이기동. 그는 항상 고개를 열두시오분전 방향에 둔다.



지난 2월 동국대 교수직을 정년퇴직하고 그 석좌교수가 된 이 교수는 "(퇴직) 당시 말로는 홀가분하다고 말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면서 "우선 석좌교수가 되면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다른 무엇보다 학교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늘 정년퇴임식은 내가 학교를 떠났다는 '확인사살'을 하는 셈이며, 그러니 앞으로 더 이상 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자리에 서니 정말로 정년이라는 생각이 부쩍 들고 학교에서 멀어진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는 감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신형식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는 "내 취미는 독서밖에 없다"면서 "일본에 한 번 갈 때면 서점에 들러 문고본만 60권 정도 죽 빼서 늘어놓고는 그 중 읽을 만한 책 10권 내지 15권을 사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그걸 다 읽는 데 6개월 가량 걸리는 그런 생활을 근 20년 동안 하고 있다"는 말로 화답했다. 


이기동 정년퇴임식장에서의 고 김상현 선생



33세 때인 1976년 5월 경북대 인문대학 사학과 전임강사가 된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 교수는 혈기방장한 그 때는 "입만 열었다 하면 (나는) '세계학계' '세계학계'라는 말을 내뱉었고, 한국고대사 연구도 '세계학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격을 높여야 한다는 야망이 불탔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고대사 연구를 '세계 이론화'하기 위해 "신라 골품제도를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도 해 보고, 신라 화랑제도를 '청소년 운동'(youth movement)으로 접근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내 그런 열정은 사라지고 "아주 편하게 살기 위해 쓰기 쉬운 글만 골라 썼다"는 그는 "앞에서 내 연구업적을 나열하면서 논문이 104편이라고 했지만, 진짜 논문은 60편 정도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내가 정열을 기울인 진정한 논문은 2-3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출발은 세계학계를 상대로 해야 한다고 제법 야심만만했으나, 남겨 놓은 것이 없으니 처음은 있었으나 결실이 없는 사람, 내가 바로 그 짝"이라는 회한을 토로한 그는 "국력과 학계의 수준은 비례하는 것인데 아직도 우리 국력이 약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기동 정년퇴임식장에 나타난 와세다대 이성시 선생. 이기동 선생을 진짜로 존경하는 정신이 많다. 그런 나를 "뭐 볼끼 있다고..." 핀잔하곤 했다.



29일 저녁 동국대 서울캠퍼스 상록원(교수식당) 3층에서 열린 기념식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열린 어수선한 외부 분위기에서도 그의 친지와 제자 등 200여 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그의 제자들은 논문 37편으로 엮은 980쪽 분량의 '석문(石門) 이기동 교수 정년기념논총(한국고대사연구의 현단계)'을 봉정했다. 


동국대 사학과 동료교수이자 기념논총 간행위원장인 김상현 교수는 "계명대 노중국 교수가 논문을 일찌감치 투고했으나, 이메일로 원고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만 배달 사고가 생겨 싣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논총집이) 1천쪽을 넘기지 못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taeshik@yna.co.kr

(끝)  



2008.09.15 09:15:01

<사람들> 정년퇴임 앞둔 이기동 교수

"지인들 기념논총 원고 쓰느라 허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고대사 전공인 동국대 이기동(李基東) 교수에게 2008학년도 2학기는 교수로서 강단에 서는 마지막 학기다. 만 65세.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학도인 그도 내년 2월이면 정년퇴직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기동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마이크 잡은 일본 규슈대학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떠날 날이 반년이나 남았지만 그가 미리 퇴임록을 썼다. 최근 발간된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 학술지 '신라사학보' 13집에 투고한 '내가 본 신라사 연구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 원고는 지난 7월 12일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 제74차 연구발표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특별강연록을 다시 정리한 것이지만, 그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학계에서 불문에 부쳐온 미묘한 일화 몇 가지도 털어놓았다. 세심히 살펴보면 폭발성이 있는 사안이지만,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파문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원고를 그가 어떻게 여기는지는 "미리 쓴 내 유언록"이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2016.10.14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이기동. 늘 저런 표정인데, 앞서 보았듯이 본인 정년퇴임식에서도 이 모습을 연출했다. 도 닦는 모습이라 해두자.



노년에 이른 여느 연구자들이 으레 한번씩 정리하듯이 어떤 인연으로 역사학, 그 중에서도 한국고대사를 택하게 되었는지, 나아가 어떤 학문적 역정을 밟아왔는지를 밝히는데 더해 그 자신에 얽힌 미묘한 대목들도 비교적 솔직담백한 어조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끝내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다고 털어놓는다. "생존해 있는 분들이 많아 그분들과 관계된 이야기는 차마 할 수는 없었다"는 말로 변명한다. 


