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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반세기 전 산불을 떠올리며

by taeshik.kim 2019.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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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김천시에 통합된 경북 금릉군 대덕면 조룡1리 샛터라는 산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국민학교 들어가던 그해 우리집은 이 샛터를 터나 그 인근 수백미터 떨어진 양지마을이란 곳으로 이사를 갔다.


샛터에 대략 스무 집, 양지마을에 대략 열댓집 있었는데 옹기종기 양지바른 산기슭마다 동네를 이루는 전형적인 산촌이다. 기와집은 드물어 대부분이 초가였고, 전기는 내가 이사하던 그 무렵에 들어왔고, 전화는 고교 졸업하던 해인가 들어왔다.

태어난 마을 샛터에서 살 때인 것만은 분명하니 적어도 45년은 더 지난 시절이다. 소백산맥이 흘러내린 비봉산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어, 이 산이 우리 마을 진산이라 할 만한 곳이라, 그 기슭에 현재는 직지사 말사인 봉곡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있다.

이 비봉산 정산 밑으로 거대한 암벽이 있고 거기 굴이 있다 하는데 범이 산다 해서 문바우라 부른 곳이라, 내가 아무리 산에서 놀았다 해도 그 근처는 언감생심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강원 산불. 내가 어릴 적 본 비봉산 산불이 이랬다.




이 산이 어느날 불이 났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동네엔 흉흉한 소문이 돌아 불을 낸 이가 이 문바우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 먹던 사람들이라 했다.

불은 비봉산을 거의 다 태웠다. 불길이 사납던 그날 밤 기억이 또렷한데 봉곡사 쪽에서 타고 넘은 거대한 불길이 비봉산 꼭대기를 활활 타올랐다.

이 비봉산 꼭대기서 샛터까지 거리는 얼추 사키로는 넘었을 터인데, 비봉산을 태운 재가 우리 동네까지 흩뿌렸다. 지금 생각하니 더 아찔하거니와 불통이 날렸다면 초가 천지인 우리 동네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강원 산불. 연합DB




산불은 이튿날 잡힌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화는 불가능했다고 기억한다. 그때 동네 장정들이 산불끄기에 동원되었는데 화재진압 장비가 따로 있을리 만무하고 대부분은 솔가지 꺾어 그걸로 불길을 팼다.

그 진압작전이 주효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건은 바람이다. 한쪽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오른 불길이 그 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타고 내리지는 않는다.

정상에 다다른 불길은 필연적으로 정상에서 맞바람을 맞기 마련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불길은 전진을 비로소 멈춘다. 

강원 산불. 화면 기준 왼편에서 바람을 등지고 산불이 타고 올랐다. 반대편은 멀쩡한 이유는 맛바람 때문이다. 연합DB

산불 난 곳 유심히 살피면 내 말이 맞다는 거 확인한다. 온산을 다 태운 불길이 계곡엔 미치치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이며, 반드시 멀쩡한 계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산불을 끄고자 할 때 맞불을 놓는 법이다. 


중계방송을 통해 본 이번 강원 산불도 내 어릴 적 경험과 하등 진배없다. 바람 등지고 산을 타고 오르는 불길은 막을 수 없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맞바람 만나 불길이 제 풀에 죽었을 것이다.

그때 그 막강한 산불이 지나자 동네 어른들이 그랬다. 내년엔 고사리가 많이 날 것이라고. 

맞바람.


실제로 그랬다. 산불이 지난 자리엔 고사리 천지였다. 그 고사리 꺾어 말려 시장에 내다팔아 갈치랑 고등어 물물교환했다.

자연은 실로 오묘하다. 잿더미에선 새 생명이 피기 마련이다. 그 산불로 적지않은 피해를 봤지만, 그 잿더미에선 고사리가 나기 마련이다.

이번 산불로 산림 복구엔 몇십년이 걸리니 하는 말이 나돈다. 그 말이 틀리다고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꼭 그리 비관만이 아니다.

사십오년전 그 막강 불길이 지난 비봉산은 지금은 밀림이 되어 사람조차 다닐 수 없다. 그렇게 이 산하는 간단없이 불이 나고 간단없이 다시 일어나곤 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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