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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벼루광 유득공(안대회 글)

by taeshik.kim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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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발간 '실학산책'에 수록된 글을 원필자인 안대회 교수의 허락만 얻어 전재한다. 올해(2007)는 마침 유득공 사거 200주기가 되는 해다.  

 

 

벼루광 유득공 

      안대회(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의 옛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발해고》를 비롯한 저술을 여럿 남긴 유득공(柳得恭)은 학문적 관심사와 취미가 다양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에는 벼루도 포함된다. 그는 벼루를 많이 가지기도 했고, 또 조선 벼루의 역사를 정리하여 《동연보(東硯譜)》란 저술을 짓기도 했다. 자연 먹에도 관심이 깊었다. 하기야 어느 문인치고 벼루와 먹에 무관심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뿐, 벼루의 요조조모를 조사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수준에 나아간 선비는 거의 없었다.

 

벼루에 관한 다양한 글 남겨

 

유득공은 유달랐다. 벼루를 소재로 시를 여러 편 썼고, 벼루에 새긴 연명(硯銘)도 문집에 전하는 것만 10편이다. 모두 그가 소장한 벼루 10방(方)에 쓴 명문(銘文)이다. 순서대로 종성의 창석(蒼石), 위원의 자석(紫石), 북청의 청석부(靑石斧), 중국 단계석(端溪石), 일본 징니(澄泥), 남포의 오석(烏石), 안동의 마간석(馬肝石), 성천옥(成川玉), 풍천의 청석(靑石), 평창의 적석(赤石)이다. 중국과 일본 벼루까지 포함해서 전국의 유명한 벼루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 내용은 벼루를 얻게 된 사연부터 가치와 특징을 평하는 글까지 다채롭다.

 

그는 충청도 보령의 남포에서 나온 벼룻돌을 최고로, 안동의 마간석을 최하로 평가했다. 남포 벼룻돌은 최고의 명품으로 공인된 단계연, 흡연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임원경제지》에 일부가 실려있는 《동연보》에서 주장했다. 그가 1783년 충청지역을 여행하다 남포를 지날 때 남포산 벼룻돌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일찍이 들으니 좋은 돌이 나오는데, 단계석 흡석에 버금간다고 명성이 자자하다. 모두들 화초석을 사랑하지만 식자들은 푸른 빛 재질을 찾는다”며 “읍지(邑誌)나 ‘벼루의 역사’에서 내가 지은 이 시를 써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벼루를 읊은 자신의 시가 사실을 입증하는 사료나 문서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유득공은 벼루를 얻은 기쁨을 노래한 시를 세 편이나 썼다. 그것도 모두 장편시다. 하나는 그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중국 친구로부터 단계연을 받아 벼루를 만든 기쁨을 묘사했다. 다른 하나는 북청에서 청석 도끼를 두 자루 구한 성해응이 그중 하나를 유득공에게 주자 그것을 가지고 벼루를 만들고서 시를 지었다. 그가 연명에서 묘사한 북청의 청석부(靑石斧)가 바로 이 벼루일 것이다. 성해응 역시 벼루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마니아였다.

 

벼루 들고 달아나 벼루값 대신 시(詩)를 보내

 

나머지 하나가 일본의 명품 벼루인 적간관연(赤間關硯)을 이정구(李鼎九)로부터 뺏고서 쓴 시다. 특히 이 시가 흥미롭다. 시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벼루를 보고서 나는 갖고 싶지만

친구는 매우 곤란하다는 낯빛을 띠네.

미불(米)은 옷소매에 벼루 숨겨 훔친 일 있고

소동파(蘇東坡)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진 일 있네.

옛사람도 그리 했거늘 나야 말해 무엇 하랴!

나꿔채서 달아나니 걸음도 우쭐우쭐.

이 벼루는 색깔이 붉어서 얻기가 그리도 어려운 겐가?

적간관(赤間關)이란 그 이름이 이상할 것 없구나.

<적간관연가 증잠부(赤間關硯歌 贈潛夫)>

 

이정구가 가진 벼루는 일본제 벼루 중에서도 뛰어난 품질로 알려졌다. 흔치 않은 좋은 벼루를 본 유득공이 당연히 욕심을 부렸으나 이정구가 선뜻 줄 리 없다. 유득공은 허락을 득할 것도 없이 그냥 가지고 달아났다. 집에 가서는 그 벼루에 먹을 갈아 장편의 시를 써서 벼루값 대신 보냈다. 벼루를 예찬하고 자기가 가지고 달아나서 미안하다는 사연이다. 그는 유명한 서예가인 송나라의 미불과 소동파가 좋은 벼루를 탐내 훔친 옛일도 있으니 벼루광인 자기도 할 수 없이 그리했노라고 변명했다. 그런 유득공을 이정구가 미워하거나 돌려달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득공은 벼루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이자 벼루 사랑을 문예작품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글쓴이 / 안대회

·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푸른역사, 2007

『산수간에 집을 짓고』, 돌베개, 2005

『북학의』, 돌베개, 2003

『나를 돌려다오』, 태학사, 2003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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