한때 백제사에도 투신했지만, 그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신라사가 주축이며, 그 중에서도 골품제도와 화랑제도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한국학계에서는 교과서적인 위치를 점한다. 


그가 고백하듯이 1980년대는 신라사 연구의 '황금시대'였다. 


2016.09.30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 질문 답변 도중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사라지는 이기동.



이 무렵 "한국에 유학 온 어떤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일본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촌락문서에 대한 재검토가 시도된 것을 계기로, 이에 대한 찬ㆍ반 논쟁이 열기를 띠면서 학계가 온통 떠들썩할 때였"으며 "더욱이 1988년 신라 최고(最古)의 비석이 울진 봉평리에서 발견되고, 그 이듬해에는 영일 냉수리에서 더 오랜 비석이 발견되어 1년만에 기록이 깨지는 등 양비(兩碑)가 몰고온 선풍"이 일었다. 


하지만 "전례없는 활황 속에서도" 이 교수는 "이렇다 할 만한 생산적인 논문을 쓰지 못한 채 지인들의 회갑, 정년, 고희를 기념하는 논문집에 손쉬운 글을 써서 책임을 모면하는 일로 소일하고 말았다"고 회고한다. 


이런 처지를 이 교수는 "뭔지 모르게 학문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러던 차에 "1999년에는 설상가상으로 뜻밖에 몸에 이상까지 생겨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만다. 그 '이상'을 명시하진 않았으나, 당시 암 판정을 받고 큰 수술까지 받은 일을 말한다. 


2016.09.30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한국사학진흥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국정감사에서 답변하는 이기동.



그는 살아있는 사람과 관계 되는 이야기는 이번 강연록에서 극구 말을 아꼈지만, 이미 고인이 된 선배 혹은 그 자신의 선생들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화를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이 중 인상적인 대목은 해방 이후 1세대 한국고대사학자들인 김철준(1923-1989)과 이기백(1924-2004)를 비교한 대목. 김철준은 서울대 교수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사신론'으로 유명한 이기백은 서강대와 한림대 교수를 지냈다. 


이 교수는 "대체로 김 선생이 직관을 앞세운 나머지 때때로 독단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던 데 비해서 이 선생은 어디까지나 문헌에 입각한 실증의 입장을 고수했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그만큼 주관성이 배제되고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평가했다.  


국감장에서 당당히 국회의원과 맞서는 이기동


이 교수는 서울대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한 김철준과는 나중에 사이가 안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개인 인연은 일체 함구했다. 


다만, 김철준이 1962년 역사학보에 발표한 유명한 논문 '신라 상고세계(上古世系)와 그 기년(紀年)'이 실은 중국 고대사학계에서 모든 상고사, 고대사는 기록을 의심해야 한다는 이른바 의고파의 거두 구제강의 주장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주의를 요한다. 


김철준은 이 논문에서 신라 상고사에서 박ㆍ석ㆍ김 3성(姓)이 교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세 부족집단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병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직계로 계승된 것처럼 되어 있는 중국 고대 제왕의 계보는 본디 횡(橫)으로 병립(幷立)되어 각 부족의 선조를 종(縱)의 계열로 편성한 것"이라는 고힐강의 주장과 맥락이 같다는 것이다. 


이 교수 본인은 에둘러 표현하려 했지만, 이는 곧 김철준의 논문이 '표절'이라는 주장과 다름 없다. 


국감장에서 국회의원을 가르치는 이기동. 선생 버릇을 못 버려서....ㅋㅋㅋㅋ



이런 여파를 의식했음인지 이 교수는 "이 강연록 때문에 나 자신이 상당히 곤혹스러워질 수도 있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나아가 1961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당시 대학사회가 온통 민주화 운동의 열풍에 휘말리다시피 했을 때도 "고향 선배 한 사람과 함께 영사기를 들고 충북 청원군의 한 벽촌을 찾아가 군정 당국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던 농가 부채 정리사업에 망설이지 말고 고리채 신고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계몽운동을 펼친 적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이번 신라사학보 투고 강연록에는 빠졌지만, 지난 7월 강연회에서는 당시 대학사회 전반이 '반 박정희' 기류로 흘렀음에도 그 자신이 이에 동참하지 않은 까닭을 "처음엔 나도 (정권을 잡은) 군인들이 뭘 하겠냐고 의구심을 보냈지만, 지켜보니 생각보다 아주 잘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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